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그러나 초윤의 다급했던 표정은 점차 감정을 배제한 듯 냉담하게 변해 갔고, 그에 맞추어 사영의 울음소리 또한 잦아들었다. 형태 없는 토로가 사라지자 불길한 고요만이 빈자리를 채웠다.
이윽고 완전히 통곡을 멈춘 사영은 스르륵 눈을 감더니 스승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무너졌다. 초윤은 이를 의도했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편하게 받아 제 왼쪽 허벅지 위에 뉘었다.
“스승님…….”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천오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초윤의 뒤로 멀찍이 보이는 흰 그림자에 적개심을 내비친 것도 잠시, 둘레를 에워싼 수많은 인파에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도 감지한 이 꺼림칙한 느낌을 스승이 모를 리 없었으나, 그는 오롯이 제 무릎에 눕힌 아이들만 살피고 있었다.
“천오야, 한시가 급하다. 이를 것이 있으니 제대로 앉거라.”
“스, 스승님. 무엇을 하실 요량이십니까?”
초윤은 먼저 오른손으로 사현의 눈두덩을 감쌌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핏물이 사현의 얼굴을 적시고 눈꺼풀 틈새를 채웠다.
“안…… 안 됩니다. 스승님, 고정하십시오. 사저와 사형 둘 다 죽지 않았습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난 뒤에 조치하셔도 충분…….”
“계속 그리 정신을 팔고 있다간 영영 검을 놓치게 될 것이다. 어서 앉으래도.”
빈 왼손으로는 사영의 입을 틀어막듯 덮었다.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간 혈액이 구강에 고이며 아물지 못한 상처를 축이고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초윤은 엄지로 아이들의 이마와 뺨을 가만히 문질렀다.
“도망쳐 나올 때부터 이미 각오했습니다. 제 검이나 손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지금…… 젠장.”
격한 욕지거리를 내뱉은 천오가 몸을 일으켜 와락 초윤을 끌어안았다. 무릎으로 선 채 양팔로 스승의 머리와 어깨를 감싸고 혐오 어린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성이 모자란 머리로도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보이면 안 된다, 들키면 안 된다며 고함치는 심장이 시끄러웠다.
그러나 덜 자란 몸뚱이 하나로는 스승을 온전히 가릴 수 없었다. 초윤의 머리카락 끄트머리까지 촘촘히 틀어박히는 눈길이 역했다. 훑어 내면 떨어질까 싶어 정신없이 그의 여윈 몸을 쓸고 더듬어 안았으나 들러붙는 이목엔 변함이 없었다. 스멀스멀 눈앞을 가리는 증오에 핏대가 섰다.
“빌어먹을, 보지 마!”
공력을 담은 외침이 하오문을 가득 채웠다. 모인 이들의 고막을 흔들고 뇌를 진탕 시킬 정도로 성마르고 폭력적인 명령이었다. 하지만 관중들은 귀와 코에서 질질 피를 흘리면서도 초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단순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강제력에 사로잡힌 모습이었다.
헤매던 시선이 단숨에 월량을 향했다. 월량은 새까만 압박감을 즐기듯 선하게 웃어 보였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오르던 뱃속을 단숨에 태우고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안은 스승의 등에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우고,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냈다. 이번에야말로 저 조그만 머리통을 터트릴 호령을 내리려 했다.
“보지 말……!”
“……화경이 무엇이라 했지?”
어느덧 들려 온 자그마한 물음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제 모든 내력을 기폭시킬 생각이었다.
품 안에서 작은 촛불이 피어오른 느낌이었다. 늘 고요하던 스승의 단전을 중심으로 주위의 공기가 천천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안개처럼 희고 찬 불꽃은 때때로 흔들리기도, 기울기도 하며 야금야금 지천의 기운을 먹어 치웠다. 들불처럼 세를 키우는 대신 한없이 웅크리고 기맥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서문천오는 무슨 짓을 해도 이 빛을 다 가릴 수 없었다.
비수 같은 직감에 꿰뚫리자 아득한 탈력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초윤은 천오의 가슴에 툭 이마를 기대고 다시 말했다.
“설마 잊었느냐?”
“……만물을 창조해 낸 힘으로 전신을 채워 자연의 이치에 첫발을 들이는 단계가 조화지경(造化之境)이라 하셨습니다. 무아몽(無我夢)에 닿는다면 나 자신의 존재는 오로지 뜻과 의지로써만 증명되니 모든 것이 고정불변하되 천변만화하고…….”
머릿속에 새겨 두었던 목소리를 따라 읊조렸다. 여태껏 전부 이해하진 못했으나, 스승이 가르쳐 주었단 것만으로도 막중한 가치를 띤 구절이었다. 말끝을 흐리고 숨을 고르던 천오는 떨어지지 않는 손으로 초윤을 놓았다. 곧게 정면을 응시하는 눈과 마르지 못한 뺨을 너절한 손등으로 조심스레 닦아 드린 뒤 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스승이 행하려는 일을 절실히 막고 싶었다.
