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상완, 중완, 건리와 하완혈을 거치면 하단전에 속하는 기해(氣海)혈을 관통합니다. 기해혈은 정을 단단히 갈무리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선천 원기의 바다가 되기에 적합합니다.”
“어쭙잖게 심법을 배운 것들은 무작정 기해혈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하여 제 아랫배가 바다인지 개울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유는 무엇이냐.”
“관원혈을 등한시했기 때문입니다.”
석죽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대답하던 천오가 새까만 눈을 툭 떨어트렸다. 사저와 사형의 머리에 몰린 채 기세를 다듬는 스승의 내력을 물끄러미 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조급한 마음에 한없이 졸아들던 기분이었는데, 초윤과 시선을 한 번 마주쳤다고 찬물에 담갔다 뺀 듯 진정이 되었다. 어째서일까. 의문은 길지 않았다.
“경기(經氣)가 드나드는 석문(石門)혈을 통로로 하여 관원혈과 기해혈의 교류가 항시 원만하도록 해야 합니다. 관원은 호흡의 관문, 오장육부와 경락의 뿌리이며 진기와 원기가 발생하는 곳이기에 원시 단전입니다.”
아마도 스승님의 감정에 나까지 동화된 덕분이겠지. 스승의 심신이 주위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은 어렸을 적부터 많이 봐 왔고, 이는 약선 초윤의 무공 때문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물며 생풀 냄새가 주위에 진동하도록 내력을 운용하고 계시니 바로 앞에 있는 자신에게 반향이 없을 리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다음으로는 신체의 중심이자 내실의 끝, 중극(中極)혈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속을 채우는 이 서늘함이, 하염없이 출렁이던 해일을 억지로 얼려 굳힌 듯한 한기가 스승님의 현 상태라는 말인가.
스승의 안수(眼水)가 자연히 멎은 게 아니었다. 그에 맞추어, 자신의 조급함도 저절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저 당장에 더 중요한 일을 해내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고 간신히 고개를 돌려 외면했을 뿐이었다. 터질 듯한 가슴을 간신히 동여매고, 혼란스러운 머리는 강제로 마비시켰을 뿐이었다.
어째서?
사저와 사형을 치료하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가?
“……마지막으로 치골 결합에 자리한 곡골혈을 지나면 회음혈, 임맥의 낙혈입니다.”
그들의 부상은 위중하긴 하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곳을 벗어나서 조치해도 늦지 않은데, 왜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이토록 위험한 일을 벌이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밀쳐 낸 뒤 저자와 나누는 이야기를 숨기시고, 저자가 입히는 상처를 고스란히 양팔에 매단 채 돌아와 다급하게 구시는 까닭이 의문스러웠다. 그저 돌아가면 될 일 아닌가. 사백이고 뭐고 이번에야말로 무심서에 복귀하면 될 일 아닌가. 쭉정이 같은 인간들일랑 한 손으로 치워 버린 뒤 사저와 사형을 하나씩 짊어지고 사라져 버리면 끝날 문제에 어째서 이토록 절박하게 처신하시는가.
마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것처럼…….
순간 두려운 상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혹한의 가운데에 던져진 것처럼 피부가 시리고 살이 떨렸다. 스승의 손에 내던져질 때마저도 멀쩡했던 등줄기가 삽시간에 식은땀으로 눅눅해졌다. 심장이 조여들어 숨이 막혔고, 턱이 덜덜 요동하며 어금니를 부딪쳤다.
과경에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이것이었는가. 그저 막연했을 땐 이쪽을 보지 말라며 악이라도 썼지만, 이제는 공황이 앞선 탓에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기도 힘들었다. 불안에 흔들리는 천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초윤은 남매의 백회혈을 막 뚫으며 전신을 덮친 탈력감에 가쁜 호흡을 몰아쉴 뿐이었다.
천오가 말한 순서대로 아이들의 혈도를 깨끗이 비운 초윤은 기력이 모자라 마른침을 삼키며 본격적으로 세세한 경맥을 채워 나갔다. 뻐근한 피로와 현기증이 눈앞을 가렸지만 정작 중요한 대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방금 말한 순서를 대주천의 큰 줄기로 삼고 가지를 넓혀라. 미무일식공은 의학과 접목하여 보완한 무공이고, 너는 내게 경혈학을 배웠으니 혈도를 잘못 들어 꼬이는 일을 없을 터.”
아이들의 전신에 내력이 가득해지자, 초윤은 제 피를 남매에게 흡수시키기 시작했다. 몇 방울로 죽어 가던 이의 근육과 뼈를 붙게 하고, 또 몇 방울로 절맥증에 말라비틀어진 기맥에 기워 낸 영약. 고금을 통틀어 신의 약에 가장 가까울 물질을 통째로 들이부었으니 아이들이 비명횡사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실제로 초윤의 피가 치덕치덕 묻은 사영의 생채기는 일찍이 아물어 있었고, 반쯤 떨어져 나간 사현의 귀도 한 줄의 흉터만 남기고 슬금슬금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초윤은 무협지의 비현실성에, 그리고 ‘초윤’의 내력(來歷)에 기대를 걸고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보기로 했다.
