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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179화 (179/257)

179화

“이백 년간 쌓아 놓은 그 아이 위명이 대단하더구나. 이름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이쪽의 작자들은 일찍이 ‘약선’을 쓸 요량으로 밑 작업을 하고 있었단다. 아윤도 이를 알게 되어 어느 날부턴 두문불출했던 것 같다만 십이 년 전부터 다시 눈에 띄었다 했고.”

십이 년 전. 스승님께서 막내 사제를 거둔 해이며 가장 크게 변화하신 시점이었다. 등 붙이고 잘 곳과 지어 먹을 쌀만 있으면 된다는 듯 무심하게 일관하시던 것이 무색하게도 천오가 들어온 뒤로는 모든 일을 도맡아 하셨다.

그래……. 정말 모든 일을 도맡아 하셨다. 산하에 내려가고, 생활비를 벌며, 남매와 천오의 교육까지 전부 갑작스럽게.

변화가 시작된 초반, 사영은 스승님께서 달라지신 이유가 막내 사제에게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차별적인 대우를 받을 테니 아무것도 기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오에게 공을 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들을 아끼고 보듬는 손길이 이어지자 어느 순간부턴 속절없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신뢰할 수밖에 없는 헌신이 무심한 면모에 묻어났으며 정말로 사랑받는 것 같았다.

어째서 방침을 바꾸셨는지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지만, 방금 광천마제 초월량을 되살리기 위해 남궁세가와 마교가 저지른 짓을 간접적으로나마 듣자 어렴풋이 끼워 맞출 조각이 보였다.

약선 초윤은 임 남매를 구출할 당시 광동성에 나타난 남궁세가를 보았다. 만일 그때 납치당한 아이들을 알고 계셨다면, 그 아이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내셨다면 초월량의 부활을 예상하지 않으셨을까? 그에 기반해 또 거대한 계책을 주획하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암존의 부활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내 동생은 시야를 잃었고 나는 이렇게나 무력한데,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해내길 기대하신 걸까…….

“현경에 다다랐다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작자들이 그 아이를 신중히 대하는 모습을 보니 사형으로서는 기쁘더구나. 아무튼 약점을 잡으려고 한 건지 뭔지,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 아이가 거쳐 간 인사들을 최대한 노획해 둔 상태였단다. 이건 개중 최근에 들여온 하나고.”

월량이 기절한 백호철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사영은 자신이 하오문에 들어간 시기를 떠올렸다. 스승님께선 저들이 나와 사현을 건드릴 수 없었단 사실을 아셨기에 우리를 내보내신 걸까? 도대체 왜 그때, 무슨 뜻으로…….

혼란스러운 머리에 충격적인 사실이 박히자 온갖 의심만이 부풀어 올랐다. 감정이 격해지며 숨 또한 가빠졌다. 약선 초윤은 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 여겨 왔기에 한 번 피어오른 불신을 도리어 종식시킬 수 없었다. 만약 정말 모든 게 그분의 계획대로라면, 사현이 이렇게 잡히고 내가 무공을 잃은 것부터 본인의 중대한 비밀을 쉽게 넘겨도 좋다 하신 말씀까지 이 상황을 예견하신 거라면…….

“제일 쓸모 있어 보이던 놈은 도망쳤다 하던데, 이놈으로도 충분해서 다행이지.”

-안온한 일상이 그립다면 언제든 비녀를 쥐고 돌아와도 좋다.

월량의 느긋한 말을 뒤로하고 서늘한 실바람처럼 머리를 식혀 주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더불어 개인실 한구석에 모셔 놓은 자개함을 열 때마다 느껴지던 약 향, 초윤의 행동거지마다 묻어 나오던 풀 냄새가 기억을 헤집고 튀어나왔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그 스승님께 의구심을 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정말 미치기 일보 직전이긴 한가 보구나. 사영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아직은 파고들 허점이 있었다.

“……제게는 잔인한 고신으로 이지를 잃어버린 자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외치는 헛소리로 들렸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알아내셨는지, 또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애가 영리한 건지, 교만한 건지…….”

월량이 쯧 혀를 차더니 무릎을 짚고 일어나 사영에게 다가갔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이의 꺼림칙한 기세에 짓눌린 사영이 흠칫 몸을 굳혔다. 가까워지는 만큼 거리를 벌리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지만, 등 뒤에는 사현이 있었다. 사영은 피신하는 대신 파르르 눈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었다. 체온에 달궈진 비녀는 하나도 차갑지 않았다.

저자가 정말 초월량이라면 비녀로 찌르는 정도론 어림도 없겠지. 아니, 하지만 제 몸도 아니라는데 가능하지 않을까. 확률을 몇 번이고 전복하는 사이 몇 보 앞에 멈춰 선 초월량은 뒷짐을 진 채 비딱하게 사영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사영의 입을 유심히 보는 듯했다.

“암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더냐?”

“……이백 년 전 무림에 혈겁을 불러온 자의 별호가 암존이란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암존은 계승되는 직위란다. 무림의 역사는 근 천 년을 넘어가지. 나라를 세워도 백 년을 못 가는 일이 허다한데, 하물며 질서를 유지할 기관이라고는 어설픈 맹(盟)밖에 없는 체제가 어떻게 천 년을 이룩했을까.”

“……무공을 익혀 내면을 다스리고 협의를 지키려는 이들이 끊임없이 나타났기에…….”

“아둔한 소리는 접어 두렴.”

