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고명하신 화산의 도사님들이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이런 산골 벽지까지 오셨나.
-이거 본주가 아주 관대하게 양보해 주는 거야. 너네 다 죽이고 튀면 될 것을 칼질까지 했는데도 넘어가 주겠다잖아.
그는 바로 8년 전, 사천당문으로 넘어가는 산맥에서 마주쳤던 녹림왕 백호철이었다.
우람진 풍채를 자랑하며 화산파의 제자들을 일거에 제압했던 백호철은 스승의 호흡 한 번에 쓰러져 당문으로 연행됐었다. 당시에는 그저 돌아가는 상황과 그 후 벌어진 화재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나 어느 정도 사리를 분별할 능력을 갖추고 난 뒤엔 곱씹을수록 대단한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녹림 전체를 적으로 돌릴 짓을 태연히 해 대던 사천당문, 그런 스승님을 두고 치졸한 기세 싸움을 벌이며 세가의 문제를 가시화한 당염초, 온 중원에 넓게 깔린 하오문의 정보력과 자그마한 실마리도 놓치지 않고 걸음한 하오문주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맞물려 돌아갔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방해 요소들을 쉬이 장악하여 능숙하게 계획에 이용하시던 스승님이 가장 대단하고 불가사의했다. 스승님의 행보에 서려 있던 의도를 하나하나 분석해 낸 열여덟 살의 사영은 가장 먼저 아득함을 느꼈었다. 지혜로운 분이신 줄은 알았다만 이토록 모든 수에 현묘한 뜻을 넣으실 수 있다니, 나는 언제쯤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며 뒤늦게 감탄만 삼켰다.
그 일의 시발점이 되었던 백호철이, 그날의 영광과 강인함을 모두 잃은 채 팔다리까지 껑충 잘려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사영은 인두로 지진 듯한 사지의 단면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넘겼다. 몸뚱이를 절반 가까이 잃어도 만만찮게 무거운 백호철을 가볍게 내던진 소년은 구름 위를 걷듯 휘적휘적 안에 들어왔다. 꿈틀거리는 백호철의 옆에 선 채 사영을 돌아보며 뒷짐을 졌다. 눈매를 둥글게 휘어 웃는 얼굴이 끔찍할 정도로 무구하기만 했다.
소년은 십 할의 확률로 상승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내공을 잃어버린 지금, 아직 묶여 있는 부상자를 데리고 무인들이 포진한 이곳을 달려 나가긴 불가능에 가까웠다. 판단을 내린 사영은 나가는 문을 힐끔거리는 대신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불안정한 침묵을 대수롭지 않게 깨트린 건 월량이었다. 그는 사현과 사영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밝게 말했다. 사영은 그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행동 방침을 정해야만 했다.
“만나서 반갑구나, 맏이야. 너의 사백이자 백부인 월량이란다.”
“……저희에게 사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 스승님과 긴밀한 분들은 자그마치 두 세기 전에 연세(捐世)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방어적인 존대의 이면에는 상대에게서 더욱 많은 정보를 마찰 없이 끌어내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안심하라는 뜻을 담아 사현의 팔뚝을 꽉 잡고 가능한 한 차분히 응대하는데, 손으로 전해지는 떨림이 심상찮았다.
왜 이렇게 두려워할까. 설마 저 작자가 현아의 눈을 이리 만든 걸까. 끓는 속은 심호흡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월량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래. 맞는 말이지. 나도 이만큼이나 시간이 흐른 줄은 몰랐어. 눈앞에 아직도 아윤의 우는 모습이 선연한데 이백 년이라니. 막 일어났을 때 내가 얼마나 잤는지 듣고는 아윤까지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니까.”
“…….”
“그래도 덕분에 만나게 되어 기쁘구나. 설마 내게 사질이 셋이나 생길 줄이야……. 아윤의 선물일지도 모르겠어.”
이 소년…… 아니, 이자의 정체는 차치한다 해도 미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반박귀진, 반로환동은 알아도 어린아이의 몸으로 이백 년간 고정되는 경지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무슨 말일까. 만일 이자가 정말 스승님의 사형이라면 어째서 마교와 손을 잡은 남궁세가와 함께 있는 걸까. ‘일어났다’니 무슨 말일까.
팽팽히 머리를 굴리던 사영이 퍼뜩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리고 몸서리쳤다. 이백 년 전에 벌어졌던 역사적인 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말, 그리고 월량!
사영은 더듬더듬 말했다.
“월량……이라면, 설마…… 광천마제 초월량?”
약선 초윤이 정파의 영웅들과 함께 이백 년 전 봉인했다는 암존 초월량? 거니는 걸음마다 흐르는 피가 강이 되어 흐르며, 눈 닿는 곳마다 시신이 무성했다는 암흑기를 도래한 재앙?
그런 자가, 이 광동성의 볼품없는 지하실에서 약선 초윤을 사제라고 일컬으며 나와 현아를 핍박하고 있다고?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얼굴이구나.”