“다만 매순환마다 경맥의 원혈과 낙혈, 팔회혈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것까지 읊어 보라 하기엔…… 역시 시간이 없구나.”
“……가셔야 합니까?”
마음을 다잡고 집중하려던 초윤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한참 어리고 순한 제자에게서 들려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음산한 목소리, 그러나 못 들은 척 넘어가기엔 그 속에 도사린 공포심이 와 닿았다.
하기야 초윤마저도 느닷없는 이 상황에 울고만 싶은데 스물도 되지 않은 아이가 얼마나 두려울까. 납치를 당했던 것으로도 모자라, 늘 평온하기만 했던 스승이 돌연 알 수 없는 이에게 상처를 입고 울며 돌아와 화경 타령을 하니 무섭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를 달래줄 수 있는 사람 또한 초윤밖에 없었다. 초윤만은 언제 울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의연하게, 태연하게, 당연하게 아이를 안심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보호자라고 자청할 수 있겠는가.
“그래, 가야 한다.”
“……어째서?”
“처음부터 너를 독립시킬 작정으로 나선 길이었다. 아는 것은 전부 가르쳤고, 너는 약관을 코앞에 두었으며,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니 더는 미련이 없다.”
“아니…… 아닙니다, 스승님. 전 아직 약하고 어리석습니다. 보십시오, 오늘도 자발없이 나섰다가 화를 입지 않았습니까. 저는 스승님의 보호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뻣뻣하게 뻗은 손이 초윤의 손목조차 잡지 못하고 그 주위에서 어물거렸다. 스승은 지금 매우 큰 내력을 다루는 중이었다. 섣불리 건드렸다 흐름이 꼬이면 사형제뿐만이 아니라 초윤마저 화를 입을 게 뻔해, 처치가 끝나기 전까진 손끝 하나도 댈 수 없었다.
괴이쩍은 액체에 삼켜질 때도, 감금되어 제 살을 물어뜯고 나올 때도 멀쩡하던 정신이 스승의 말 몇 마디에 속절없이 찢어지고 이어졌다가 또다시 미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헤매던 천오가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진검을…… 진검을 제대로 쓰는 법도 아직 모릅니다. 배운 의술로 사람을 고쳐 본 적도 마땅히 없습니다. 세상에 나서 봤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화, 화경도 홀로 이루긴 어렵습니다. 저는 스승님이…….”
“그만. 허황된 소리로 네 능력을 깎아내리지 말거라. 넌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거짓말 마십시오. 저자 때문에 저를, 저와 사저와 사형을 버리고 가시는 것 아닙니까.”
서문천오의 기세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제 약한 모습을 한껏 드러내며 스승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자극하던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광괴한 눈동자로 위협을 토했다.
초윤은 이에 덜컥 겁을 먹는 대신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함께 살아온 십여 년 평생 의문은 비칠지언정 반기는 들지 않던 아이가 얼마나 불안하면 이럴까 싶어 서럽기만 했다.
하지만 아둔한 머리로 도출해 낸 최선의 길은 이것뿐이었다.
검은 물결 위에 부초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할 수 없어 시선을 피했다. 예사롭게 굴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표정이 일그러져 입술을 씹었다.
“……천오야, 아가. 버리지 않는다. 버리는 게 아니야.”
“하지만 두고 가실 요량이지 않으십니까. 제게는 그것이 버림이고 배척입니다. 저, 저는 정말 스승님이 필요합니다. 스승님을 배제한 삶은 고려한 적도 없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네가 나를 처음 만났을 적에 말했던 바람은…….”
“이제 와서 그따위 복수는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버럭 내지른 고함이 공터를 채웠다. 어린 소년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와는 별개로, 초윤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을 받아 천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문천오에게 복수가 무의미해졌다고?
부패한 정파에 품은 원한을 뼈대로 구성된 사람이 아니었던가?
막연히 복수를 마치고 마무리되는 원작의 이야기만을 상상해 왔는데, 아니, 정파에 되갚아 줄 생각을 버렸다면 도리어 천오에겐 좋은 일인가?
……내 목적은 뭐였지?
“제발…… 제발, 스승님. 차라리 함께 가겠습니다. 저도 스승님과 함께 저자를 따라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앞으로 몇 년을, 몇십 년을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된다고 하여도 괜찮습니다. 저는 스승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격분하던 천오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애원하며 몸을 수그렸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채 방황하던 손으로는 초윤의 옷소매만 슬며시 그러쥐었다. 천오의 얼굴에서 후두둑 떨어진 물이 바닥에 둥그런 수적을 남겼다. 초윤은 이를 듣고 느꼈으나 냉랭히 말했다.
“……손을 놓거라. 성가시다.”
그리고 초윤의 단전과 피에서 뽑아낸 내력이 남매의 몸속에서 점차 응축되어 형태를 띠고 실체를 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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