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초윤은 천오를 붙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그리고 한 팔로 천오의 어깨를 움켜쥐어 거칠게 끌어당겼다. 자신보다 커다란 체구를 제 그림자 안에, 이 한 몸으로 지킬 수 있는 영역 안에 쑤셔 넣곤 그제야 뒤를 돌아보는 초윤의 눈에 낯선 두려움과 당황이 묻어났다.
살기(殺氣), 처음으로 체감하는 기운이었다. 책으로 읽을 때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방법이 어디 있냐며 우습게 여겼고, 무림인이 되어서는 타인의 의지로 위기감을 느낀 적이 없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목덜미에 오한이 내려앉으며 등줄기가 차게 식는 이 기분은, 피부에 살얼음이 끼며 숨통이 턱 틀어막히는 이 감각은 살기 말고는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 누군가 등 뒤에서 칼을 겨눈 기분이었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면 죽을 것 같았다.
그것도 내가 아닌 천오가 당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스승…….”
나서려는 천오를 한 손으로 가로막았다. 돌아보고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초윤의 신경은 온통 다른 이에게 쏠려 있었다.
제 뒤를 점하고도 숨소리 한 점, 고동 소리 한 톨 내지 않은 사람.
열 장가량 떨어진 곳에 뒷짐을 진 소년이 오도카니 서 있었다. 무너진 건물이나 널브러진 시신, 붉게 저무는 하늘이 무색하게도 말간 얼굴로 볼을 붉히며 웃는 인물이었다. 희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이나 파리한 피부 등 초윤의 특징을 빼다 박은 아이였으나, 아수라장 한가운데서 너저분해진 자신과는 다르게 차림새며 매무새가 깨끗하기만 한 점이 이질적이었다.
월량, 저자가 월량이다. 형님이시다. 저자가 내 아이들을 데려가 상처 입혔다. 기어코 살아 돌아오셨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직감에 섞여 시끄럽게 외쳤다. 초윤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이지를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월량은 초윤이 뒤로 물린 천오를 물끄러미 보더니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고 말했다.
“우리 막내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찾아왔구나. 애쓰지 않아도 네 사저와 사형처럼 내가 데려와 주었을 텐데, 성격 급하긴.”
뒤에 선 천오가 성실하게 대답이라도 하려는지 입술을 달싹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초윤은 가벼운 손짓으로 천오를 막은 뒤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성대를 긁고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리 돌려주실 요량이셨다면, 구태여 앗아 가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심술이다.”
냉큼 답한 월량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비죽였다. 몸은 어려도 눈빛이 닳아서 그런지, 다 큰 어른이 철없는 시절을 흉내 내며 장난스럽게 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아마도 그게 맞겠지. 그러니까…… 느닷없는 습격에 죄 없는 이들만 죽어 가고, 내 아이들은 그놈의 심술 때문에 피 흘리고, 천오는 조처하지 않으면 검을 쥘 수도 없을 정도로 다친 상황에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만한 인간인 거겠지.
분노인지, 설움인지, 자책인지, 증오인지. 새까맣게 뭉쳐선 떼어다 분간할 수도 없는 감정이 흉곽 속에서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월량은 초윤의 서슬 퍼런 시선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아랑곳 않고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내가 네 삶에서 가장 큰 조각을 차지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단다.”
“…….”
“네가 검을 쥘 때마다 내 심장의 감촉을 떠올리고, 두 눈을 뜰 때마다 숨 끊어진 내 모습을 본다면.”
“…….”
“그리하여 네가 결국 내 발치에 몸을 웅크리고 나를 불러 주기만 한다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생애를 보냈다고 말할 수 있었어.”
약선 초윤 이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이런 미친놈이 붙은 거야?
초윤은 치미는 울화도 잊어버린 채 속으로 기함했다. 월량이 나불거리는 말의 내용도 만만찮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훑는 눈알이 제일 소름 끼쳤다. 아이의 몸은 정말 껍데기에 불과하구나. 어렴풋이 주워들은 계월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타박타박 가까워진 월량이 반경 삼 장 이내로 들어온 순간 초윤은 생리적인 불쾌감을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나 버렸다. 그러자 무공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던 월량이 발돋움도 없이 단박에 거리를 좁히며 눈앞으로 닥쳐 왔다. 대응할 수 없는 속도는 아니었으나, 초윤은 그가 거북하고 꺼림칙했으며 본능적으로 두려웠다. 때리고 막고 쳐 내어 접촉할 기회를 주느니 그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뒤로 돌려 천오부터 밀쳐 낸 뒤 물러나려 했다.
“스승님께서 저어하십니다. 그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마십시오.”
팔과 허리 사이 소맷자락을 헤치고 천오의 검이 불쑥 튀어나올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천오는 검집째로 월량을 겨누고 있었다. 금속으로 마감해 뭉툭하고 묵직한 끝머리가 월량의 목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초윤의 뒤에서 반보 옆으로 비켜선 보법하며,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왔어도 제힘에 목젖이 부서졌을 한 수가 전부 부상자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웠다. 그러나 반동 없이 멈춰 선 월량은 어느새 식은 표정으로 천오의 손을 힐긋 볼 뿐이었다.
