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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189화 (189/257)

189화

모용서가 모용단을 따라 바깥으로 나섰다. 지상으로 가볍게 착지해선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희의 명령을 받은 계월이 남궁영을 둘러업었고, 여와는 문주에게 따귀를 얻어맞고도 꿋꿋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더불어 겹겹이 쌓인 아래층에서도 소란이 들려왔다. 무공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서도 중요한 작업물을 한가득 끌어안은 채 대피했고, 무사들은 사방으로 쳐들어온 집행부를 막아섰다. 천장과 대들보에 숨어 있던 이들까지 내려와 아수라장에 끼어들었으나 비등한 대치 속 등이 터지는 건 운 없는 일반 문도들이었다.

이상하다. 백협맹이 아무리 강성하고 남궁세가가 아무리 융성한들 희가 오랜 시간 그 돈을 들여 키워 낸 무사들이 이토록 애를 먹을 리는 없는데. 의문은 떠오르자마자 해결되었다. 집행부 사이에 이질적인 낌새를 풍기며 교묘하게 섞여 있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이게 무협지에서 흔히 묘사하는 ‘꺼림칙한 마교도’인 듯했다.

피가 돌지 않아 저린 손을 쥐었다 펴며 돌아섰다. 손가락을 까딱이자 장지문이 양쪽으로 밀쳐지듯 열렸다. 대협! 뒤에서 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초윤은 그대로 방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구름 위를 노닐듯 가볍고 느긋하게만 보였다. 집무실에 가까운 상층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고, 핏자국도 하나 없었다. 그저 사람들만 홀연히 사라진 것처럼 덜 쓴 장계며 구겨진 방석에 비뚤어진 책상 따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총기 잃은 눈동자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제 발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얇은 마룻바닥 너머 가늘게 떨리는 숨이 느껴졌다. 층계 사이에 마련된 작은 공간, 그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채 두려움을 견디는 수십 명의 심장박동이 들려왔다. 위급한 상황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덧발라 둔 진법은 초윤의 눈에 어설프기만 했다.

십수 명의 무사들이 상층을 기습하기 위해 외벽을 타고 도약했다. 초윤은 허리를 숙여 나뒹구는 붓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마르지 않은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초가리를 벼루에 문질러 다시 적시고, 방석을 치워 드러난 바닥에 막힘없이 붓촉을 놀렸다. 평소 같았으면 글월 몇 줄 적어 내리는 행위에 과연 무슨 힘이 있을지 현실적인 의문을 가질 법도 했지만 당장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몸이 가리키는 대로 행할 뿐이었다.

소매를 걷은 채 한 줄을 완성하자, 지상층부터 최상층까지 사방으로 활짝 열려 있던 주륜각의 창문들이 일제히 굉음을 내며 걸어 닫혔다. 가느다란 틈새로 새빨간 노을이 핏물처럼 새어 들어 손등을 비췄다. 컴컴해진 시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윤은 그다음 줄을 완성했다. 그러자 닫힌 창문을 뚫고 들어오려던 무사들이 사지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허무하게 미끄러져선 바닥으로 추락했다. 질퍽한 파열음이 연달아 들려왔지만 신경 한 자락 뻗지 않았다. 마지막 열을 완성하는 당장의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마무리 획을 거칠게 긋자 작은 먹물 방울이 튀었다. 이윽고 모양을 갖춘 세 줄의 글이 꿈질거리며 마룻바닥 속으로 구겨지듯 사라졌다. 동시에 주륜각 내부의 공기가 거세게 뒤집히고, 위층부터 아래층을 향해 차례차례 단말마가 퍼져 나갔다. 초윤은 아무렇게나 붓을 내려놓은 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의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광천마제 초월량, 약선 초윤의 옛 인연이지만 별호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마교와 관련 있을 게 확실했다. 하지만 이제 와 초윤은 정파에 속해 있고, 초월량은 죽은 이를 되살려 냈을 정도로 마교에 중요한 인물이었다. 과거엔 막역지우였으나 뜻이 엇갈려 서로를 배신하게 된 관계 따위 무협지에 흔했다.

그렇다면 그자는 초윤을 증오해서 이런 일을 벌인 걸까.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목숨이라도 끊으라고 종용할 작정일까.

계단에 엎드린 채 꿈틀거리는 몸을 가뿐히 넘었다. 가운뎃줄에 집어넣은 글월은 부정한 방법으로 쌓아 올린 마공(魔功)을 광란하게 만드는 진법이었다. 들끓는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널브러진 마교도의 몸뚱이는 초윤이 세 걸음을 내려가기도 전에 퍽 소리를 내며 터져 버렸다. 사방으로 흩날린 살점과 핏덩이가 후두둑 떨어졌으나, 초윤은 그 끔찍한 사정권 속에서도 어디 하나 더럽혀지지 않은 채 무사히 아래층을 밟았다.

발밑에 숨죽여 몸을 감춘 채 들이닥친 재해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보고 나니 자꾸만 천오가 떠올랐다.

그 아이도 초월량이라는 자에게 잡혔을까. 도대체 얼마나 다쳤기에 계월이라는 자가 입에 발린 말 한마디를 못 했을까.

데려간 아이들을 그저 눈앞에 들이밀기만 해도 무슨 요구든 들어주었을 텐데, 그 애들이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아프게 했을까.

