199화
찻잔을 내려놓은 초윤이 다과상 가운데로 한 손을 뻗었다. 검지 끝으로 상을 가볍게 가로지르며 한 일 자를 그리자 손톱을 따라 그을린 자국이 길게 새겨졌다.
“중요한 건, 너와 나를 연결하는 실이 생겼고.”
초윤의 손이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선 시작점을 지그시 눌렀다. 가르치듯 조곤조곤 이르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 자신이 키운 아이들도 이런 느낌을 받았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나에겐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할 힘이 있었으며.”
그리고 약선의 손이 거두어진 선 끝에는 커다란 새의 그림자 모양으로 까맣게 탄 문양이 남아 있었다.
“신물 또한 너와 같은 자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뿐이다.”
하여간 제멋대로인 입으로 사람을 십 년 넘게 고생시킨 인간 아니랄까 봐, 하는 말 한 마디마다 의문은 열 가지씩 불어나기만 했다. 하윤은 잠시 질린다는 듯 찡그린 채 초윤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좀 더 잘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무언가 말해 주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듯하니,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성실하게 하지 않을까.
“신물이…… 모용서가 들고 다니던 까마귀 신물 말씀하시는 것 맞죠? 그건 그냥 모용서가 미래의 기억을 갖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한 물건 아닌가요?”
“세상이 조형되기 시작한 태곳적에 태어나, 당시의 권능을 고스란히 지닌 신수의 일부분이다. 적어도 그 다리 수만큼의 기적을 행할 수는 있었겠지.”
“기적이라 하면…….”
“너는 가르치는 데엔 재주가 있어도 알아먹는 데엔 영 글렀구나. 가진 자의 염원대로 세상을 다시 빚어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소리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가질 법한 물건이다!
하윤은 얼굴을 감싸 쥐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오랜만에 소설의 설정 같은 이야기를 접하자 괜히 괴로워졌다. 하지만 이게 사실이면 〈귀환영웅〉 내에서 부각되었던 신물의 영향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래. 세상을 다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물건이니 모용서를 회귀시켜 주는 것쯤은 가능했겠지. 위험할 때마다 조금씩 도와줄 능력도 충분했을 테고. 그런 게 도대체 왜 요녕성 지하에 묻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을 웅크린 채 고달픈 자세로 굳어 있던 하윤이 손바닥 너머에서 중얼중얼 말했다.
“……신물은 가지기만 하면 누구든 쓸 수 있는 건가요? 모용단이 갖고 있었을 땐 못 썼던 것 같은데. 모용서도 그걸 들고 다닌 지 한참이 지나서야 회귀를 했고…….”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보통은 타고난 핏줄이나 정해진 대가가 조건이다. 모용서는 신물에게 무엇을 바쳤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죽기 직전에 신물을 쥐고 다짐했다는 사실만 알아요.”
하윤은 한숨을 푹 쉬고 마른세수를 벅벅 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마찰에 달아오른 뺨이나 엉망이 된 머리는 상관없다는 듯 찡그린 표정으로 중요한 의문을 꺼냈다.
“그 신물이 왜…… 저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죠? 저 같은 사람이 도대체 뭔지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제가 읽은 대로라면 이 이야기는 모용서의 회귀로도 충분했어요. 애초에 제가 왜…… 제가 뭘 할 줄 안다고.”
“듣자 하니 네가 읽었다는 책은 명림서하의 세계인 모양이구나. 그조차도 끝까지는 보지 못한 모양이고.”
“……예?”
서하……. 어딘가 낯익은 어감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두 음절을 입 안에서 굴리던 하윤은 작게 신음했다. 그러고 보니 모용서가 사현이에게 부르라고 했던 본명이 서하였다. 자신 또한 이전에 그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어 어렴풋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명림서하라고? 모용서가 모용세가에 입적하기 전에 쓰던 이름인 건가? 그러면 명림은 성인가? 무협지에선 처음 들어 보는데.
그렇다면 ‘명림서하의 세계’는 모용서가 신물을 써서 세상을 뒤바꾼 〈귀환영웅〉을 뜻하는 말일 테고……. 그럼 내가 엔딩을 보지 못한 채 이곳에 오게 된 것까지 맞고.
잠깐만. ‘명림서하의’ 세계라고?
“……지금은 다른 사람의 세계,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그 신물을 써서 새로 만든 세계인 건가요?”
“그래.”
“모…… 명림서하의 세계는 끝났어요?”
“끝난 지 오래다.”
“아니 그러면 지금은 도대체 누구……. 애초에 세계라는 게 무슨.”
하윤은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으로 질문을 토막 내어 횡설수설 내뱉었다. 그러니까 〈귀환영웅〉은 엔딩이 났는데, 12년을 넘게 〈귀환영웅〉인 줄 알았던 이곳은 사실 주인공이 다른 별개의 소설이라는 뜻인가? 등장인물과 주요 사건은 똑같이 둔 채로 주인공만 다르게 내세워서 출간할 수 있나? 그런 소설이 나왔었나? 평행세계 외전 같은 게 있었나? 애초에 작가는 누구였지? 젠장, 필명도 생각이 안 나!
종국에는 묻는 법도 잊고 입만 떡 벌린 채 안절부절못하는 하윤을 가만히 기다리던 초윤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고갯짓으로 하윤의 옆을 가리키며 느닷없는 말을 했다.
“그새를 못 참고 이곳까지 따라와선 네 곁에 있지 않느냐. 아둔하기는.”