“스승과 사백의 대화에 끼어드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웠어? 아윤이 너를 예의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로 가르쳤나?”
“예의라면 당신을 보자마자 목을 베어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미 한 번 해낸 일 되풀이하는 게 무어 어렵다고 지체합니까.”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이미 알면서.”
“스승님께서 함께 계시니 이번에는 소용없지 않을 겁니다.”
“말대꾸는.”
월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초윤은 자신을 사이에 둔 채 앞뒤로 오가는 대화에 조금 아연해졌다. 천오가 이자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고 듣긴 했지만, 서로를 물어뜯는 말이 이토록 척척 들어맞는 것도 황당했다.
일단은 말릴 심산으로 돌아보려는데 천오의 손이 문득 눈에 밟혔다. 다 해진 손가락으로 얼마나 아귀차게 검병을 잡고 있는지 멎은 줄 알았던 피가 맺혀 밑으로 고이고 있었다. 초윤은 기겁을 하며 천오의 손등을 감싸 내렸다. 괜찮으니 거두어라, 흘러나온 속삭임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천오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초윤의 한마디에 즉각적으로 검을 거두었겠지만 꿋꿋이 쥐고 있는 손에서 저항이 느껴졌다. 그러나 백홍의 끄트머리는 결국 아래를 향했고, 월량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입을 다문 채 자신을 빗겨 나간 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담담하나 집요한 시선이 매끄러운 검집을 훑고 올라와 코등이에 머물렀다. 너덜너덜한 손을 지나쳐, 그 위에 덮인 흰 손등과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얼룩진 소매와 여윈 어깨를 스치고 입술을 거슬렀다. 이끌린 듯 사로잡힌 종착지는 해 질 녘의 적황색을 고스란히 비치는 초윤의 두 눈이었다.
그대로 초윤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월량이 순간 눈살을 찌푸리며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그와 거의 동시에 경종을 울린 위기감, 그리고 몰아치는 일방적인 자극은 하윤에게 생소하기 그지없는 격변이었다.
누군가가 갑작스레 목덜미를 잡고 거칠게 끌어당긴 느낌이었다. 숨이 턱 막히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게중심이 뒤로 쏠리며 휘청거린 듯했고, 뒷걸음질로 몇 발자국 물러나 버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넓은 시야는 흔들리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으며 제 몸뚱이가 서 있던 자리 역시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하윤은 초윤의 두 눈이라는 화면을 통해 흘러들어 오는 영상을 관전할 수밖에 없는 무대 아래로 나동그라졌다. 자유를 박탈당한 감각을 떠나, 오직 하윤만이 이 기이한 현상을 체감할 수 있었다. 형태 없이 도사리기만 했던 불안이 공포에 가까운 혼란을 꿰뚫고 사실로 드러났다. 하윤이 수년 전부터 외면해 온 직감은 적확했다. 약선 초윤은 사라지지도, 어딘가에 가 버리지도 않았다. 의식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쳐도 바깥에 미치는 영향은 없었다. 겁에 질린 하윤의 발악을 아는지 모르는지, 쉽게도 제 몸을 되찾은 초윤은 망설이지 않고 한쪽 팔을 휘둘렀다. 충격이 분산되도록 손바닥을 펼쳐 옆으로 가까이 있던 천오의 가슴팍을 뒤로 밀쳤다. 조절을 했다곤 하나 제자를 향해선 처음 가하는 강한 힘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아 의문 하나 토해 내지 못한 천오가 그대로 쭉 날아가선 주륜각의 대문에 틀어박혔다. 바닥으로 풀썩 떨어지며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을 토했다.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속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사영이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였다. 천오는 그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호흡이 돌아오자마자 고개를 들며 스승을 외쳤다. 나뒹구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 당황스럽다가도 야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초윤은 천오를 멀찍이 떼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월량이 보는 앞에서 다른 이에게 쉽사리 신경을 쏟을 수도 없었다.
다가오지 말거라. 냉랭한 전음 한 자락이 천오를 멈추었다. 초윤은 손짓 하나 없이 자신의 주위로 차음막을 펼쳤다. 월량은 그제야 다시금 천진하게 웃으며 안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이래야 내 아우지. 하윤의 등줄기에 저절로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설마 하윤과 초윤의 차이를 알아채기라도 했는가. 그래서 여태껏 직접적으로 나서는 일 없던 초윤이 우악스럽게 나를 밀어내고 겉으로 드러난 것인가. 아무리 초윤의 과거를 아는 유일한 인물이라 해도 이건 감이 좋다 못해 끔찍한 본능이 아닌가.
섬뜩한 관심을 익숙한 듯 고스란히 견뎌 내던 초윤은 소년의 몸을, 낯선 얼굴과 잊을 수 없는 눈빛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잔물결마저 잦아든 한밤의 호수처럼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형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또 이런 일을 벌이셨습니까.”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덮어 왔던 치부를 들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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