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사검(絲劍)은 얇은 철사나 사금파리 먹인 실, 혹은 가늠할 수 없는 재료를 가늘게 뽑아 예리하게 다듬은 무기였다. 탄성과 강도가 양립해야 하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박한 두께를 뽑아야 하니, 입문하는 도구조차 재력과 기술력이 뒷받침해 주어야만 간신히 갖출 수 있는 무공이었다.
고생해서 손에 넣은 사검을 익히기 위해선 명주실 다루는 법부터 배운 뒤 축기한 내공을 무기에 실어야 했는데, 막 단전을 채우기 시작한 사람에게 이 정도로 정밀한 제어가 가능할 리 없었다. 이에 오랜 시간과 재능을 요구하는 동시에 완벽한 공간지각능력, 치밀한 행동 유도와 전개력까지 타고나야 무기의 장점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무공이 바로 사검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림인은 이 미진한 시기를 버티지 못하고 빠져나가 버렸기에, 사검은 일찍이 사장되어 버린 분야였다. 가끔씩 실을 무기로 쓰는 이가 나타난다 해도 어린아이 손장난에 불과한 사기꾼이 대다수였으며, 현재에 이르러선 누구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술(邪術)이 바로 사검이었다.
하지만 황성의 장서관은 이미 잊히고 묻힌 수많은 무공 비급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곱고 아름다운 물건이 좋아 비단에 자수 놓는 법부터 체득한 어린 황자에게 딱 좋은 놀이터가 되어 주기도 했다.
“분에 넘치는 비단실이지요. 익히느라 손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어요. 그래도 덕분에 맹주님씩이나 되시는 분을 이리 붙잡아 둘 수 있다니 감개가 무량하네요. 아, 생각보다 가벼우신 것 같아.”
희는 명랑하게 말하며 실 끝이 이어진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사검에 휘휘친친 감긴 남궁영의 몸뚱이가 그에 맞춰 뒤틀렸다. 베인 살갗에서 흘러나온 피가 실에 고이더니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던 남궁영은 모욕감을 감추지 못하고 버둥거리며 외쳤다.
“감히, 감히 나를 속이다니!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전부 가증스러운 낭설에 불과했던 것이냐! 내공의 흔적은 분명 없건만!”
“피차 비슷한 거짓말쟁이 주제에 무얼 이제 와서 당한 척만 하시나요. 제가 일찍부터 당신을 맞이할 채비를 하지 않았다면 불쌍한 먹잇감이 되는 건 이쪽이었을 텐데.”
피에 젖어 색을 지니게 된 사검은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몸에 파고들었다. 표면에 닿기만 하면 이상한 점성으로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근육과 관절을 아프도록 조이며 살을 갈랐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점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 올리는 족족 이 실을 통해 빨려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껏해야 얇게 뽑아낸 강철에 불과하리라 생각했던 남궁영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실이…… 실이 아니야?”
“제 귀여운 해부(海鳧)가 물어다 준 거미줄이랍니다. 반사동이라도 찾아냈는지 기특하지요. 일단 맹주님의 질문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전부 무시해도 될까요? 죄송하지만 일각의 시간도 아쉬운 터라.”
성가시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한 희는 호갑투를 낀 다른 손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게 포진한 실을 더듬어 잡은 뒤 지그시 당겼다. 그러자 팽팽한 소리와 함께 남궁영의 허리가 뒤로 확 꺾이며 공중에 매달렸다. 반사적으로 신음을 흘린 남궁영은 심호흡을 하며 숨을 들이마신 뒤 몸을 크게 돌려 반동으로 벗어나려 했다. 무슨 술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공조차 느껴지지 않는 천박한 상인 나부랭이 따위 이 거미줄만 걷어 낸다면 어렵지 않게 멸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궁영의 발악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리문 이 사이로 피가 튀었다. 남궁영은 피 섞인 기침을 밭게 터트리며 눈만 굴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잘 벼린 검 끝이 허리를 관통해 제 아랫배로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분명 이 방에는 눈앞의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다른 이의 기척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이 광경은 허깨비란 뜻인가.
어깨를 짓누르는 절망을 마주할 수 없었다. 천하의 백협맹주, 안휘성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영은 무림의 모든 중역과 주인이 되어야 마땅한 자였다. 변방에 위치한 볼품없는 땅, 한낱 장사치의 집무실에서 검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배후의 습격으로 죽을 위인이 아니었다.
사검에 둘둘 말린 채 피거품을 무는 남궁영은 제 알 바가 아닌지, 희는 그의 건장한 몸체 옆으로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남궁영의 뒤에 존재감 없이 내려온 이를 눈에 담고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여와! 너무 수고했어요. 참느라 힘들었지요?”
“……힘들지 않았습니다. 문주님께선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전혀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여와가 불쑥 튀어나와서 날 지키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니까요.”
핏자국 하나 없이 해말간 낯을 확인한 여와가 그제야 안심한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궁영의 아랫배를 뚫고 나간 검을 소리 없이 거두어 갈무리했다. 절도가 느껴지는 일련의 동작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희가 말했다.
“배를 찔렀는데 정말 죽지 않는 것 맞아요?”