“예?”
아무것도 없었는데? 의아해하며 옆을 돌아보는 순간,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작고 까만 덩어리가 갑작스레 하윤의 허리에 덥석 매달렸다. 하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제 몸의 반절밖에 되지 않는 것을 허둥지둥 떼어 냈다.
하지만 손에 닿은 감촉이나 동그란 머리꼭지, 잔뜩 힘을 주느라 옹송그린 어깨의 형상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자신에게 들러붙은 조그만 뒤통수를 넋 놓고 바라보던 하윤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천오야?”
그러자 머리를 푹 숙인 채 하윤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희고 얇은 피부에 물결치듯 부드러운 머리카락, 바닥이 뚫린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와 옷자락을 꼭 붙잡은 손. 기억 속의 어린 천오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애가 왜 여기…… 천오야?!”
그것도 다름 아닌 처음 만났을 적의 행색을 한 채.
아연하게 넋두리하던 것도 잠시, 하윤은 경악하며 허둥지둥 아이의 뺨을 붙잡고 안색을 살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심상에 불과하니, 초윤처럼 아예 하윤의 의식에 자리 잡은 것도 아닌 천오는 분명 그저 기억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을 텐데 애지중지 잘 키워서 호빵 같던 뺨따귀는 다 어디 가고 해쓱한 소아 환자만 남아 있었다. 타고 남은 잔해에 쓸리고 찢겨 엉망인 다리와 손, 뒤집힌 손톱과 군청색 비단옷까지 그때 그대로였다.
하윤은 아이를 끌어안아 무릎에 앉히려고 했으나 자그마한 애가 뭐 이렇게 고집이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윤이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입 한번 열지 않고, 그저 하윤의 허리를 한가득 안아 붙어 있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경황이 없어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초윤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대뜸 입에 올렸다.
“염라군 주천오(周天吳)는 명림서하의 가슴우리를 뜯고 심장을 터트려 신물을 빼앗았다.”
“예?”
“그게 명림서하의 결말이었고, 새 주인이 된 주천오의 염원을 위해 다시금 조형된 세계가 이곳이다. 주천오가 살아온 ‘명림서하의 세계’를 ‘주천오의 세계’로 바꾸며 더해진 몇 가지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너라는 뜻이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좀 더 묵직해졌다. 꾸물꾸물 파고들고 들러붙는 아이를 반사적으로 토닥이며, 하윤은 방금 들은 사실을 소화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니까…… 모용서가 가족을 잃고 떠돌다가, 중원을 점령한 마교에게 죽은 게 기존의 세계.
그렇게 죽은 모용서가 신물의 힘으로 시간을 되돌려 회귀 생활을 한 게 〈귀환영웅〉.
〈귀환영웅〉의 염라군 주천오가 모용서의 신물을 빼앗아 다시 시간을 되돌린 게…….
내가 살아온 이곳…….
무협소설이 마교 교주한테 죽는 엔딩 나도 되는 거야?! 수백 편에 걸쳐서 그 난리를 쳐 놓고 최종결전 패배 결말 괜찮아?!
하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니까 애초에 원작을 알았다고도, 알지 못했다고도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한동안 ‘아니…….’만을 연신 흘리며 이마를 짚고 입가를 쓸고 설명을 요구하듯 손바닥을 내보이다 다시 이마를 짚은 하윤이 물었다.
“그렇지만 천오에겐 ‘주천오’의 기억이 없었는데요.”
“명림서하의 소원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모두를 지키는 것’이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해야만 이룰 수 있는 바람이니 이전의 기억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천오의 소원은 ‘주천오’의 기억이 없어도 이룰 수 있는 건가. 얘는 대체 뭘 빌었기에…….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천오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선 신물에게 ‘저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는 건가요?”
“그래.”
“제가…… 뭔데요?”
“그건 네가 직접 물어보거라. 네게 퍽 깊은 정을 쌓은 아이 아니더냐.”
초윤이 찬눈으로 조용히 비소하며 말했다. 무표정에서 느껴지는 냉랭한 한기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하윤은 아이를 괜히 더욱 쓰다듬으며 따지듯 호소했다.
“천오의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 세상이 바뀌었다면 멸문지화를 당하는 일도 없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 기억도 없으면 자기 바람을 들어줬는지 어떻게 알아요.”
“가족은 소원에 없었던 모양이지. 나는 명림서하의 바람도 본인에게서 직접 들었을 뿐이고, 주천오와는 대면한 적 없어 모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염라군 주천오는 복수를 위해 마교 교주의 자리에 오른 사람인데……. 〈귀환영웅〉에서 모용서와 결전을 벌였다면 정파 무림을 다 말살하지도 못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천오가 언제 마지막으로 가족의 복수를 얘기했더라?
일곱 살 적에 보이던 복수심 그대로라면,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을 얘기하거나 조금이라도 조급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나?
하산을 해서도 천오는 무심서에 돌아가고 싶어 했을 뿐, 가족을 죽인 사람들을 궁금해한 적은 전혀 없었다. 하물며 다른 곳도 아닌 하오문에 머물면서도 복수 대상에 대한 정보를 묻거나 찾으려 한 적조차 없었다.
품에서 느껴지는 무게만큼 미묘한 어긋남이 가슴을 눌렀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니…… 그 어린 나이에 흉수들의 목을 전부 뽑아 버리고 싶다고 말하던 증오심은 어느 순간부터 천오의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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