그리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방해는 되고 싶지 않다니,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운기조식을 위해 단전 앞에 모은 양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 상태로는 심법을 일으켜 봤자 심마(心魔)에 들 게 뻔했으나, 동시에 스승의 앞에서 자신이 잘못될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맹목에 가까운 신뢰로 스스로를 깎아 추종하는 꼴이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도움조차 못 된 자신을 바라보는 스승의 눈이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당신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포기하는 순간에 이토록 온화하게 웃다니, 야속하기 그지없다. 서문천오는 입 밖으로 소리 내지 못할 원망만 곱씹었다. 천오의 손길을 마지막으로 눈물이 메마른 초윤은 한 점 동요도 없이 명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이들이 임독양맥을 타통(打通)하면 손쉽게 화경에 오를 수 있다 믿으나, 실상은 다르다. 몸의 정중선을 따라 임맥은 배쪽에, 독맥은 등쪽에 배치된 중요한 혈맥이며 이를 모두 뚫으려면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니 대체로 마지막까지 남겨 둘 뿐이다. 즉 타통하였기에 화경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화경에 올랐기에 타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해하였느냐.”
“……예, 이해했습니다.”
“그래. 독맥의 낙혈(絡穴)부터 임맥의 낙혈까지 읊어보거라.”
“……독맥의 낙혈은 미추 끝의 장강(長强)혈로, 양기의 우두머리로서 강성한 혈입니다. 그 위로는 요안의 요수(腰輸)혈로 기운을 수송하는 곳입니다.”
무너지고 불타오른 하오문의 곳곳에서 불티 섞인 재가 솟아올랐다. 바닥에는 자갈 대신 혈흔이 깔려 자박거렸고, 숨죽인 흐느낌이 마른 바람을 타고 귓가에 와 닿았다. 반경의 생존자들은 피아도 구분하지 못하고 뒤섞인 채 눈알 달린 장벽이 되었으며 벗어날 길 없는 무력함이 이지를 억눌렀다.
그 가운데서 초윤을 둘러싼 한 줄기 약향만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양관을 넘어 명문, 현추혈은 요추에 자리합니다. 척중부터 도도혈까지는 흉추에 모여있으며, 경추엔 삼양경과 독맥이 모이는 대추혈이 있습니다.”
약선 초윤이 끌어모으고 불러일으킨 진기가 전신을 돌아 손끝에 모였다. 그리고 사영의 화료(禾髎)혈과 사현의 사백(四白)혈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처럼 흘러 들어갔다. 초윤의 기운이 남매의 기맥을 채우며 분류(奔流)하자, 기맥을 가로막고 있던 미세한 침들이 흐르는 압력에 밀려 피부를 뚫고 바깥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얇고 가늘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 조그마한 벽옥색의 바늘이었다.
“……백회혈은 머리의 모든 양기가 모이며 백병을 주관하는 곳입니다. 후정부터 신정혈까진 매우 위험하므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 보통은 아기 때 머리뼈가 닫히며 막히는 혈이다. 하지만 너는 전부 깨끗이 열려 있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미무일식공의 소주천은 관상면의 혈도만을 맴돌지만, 대주천은 몸의 정중면까지 아우르니 그 시작이 네가 말한 장강혈이다.”
이윽고 도합 일흔두 개의 침이 남매의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장애물 없이 탁 트인 기맥에 세찬 급류가 내달렸다. 초윤은 아이들의 단련된 혈도를 따라 운기를 돕다가 물길을 조금 비틀어 꼬리뼈의 장강혈로 인도했다. 밀려드는 파도처럼 막대하며 옮겨붙는 들불처럼 강성한 기운이 척수에 자리한 불순물을 씻고 태웠다.
서문천오는 초윤이 주도하는 내력의 흐름을 온몸으로 관찰하며 습득했다. 스승의 의도가 이제야 조금씩 명확히 보였다.
약선 초윤은 무인이 화경에 오를 때 거치는 신체적 변화, 반골세수(返骨洗髓)를 제 손으로 행할 작정이었다.
그것도 두 명을 동시에.
“계속하거라.”
“……소료에서 은교(齦交)혈에 달하면 독맥의 끝이며, 그 아래 승장부터 임맥의 시작입니다. 염천과 천돌은 음유맥과 만나는 혈이고, 선기부터 거궐까지는 흉곽에 영향을 미칩니다.”
“단전에서 장강혈을 통해 타고 오르는 것과 별개로, 소주천 도중 천중에서 거골로 갈 기운을 나누어 천돌혈로 보내야 한다. 상단전의 머리, 중단전의 심장, 하단전의 기해를 채우는 기력이 모두 균등해야 하니 새 길을 트면 한 번의 운기에 그만큼 많은 공력을 운용하게 된다. 더불어 기맥은 지나는 내력이 많을수록 튼튼하고 넓어지는 법…….”
남매의 백회혈을 앞에 두고 몰두하던 초윤의 입술이 점차 혈색을 잃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고, 양팔의 상처에서 후두둑 떨어진 피가 바닥에 고였다.
오래 달여 달짝지근한 약향에 짓이긴 듯한 생풀의 냄새가 섞이기 시작했다. 해 지기 직전 어스름에도 꺼지지 않은 불꽃이 초윤의 눈동자 속에서 호박빛으로 타올랐다.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스승의 안색과 옷소매를 번갈아 살피던 천오는 속절없이 그 시선에 끌려 들어갔다. 그를 중심으로 세상이 온통 폐쇄된 것처럼 찰나에 사로잡혔다.
“사영과 사현은 내가 억지로 비집어 연 반쪽짜리 화경일 테지만.”
“…….”
“……너는 이를 스스로 해내야만 한다.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니 한눈팔지 말고 계속하거라.
스승이 전하는 바가 명백했다. 천오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푹 머리를 숙였다가, 곧 생기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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