“어…… 글쎄요. 단장이 했으니 어떻게든 뭐…….”
“명령하신 대로 내장을 피해 정확히 단전만을 파쇄했습니다. 표적을 노리기 쉬운 자세로 잡아 주신 덕분에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게 내 덕인가요. 당신이 아주 능력 있는 내 사람이어서 그런 거지요.”
“……전 마교에서 십 년을 넘게 구르다가 왔는데, 지금…….”
“물론 당신도 정말 기특하고 대단해요. 살아서 만날 줄 몰랐다고 했던 말은 사실이니까요.”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쌓아 온 내공을 한순간의 계교와 방심으로 잃어버린 남궁영이 앞에 매달려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화였다. 일상적인 어조로 오가는 농지거리와 안부, 칭찬을 듣고 있던 남궁영이 더는 참지 못하고 투레질을 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런…… 이런 짓을 하고도 너희들이 살아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더냐? 천하고 멍청한 것들의 생각은, 하여간……. 집행부가 광동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말이, 거, 거짓으로 들리더냐? 내가 이곳에서 시체로 들려 나가면 뭇매를 맞는 쪽은 어디일 것 같더냐?”
“…….”
세 쌍의 눈동자가 입을 다물고 고요히 남궁영을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서 감도는 침묵을 긴장과 경계로 받아들인 남궁영은 있는 힘껏 코웃음을 치고 비아냥거리며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사파 놈들의 허울뿐인 주장과 정파 우두머리인 내가 직접 모은 증거 중 어떤 것이 무림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보느냐? 네놈들은, 끝났어……! 내가 네놈들을 끝장내리라 마음먹은 순간부터 끝났다고!”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인간을 속아 넘긴 게 재밌다며 그렇게나 웃어 버렸다니.”
가장 먼저 변화를 보인 이는 희였다. 희는 한숨을 푹 내쉬고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아직도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고 사람을 우습게 보는가. 뒤통수를 서늘하게 만드는 노여움에 남궁영이 불같은 고성을 내지를 찰나, 옆에서 드르륵 장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영은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병풍으로 가려져 있던 장지문을 열고 비스듬히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치, 칠성검……! 어, 어째서…… 어떻게……!”
“오랜만에 뵙습니다, 맹주님.”
밝은 모래색 머리카락, 황금빛으로 현명하게 빛나는 눈. 단정하고 반듯한 생김새와 건장한 체격을 지닌 이는 바로 모용세가의 소가주 모용단이었다.
백협맹 내부에서도 주요하게 꼽히는 구파일방 오대세가 중 최연소로 세가를 대표할 자격을 얻어 정기 회의에 참석하던 위인이다 보니 안면은 일찍이 익혀 둔 사이였다. 그러나 아랫사람으로서 맹주를 향해 깍듯한 예의를 지키던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시야를 가리는 병풍을 밀어 낸 모용단은 팔짱을 끼고 문틀에 기댄 채 불손한 눈빛으로 남궁영을 바라보았다.
남궁영은 컥컥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경황없이 말을 토해 냈다.
“부, 분명 아무것도 없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무렴, 저 같은 민간인이 손님들을 직접 만나는 방인데 이런 안전장치 하난 준비해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요? 아, 참. 남궁세가는 제갈세가와 사이가 좋지 않던가? 그럼 이런 진법을 살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셨겠어요.”
“진법……이라고?”
“그렇지만 비용은 장난 아니었어요. 저 좁은 방에 황금을 아주 치덕치덕 처바른 꼴이라니까요?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제갈 소저가 그러는 거예요. 나보고 사기당했대요. 그것도 아주 떼어먹혔다는 거 있죠. 믿겨져요? 웃돈을 주고 샀대요, 이 내가!”
요컨대 제갈세가에 의뢰를 넣어 한 사람 정도의 기척을 감춰 주는 진법을 가려 둔 방에 설치해 두었다는 소리였다. 이 사실을 끄집어낸 계기는 남궁영이었으나, 희는 금방 그를 무시하고 옆의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업신여김 당한 적도 없는 남궁영이 어찌할 줄 모르고 모멸감에 못 이겨 헐떡거리는데, 보다 못한 모용단이 한숨을 쉬며 자박자박 남궁영의 곁으로 걸어갔다. 이 안에서 적어도 모용단만큼은 아직까지 남궁영을 사람 취급하며 설명을 덧붙여 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오간 이야기는 제가 모두 들었습니다, 맹주님. 모용세가의 소가주 칠성검 모용단이 맹주님의 발언을 똑똑히 들은 증인입니다. 요녕성의 모용세가는 백협맹의 한 자루 창으로서 마교와 결탁한 세력을 절대 용납지 않으며, 무고한 이에게 마교와 결탁했다는 누명을 씌워 배반자로 몰아가는 행위 또한 절대로 관용치 않습니다.”
먼 북동쪽에 자리한 모용세가의 일원들이란 하나같이 고리타분한 청렴함과 대쪽 같은 심성을 지니고 태어난 탓에 유구하게도 암수(暗數)를 뻗치지 못해 왔다는 점이 마지막 남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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