백협맹인 척 숨어 있던 마교도들이 하나둘씩 쓰러지자, 하오문의 무사들은 쉽사리 승기를 잡고 주륜각 안에 남은 집행부를 제압했다. 느닷없이 닫힌 창문과 연달아 벌어진 기이한 죽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할 일을 하던 모습을 보아하니 훈련이 잘된 듯했다.

초윤은 멈추지 않고 아래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가는 발이 점점 무거워졌다. 목숨이 붙어 있는 이들은 초윤이 층계참을 스치듯 내려갈 때마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주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지만 연유를 생각할 여력은 없었다.

사람의 형상을 띤 것들은 가능한 한 밟지 않도록 노력했으나 밑을 향할수록 바닥은 더러워졌다. 마공을 익힌 자들이 하나같이 몸속의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조각나 죽은 탓이었다. 희고 깨끗하던 매무새는 어느새 사치가 되었다. 옷자락의 밑단과 신발부터 피로 물들어, 지상층에 도달했을 땐 걸음마다 죽음을 쥐어짠 발자국이 찍힐 지경이었다.

모란 매듭을 허리에 달고 숨을 몰아쉬던 무사들이 계단 위의 초윤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길을 비켰다. 초윤은 그저 앞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그 사이를 가로질렀다. 굳게 닫힌 대문 위에 파리한 손을 올리자, 무게감 없이 밀려난 문 틈새로 드디어 지옥경이 드러났다.

초윤은 문지방을 넘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같잖은 감상에 빠지는 대신 저 위에서부터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입술을 벌렸다. 날숨에 불과할 공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며 풍경을 일그러트렸다. 주륜각에서 홀로 빠져나온 초윤에게 달려들던 무인들이 실 끊어지듯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 역시 안 되겠다. 초윤은 고개를 바로 하고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주륜각은 스스로 밀폐한 탓에 독을 쓰지 못했지만 바깥은 바깥대로 까다로웠다. 수년 전 녹림을 쓰러트렸을 때와는 달리, 이곳은 목표가 너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독연을 하나하나 조종하여 습격자들의 호흡기만 골라 처박아 줄 시간에 직접 뛰는 게 더욱 나을 듯했다.

효율적인 판단을 내린 초윤은 오른손으로 취우를 뽑으며 왼손은 정면을 향해 뻗었다. 저 멀리서 초윤을 향해 무턱대고 내닫던 와호단의 소대가 까딱이는 손짓 한 번에 얼굴부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누군가가 머리채를 잡고 찧기라도 한 듯 부자연스러운 죽음이었으며, 자신보다 아득히 고강한 경지를 알아보지 못한 대가였다. 초윤은 취우의 검극을 늘어트린 채 붉은 단풍길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안하거나 괴롭진 않았다. 그저 어딘가 마비된 것처럼 무감각한 기분으로 당연한 일을 할 뿐이었다.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의 무자비한 칼날 아래 웅크리는 사람을 구할 뿐이었고, 살생의 흥분으로 눈알이 번들번들한 짐승을 치워 낼 뿐이었다. 왜 아까는 이러지 못했을까. 후회스러울 정도로 쉬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왜 칼을 들었더라. 잠시 고민하면서 일으킨 실바람이 등을 보이고 도망가던 무사 셋의 목을 단번에 떨어트렸다. 저 반대편에서 정신없이 싸우는 모용서와 모용단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 형제와 희가 살아 있는 이상 무림 공적이 될 걱정은 없을 듯했다. 애초에 무림에게 쫓기는 일이 대수인가. 나는 그저 내 아이들만…… 아, 그래.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데려간 광천마제 초월량이 이 습격을 일으켰을 게 분명하단 말을 들었다. 그의 목적은 약선 초윤이니, 이 난장판에서 내가 더욱 돋보일수록 그자가 나를 찾아오기 쉬울 터였다.

이에 더불어, 무력하게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었다. 내 칼에 목숨을 잃는 인간들 또한 내 앞에선 무력했지만 그 이상으로 생각이 뻗어 나가진 않았다. 초윤은 그저 가장 가까운 분쟁으로 다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거슬리는 점이 있다면 하나, 아까부터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뿐.

역시 이상하다. 초윤은 되뇌며 왼손 바닥으로 제 귓가를 문질렀다. 언제 묻었는지 모를 피가 뺨에 혈흔을 남겼다. 비명이나 단말마나 발소리나 숨소리 등 모든 게 들렸으나 동시에 들리지 않았다. 마치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과되는 것처럼 먹먹했다. 아니, 값싼 스피커를 통해 듣는 소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 않았다. 내 곁에서 외치는 것 같지 않았다.

뭐, 어쨌든 약선 초윤의 예민한 기감은 그대로였으니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아쉬운 대로 고개를 까딱인 초윤은 발을 내디뎠다.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생생한 감각을 찾는 게 더 이상했다.

그때, 누군가 초윤의 팔을 낚아챘다.

찰나에 이뤄진 접촉이었지만 뜨거운 온기가 피부에 전해졌다. 팔뚝을 감싸 쥔 손가락에 간절한 힘이 실렸다. 진동하는 피비린내조차 일으키지 못했던 현실감이 선명한 촉각으로 와 닿으며, 한없이 부유하던 자아는 단호하게 붙잡혔다. 초윤은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그리고 그곳엔 오래전부터 오로지 초윤만을 쫓아오던 새카만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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