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지평선이 태양을 먹고 간신히 끄트머리만을 뱉었다. 길게 늘어진 해그늘을 장막처럼 휘감은 초윤의 형상은 여전히 희게 빛나고 있었다. 서문천오는 해건금침이 자신의 기맥을 막고 있어 도리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신에 내력이 충만했더라면 차오르는 시기심과 출렁이는 독점욕에 속절없이 휩쓸려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제 와 벗어날 수 없는 교리와 같았다.
-그렇다면 너는 아직 죄악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스승의 살갗을 응시하던 천오가 정허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초윤의 옷소매를 푹 적신 혈흔이 조금 더 명확히 보였다. 스승님을 해했다며 분노하기에 앞서, 서문천오는 사실 초윤의 양팔에 새겨진 상처마저 탐이 났다. 저 깊은 상흔을 내가 냈다면.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간 가정은 허황하고 불경하기 짝이 없었으나 기이한 열기로 화하여 뱃속에 번졌다.
그래……. 부러웠다. 서문천오는 저자가 부럽기 짝이 없었다. 서럽고 슬픈 것과는 별개로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가며 기어코 캐내고 싶었다. 너는 도대체 어떻게 스승님을 그만한 무게로 짓누를 수 있었는가. 도대체 어떻게 스승님께 긴 세월 잊지 못할 흔적을 남길 수 있었는가.
……하지만.
-타인의 감정을 뜻대로 휘두르려 하지 말고 네 진심을 내보이며 그저 정진하거라.
서문천오는 끝내 스승에게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 냉담한 말에도 이토록 가슴이 시린데 미움을 산다 생각하면 저절로 숨이 막혔다.
함께 죽는 건 쉬웠다. 천오는 좀 더 어렵고 오롯하며 온전한 귀애를 받고 싶었다. 나만을 위한 스승의 감정을 사고 싶었다. 언젠가의 달 밝은 날 내리깐 눈에 가득하던 애정을 기억하기에, 앞날이 뻔히 보이는 나쁜 짓을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이대로 스승을 잃는 것만큼 두렵고 무서웠다.
배회하는 망령처럼 엄습하던 심마가 녹아내리듯 모습을 감추었다. 이를 악문 천오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백홍을 풀어 무릎 위에 올렸다. 마음 같아선 제대로 호법을 서고 싶었으나, 스승께서 보고 배우라 하명하셨으니 따라야 했다.
-올바르게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지킬 수 없는 대신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살의를 그러모아 손안에 쥐고 음울한 시선은 멀리 두었다. 오래전에 덮어 두었던 살생부를 펼치고 빼곡히 쓰인 이름들 위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올바르게 강한 사람, 상처를 입으면 온건하게 스스로를 치유하려 하는 사람. 무엄한 시선으로 스승님을 능멸한 이들의 피로써 섟을 삭히고, 원흉이 되는 사백의 심장을 뜯어 약으로 달여야겠다. 스승님께서 내 가슴에 길이 지워지지 않을 멍울을 남기려 하시니 나를 낫게 할 방도는 이것밖에 없다.
반각의 시간이 흘렀다. 서문천오는 에워싼 인간들의 용모와 기운을 모조리 기억한 뒤 스승을 기다렸다. 초윤의 뺨을 타고 흐르던 피가 점차 짙어질수록 돌바닥 사이 소담하게 피어 있던 들꽃들은 바싹 말라 시들었다. 습하게 젖어 있던 공기가 조금씩 건조해지며, 초윤이 앉은 자리의 흙바닥이 바싹 마른 불모지가 되어 갔다. 이윽고 눈을 뜬 스승의 흰자위는 핏줄이 터져 군데군데 붉게 얼룩져 있었다.
“…….”
초윤은 사현의 눈두덩을 덮고 있던 손을 뻣뻣이 들어 올렸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아이의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초윤과 똑 닮은 연갈색 눈동자가 동공을 좁히고 있었다.