월량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드러나는 송곳니는 소년의 치아답게 무뎌 보였지만 어째선지 긴장감이 감돌았다. 뻔한 헛다리를 짚으며 유도하려 들면 안 되겠다, 사영은 직감했다.

“어느 정도 짐작했잖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약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란다. 암존은 그중에서도 극약처방이지.”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왔던 세상의 이면을 깨닫는 일은 상당한 허탈감을 동반했다. 그러나 청자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월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사질이자 초윤의 제자라면 이 정도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듯 배려를 흉내 내었다.

“사람들은 흑백으로 명확히 나뉘는 걸 좋아해. 본인이 직접 판단하는 것보단 타인이 덧그린 그림을 맹목적으로 믿으려 하더구나. 그러니 초대의 사람들은 대놓고 ‘악한 역’을 만들어 ‘쉬이 알 수 없는 곳’에 본거지를 두게 했다. 모르는 걸 무작정 무서워하고 배척하는 무지렁이 습성과 맞물리게 하여 공적(公敵)으로 몰아가려는 속셈이었단다.”

십만대산의 마교구나. 그 무지렁이들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개념만을 주입받아 온 사영은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생각해 보니 무심서에서 지낼 때만큼은 마교에 대한 말을 들은 적이 없는 듯했다. 세간에 퍼진 인식만 두고 본다면 가장 배워 두어야 할 덕목이었을 텐데도.

“하지만 무엇이든 고이면 썩고 적응하면 살 만한 법이지. 차츰차츰 제 잇속만 챙기려는 자들이 늘어나고 위협이 일상으로 바래지면 그때야말로 암존의 차례란다. 더 큰 공포와 미지를…… 그리고 체제와 질서를 따를 이유를 만들어 주는 임무를 도맡아 수행하는 역할이니까.”

“……정복을 핑계 삼은 학살로 말입니까?”

“말로 해서 듣지 않는 것들이 칼까지 쥐었으니 무슨 방도가 통하겠어. 자기들끼리 강하다고 추켜세우는 인사들을 적당히 솎아 주면 이를 교훈 삼아 사리게 된단다.”

사영은 슬슬 스승님이 어째서 사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무뎌지지 말라고 당부하는 이는 도무지 찬동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 누에치기가 애벌레를 키우는 것보다 못한 취급을 하고 있지 않나. 공포 속에서 덜덜 떨며 자라기만을 기다리다 불어나면 죽이고, 또 불어나면 죽인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난질에 휘말려 죽은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사영이 느끼는 혐오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월량은 손뼉을 짝 마주쳐 주의를 환기시키며 밝게 말을 이었다.

“자, 이렇게 막중한 책무를 다하려면 암존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야겠지. 이에 거슬리는 문제가 많았단다. 한 사람이 계속해 이 역할을 맡는다면 분명 의심을 품는 자들이 나올 테고, 또 경지가 정체되어 있다면 점차 발전하는 무공을 압도적으로 누르지 못할 게 뻔해. 결국 암존은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얼굴을 해야 하는 동시에 계속 발전해야 했는데,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방이 무엇이었을까?”

“……매번 새로운 암존을 키워 내는 겁니까?”

“살짝 모자라. 모처럼 사백의 의무를 다하는데 조금 더 정성을 들여 대답해 보렴.”

“……타인의 몸을 그릇으로 쓰시는 것과 같이, 육신을 계속해 바꾸는 겁니까?”

“훨씬 비슷했지만 틀렸어.”

고개를 저은 월량이 한 발자국 거리를 좁혔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떨어지려는 발을 애써 누르고 있어야 했다. 역겨운 감정을 인내하는 표정까지는 차마 참지 못했는지, 사영의 낯을 낱낱이 살피는 월량의 얼굴에 희미한 비소가 어렸다.

“암존의 육신은 세상 모든 비술의 집합체란다. 소임을 마치면 그 몸은 새로운 씨앗이 되지. 그다음의 암존이 될 자는 전대의 육신에 새겨진 비술을 승계받아야 해. 그러기 위해 섭취하는 게 연신단(連神丹)이다. ……말이 단약이고, 재료는 결국 전대의 몸뚱이지만.”

……사람의 몸을 약으로 지어 먹는다고?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미는 소리였다. 섭취한 정보를 곱씹어 소화시키기도 전에 월량이 일 보의 거리를 더 좁혔다. 그리고 그대로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육신에 새겨진 비술을 이어받고, 그 몸이 죽으면 또 살점을 떼어 내어 다음 이에게 먹이고, 이를 키워 발전시킨 뒤 죽으면 다시 약으로 지어서…….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는 비사(秘事)가 지독했다. 잔뜩 긴장한 사영의 다리에 툭, 무언가가 부딪쳤다. 사현이 묶여 있는 나무 의자였다.

“내가 너한테 왜 이렇게 구구절절 긴 이야기를 했을까?”

“모릅니다. 저는 스승님께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스승님께서 구태여 입에 올리지 않으신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영의 언성이 다소 날카롭게 올라갔다. 사현의 나무 의자가 뒤로 작게 밀리며 삐걱 소리를 냈다. 순간 어떠한 발돋움이나 준비 동작 없이, 산책하듯 걸어오던 월량이 단박에 코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광대뼈 위로 혈관이 돋은 두 눈이 사영을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네 스승 또한 연신단을 먹었단다. 어쩌면 그 아이가 암존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에 비하면 아윤의 육신이 영약이라는 사실쯤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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