“……하.”
안도감에 참았던 숨을 토한 것도 잠시, 무리한 내공의 운용에 결국 기맥이 꼬인 초윤은 아랫배를 감싸 쥐고 경련하며 몸을 웅크렸다. 입을 꾹 다문 채 신음 한 자락 없이 고통을 내비쳤다. 단박에 살심을 지우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천오는 사형을 치워 낸 뒤 황급히 스승을 불렀다. 단정히 꿇어앉은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웅크린 어깨를 흔들었다. 자신이 잠시나마 초윤과 동귀어진할 마음을 품었다는 것도, 차라리 같이 죽고 싶단 생각을 했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연모하는 이의 고통에 그저 혼비백산했다.
그때, 고개를 숙인 채 가늘게 떨던 초윤이 천오의 양손을 낚아채 모아 잡았다.
“스, 스승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고개를 숙인 지금 시야에 들어오는 건 아이의 상처뿐이었다. 제 손보다 큰 천오의 손등을 감싸고 손바닥이 보이도록 열었다. 과도한 출혈로 초점이 흐리멍덩해 눈살을 찌푸렸다. 남매의 환골탈태를 끌어내기 위해 단전의 내력으로도 모자라 주위의 기운까지 긁어모았더니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몸서리치며 식은땀을 흘릴 만큼 생소하고도 선명한 통증이 아랫배에 연신 못처럼 때려 박혔다.
하지만 이 손을 앞에 두고 돌아설 순 없었다. 낫게 해 주겠다고, 낫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건금침도 뽑아 주지 못하게 된 이상 이것만은 해내야 했다. 이 지경에 이르러선 초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지혈이 되지 않은 양팔의 자상을 문질러서라도 약을 발라 주려 했으나, 명치에서 조약돌만 한 응어리가 막을 새도 없이 치밀어 올랐다. 뜨거운 선혈이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와 입 안을 채우더니 왈칵 흘러넘쳤다. 핏기 없는 입술을 적시고 천오의 손바닥에 떨어져 고였다. 붙잡은 천오의 손이 요동치듯 한차례 꿈틀거렸다.
내상을 입은 충격으로 한 박자 늦게 이를 알아차린 초윤은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타액과 섞여 길게 늘어진 핏물이 턱에 차갑게 와 닿았고, 실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눈앞을 가렸다. 마주친 아이의 눈에 어려 있는 기색을 보니 지금의 자신이 눈 뜨고 못 볼 꼬락서니란 사실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야 놀라겠지. 냅다 손에 피를 뱉었으니 불쾌할 수도 있을 테고……. 미안한 마음으로 옅게 자조한 초윤은 이를 닦아 주는 대신 엄지로 펴 발랐다. 내장이 진탕되어 토한 피든 팔뚝을 그어 맺힌 피든 하나같이 약선의 체액이라는 점은 똑같았다. 좀 역할 순 있어도 당장은 상처를 낫게 하는 일이 중요하니 조금만 참아 주길 바랄 뿐이었다.
피를 뱉고 나니 머리는 멍했으나 통증은 한결 가라앉았다. 초윤은 막연한 기분으로 천오의 양손을 맞잡았다. 그러고 보니 대답할 게 있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초윤은 조금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약한 탓이다.”
“……예?”
“너 때문에, 네 사저와 사형 때문에 떠나는 게 아니다. 오로지 내가 약한 탓이다.”
빌어먹을 약을 발라 주었으니 가만히 있어도 낫겠지만 운기조식을 하지 않으면 제 효과를 다하지 못하는 게 영약이었다. 천오는 조만간 오로지 본인의 힘으로 화경에 오를 수 있는 아이란 사실도, 초윤과 내내 불귀산맥에서 살아온 덕분에 벌모세수가 따로 필요하지 않은 정순한 몸이라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다는 것 또한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있는 힘이란 힘은 다 갖다 써 버린 탓에 단전은커녕 근방의 기운까지 아예 텅 비어 버렸는데 어떡할까. 천오의 손을 매만지며 떠올리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초윤은 혹시라도 아이가 빠져나갈까 봐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준 뒤 단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내력을 끌어오기 시작했다.
“노파심에 말해 두지만, 무위가 높아졌다고 자만하며 나를 찾아다니지 말거라. 두려운 사람이다. 막을 방도가 없어. 어쩌면 나 하나의 칩거로 끝나 차라리 다행일 정도다.”
“이게 무슨……. 스승님! 놓아주십시오. 안 됩니다!”
“백 년을 넘게 떠돌아도 방도를 찾지 못한 내 탓이다. 내가 너무 많은 일을, 너무 많은 이를 망쳤지. 끝맺지도 못하고, 가두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한 대가를 이제야 받는 것뿐이니 오래 상심할 필요 없다. 너는 네 인생을 살거라.”
봇물 터지듯 횡설수설 흘러나오는 말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초윤은 뼛속에서, 근육에서, 혈관에서, 내장에서 긁어모은 원초적인 기운을 기맥으로 밀어 넣었다.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 천오의 몸으로 들어가도록 길을 열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천오가 기겁을 하며 물러나려 하자 떨어지지 않도록 아예 손깍지를 꼈다. 시야가 흔들리고 부옇게 번져 애 얼굴을 못 보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싫습니다, 스승님! 필요 없습니다. 받고 싶지 않……!”
“운기 중에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섣불리 입을 열지 말라 가르쳤다. 내 선천지기를 공중으로 날려 보낼 셈이더냐?”
심법으로 쌓은 내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결하며 광활한 힘이 서문천오의 기맥을 채우며 쇄도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선천지기가 무엇인가. 사람의 몸에 깃든 자연이자 생명의 근원. 죽기 직전 경험하는 회광반조의 원천이자 원기(元氣). 즉 약선 초윤의 목숨 아닌가!
허투루 움직이면 정말 함께 죽을 수 있어 저항을 멈추었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싫었다. 스승의 목숨값이 강대한 힘으로 몸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생기를 잃어 가는 초윤과 지근거리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게 가혹했고, 볼품없이 떨기만 할 뿐 역으로 돌려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저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천오는 스승의 현명한 두 눈에 번들거리는 미치광이 기운을 난생처음 엿보았다.
“하, 하지…….”
“마교가 기승을 부릴 테니 몸을 보하고 단련에 힘쓰거라. 다신 이리 낫게 할 수 없으니 다치지 말고, 또 무모한 일에 투신하지 말거라. 행동하고 발언하기 전에는 꼭 상대의 입장에서 세 번의 생각을 거치고, 네 사형제와 싸웠을 땐 반드시 보름을 넘기 전에 화해하거라.”
“그만, 스승님. 그만하십시오. 이러다 정말…… 정말 끝이 납니다.”
“너는 거뜬히 가능할 아이니, 언젠가 네가 장성하였을 때 스스로 충분한 듯싶다면 중원과 마교는 도모하여도 좋다. 그러나 마교의 총본산을 넘어 나를 찾아다니진 말거라. 때가 되면 나올 것이니 지금에 영영 매여 살진 말고, 네 잘못을 찾아 자학하지 말고. 반드시 벌어졌을 일이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만…….”
“알았느냐?”
공황에 빠져 흐느끼지도 못한 채 쌕쌕 숨만 고르던 천오는 스승의 단호한 목소리를 듣고 얼어붙었다. 알았냐니, 알 것 같은가. 단전을 찢어서라도 내게 주신 목숨을 꺼내 되돌려드리고 싶은데 정녕 수긍할 것 같은가. 이대로 당신을 보내 드리게 생겼는데 다칠 정도로 무모하게 굴지 않을 것 같은가.
내가 당신을 찾아다니지 않고 배길 것 같은가.
지금도 충분히 증오스러운 나를 자학하지 않을 것 같은가.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들어 본 스승의 발언 중 가장 말이 되지 않았다. 천오는 분노했다가, 서러웠다가, 간절했다가, 다시 노여워했다. 언성을 높여 스승의 착각을 깨트리고 싶었다. 당신 없이는 무엇도 불가능하다고, 당신에게 배운 것이라곤 오로지 자기 파괴적인 헌신뿐이라고 성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솟구치던 부아는 제 눈을 빗겨나가 뺨에 고정된 스승의 시선을 보고 단숨에 가라앉아 버렸다. 초윤은 이미 앞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있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팔뚝에선 여전히 피가 흘러 팔꿈치에 맺혔다.
“……알겠습니다.”
천오는 홀린 듯이, 무언가 빼앗긴 듯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허탈한 대답에 안도한 초윤이 옅게 웃었다. 그리고 곧장 허물어지며 천오의 품에 툭 얼굴을 묻었다. 깍지를 낀 채 붙들고 있던 손에선 힘이 빠졌고, 체온은 차갑게 식어 갔다.
미약하게 새어 들어오던 햇빛이 땅 밑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대로 잠시 멈춰 있던 천오는 천천히 팔을 올려 스승의 몸을 보듬어 안았다. 초윤에게선 여전히 약과 생풀 냄새가 묻어났다. 단전에 피어올랐던 하얀 촛불을 입으로 불어 꺼트린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것 같았다.
넋이 나간 것처럼 맥없이 앉아 있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이가 소년의 형상으로 앞에 서 있었다. 허리를 숙여 축 늘어진 초윤의 손목을 쥐고 옅게 웃었다. 당기는 힘에 속절없이 딸려 가는 스승을 잡고 매달렸으나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손에 붙들려 제지당했다. 멀리서 이지를 강탈당한 채 인벽(人壁)을 치고 있던 사람들이 어느새 빽빽이 모여들어 온몸으로 천오를 압박했다. 절대적인 명령을 받은 강시처럼 천오의 몸을 무작정 움켜쥐어 끌어내고 팔다리를 껴안았다. 내공이 봉해진 데다 초윤의 선천지기조차 아직 다 흡수하지 못한 천오는 오로지 본신의 힘으로 인파를 밀어 내다가 붙잡히고, 뛰어오르려다 끌어 내려졌다. 억센 손톱에 얼굴과 목이 긁히고 무복이 잡혀 찢겨 나갔다. 무게와 힘에 짓눌려 걸음을 떼기는커녕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간신히 쥐고 있던 흰 옷소매가 손끝에서 미끄러지자, 참다못한 천오가 맨손으로 살초(殺草)를 펼쳤다. 주인 잃은 머리통과 팔다리 여럿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몸뚱이 몇 구가 바닥에 널브러졌지만 금세 밀려든 다른 사람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천오는 비키라며 협박하고, 스승을 애타게 부르짖고, 모조리 죽이겠다며 다짐하고, 다시 울면서 스승을 불렀다. 손발에 닿는 족족 남의 살과 뼈를 뜯어내고 꺾어 버리며 어떻게든 걸어 나갔다. 땅거미 진 하늘이 온통 깜깜해지고 먹구름 뒤 달이 창공을 가로지르는 내내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몇 명의 사람들이 도망가고, 하오문에 멀쩡히 서 있는 인간이 하나도 남지 않은 뒤에야 서문천오는 그 틈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어깨는 한쪽이 빠졌는지 이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부러진 팔은 멍으로 뒤덮여 부어올랐고, 무릎 또한 어긋났는지 발을 디딜 때마다 관절 사이에 가시가 박히는 느낌이었다.
서문천오는 비척비척 몇 걸음을 걷다가 남의 피로 흠뻑 젖은 얼굴을 거칠게 비벼 닦았다. 아직까지도 시야에 어른거리는 흰 옷자락을 찾아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새로이 개동하는 햇빛이 머리 위로 붉게 내려앉았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고 말았다.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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