월량이 키득키득 웃으며 입가를 가렸다. 당혹스러움에 표정 관리를 잊어버렸던 사영이 흠칫 놀라며 서둘러 낯을 가다듬었다. 하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늘어트리고, 여타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무복을 걸친 월량은 잠시 무언가를 궁리하듯 눈알을 한 바퀴 굴리더니 드러누운 백호철의 배를 깔고 앉았다. 백호철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리를 잡은 월량이 피를 쏟아 내고 죽은 남궁호관의 시신 쪽으로 까딱 턱짓을 하며 말했다.
“저 모자란 놈이 네게 무언가를 묻지 않았어?”
“……제 아우가 언젠가 한 번 크게 다친 적이 있는데, 그때 해를 입은 육신을 낫게 한 영약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왜 그런 걸 알고 싶어 했는지 짐작은 가?”
“…….”
무공의 수위를 높이고 싶어서 스승님을 탐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추측을 고스란히 내뱉는다면 왜 하필 현경의 약선 초윤을 건드렸는지도 짜 맞추어야 했고, 이에 들먹일 만한 이유는 스승님의 특이한 체질밖에 없었다. 괜한 말을 하느니 입을 다물어 버린 사영을 지켜보던 월량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린 뒤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흰 머리카락과 섬찟한 공기를 제외하면 저잣거리의 아이와 별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월량은 평이한 어조로 너무나도 쉽게 파란을 입에 담았다.
“내 육신을 되살리기 위해서야. 설마 이게 내 진짜 몸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럼, 아닌 겁니까?”
“내 혼을 담기에도 벅찬 그릇이 진짜일 리 없잖아.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란다. 이 지긋지긋한 인간들이 나를 살린답시고 백방을 뒤져선 얼추 맞는 아이를 찾았더구나. 하여간 민폐가 따로 없어. 나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는데, 그걸 기어코 다시 끌어내서는…….”
점차 투정으로 바뀌는 월량의 목소리가 계속해 이어졌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그릇, 혼이라고? 봉인된 광천마제의 혼을 꺼내어 새 육신에 담았다는 말인가? 그게 저 어린 소년의 몸이고…… 소년?
순간 스승님과의 첫 만남이 뇌리를 스쳤다. 장위가 사라지고, 이를 찾기 위해 객잔을 뒤지다 봉변을 당한 일이 떠올랐다. 남궁세가의 대단하신 무인들이 어째서 중원을 직접 돌아다니며 빈민가의 어린아이들을 몰래 모으고 있었을까. 자금을 위해 인신매매를 자행하고 있다 결론지었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약 그게…… 광천마제 초월량의 재림을 위한 그릇을 찾는 행위였다면?
이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초월량을 부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지?
운 좋게 장위는 구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사라진 아이들은 전부 얼마며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불길하다 못해 흉흉한 예감이 들었다. 사현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월량은 턱을 괸 손의 새끼손톱을 송곳니로 잘근잘근 씹으며 질린다는 눈을 해 보였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동생의 맥박으로 정신을 추스른 사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육신을 되살릴 영약을 찾고 계시다면, 굳이 스승님을 경유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핫, 약빠르게도 구는구나. 내가 왜 이 녹림도를 데리고 왔는지 정녕 몰라서 물어?”
심장이 납덩어리처럼 쿵, 배 속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사영이 백호철을 보고 당황한 이유는 단순히 그의 뜬금없는 등장과 처참한 상태뿐만이 아니었다.
-8년 전 사천당문에서 금제에 걸린 백호철을 살리실 때도 존체를 이용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천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이명처럼 울렸다. 사천의 어딘가에서 노역을 하고 있다던 백호철이 소년의 손에 잡혀 모습을 보였을 때부터 아니기만을 바랐던 가능성이었다. 스승님의 육신이 영약이라는 사실만은 절대 유출되어선 안 되는데. 사영은 애써 동요를 감추려 했지만, 낮고 깊은 목소리가 사영을 사정없이 찔러 들어왔다.
“말이 통한다 싶어 오냐오냐 해 주었더니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 취급하는구나. 그 아윤이 자발스럽게 싸다니며 이 인간 저 인간 살리고 다닌 일을 내가 모를 것 같아? 죽은 줄 알았을 땐 몰라도,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게 다 자드락났는데 내가 이 몸으로 만족할 것 같더냐?”
월량은 구부정히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더니 한 손을 뻗어 백호철의 머리채를 쥐어 당겼다. 나무의 속껍질처럼 탁하고 옅은 색의 두 눈동자는 사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이 쓰레기 같은 몸뚱이에서 눈을 뜬 이래로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 무엇일 것 같더냐? 가장 먼저 찾은 자는 누구일 것 같고, 가장 먼저 명한 일은 무엇일 것 같더냐?”
사정을 봐주지 않는 거친 손길에 백호철이 정신을 차렸는지 숭숭 빠진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볼품없이 쉰 목소리로 악을 쓰듯 고래고래 외쳤다. 얼마나 말하기를 종용당했는지 아예 정신에 새겨져 버린 문장을 되는대로 내뱉고 있는 듯했다.
“약선께서! 제 턱을 잡아 입을 벌리게 하였고! 그 안으로 한 모금도 되지 않는 약을 넣어 주셨습니다!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던 탓에 두 눈으로 보진 못하였으나! 양손은 비어 있으셨다고 확신합니다! 아무런 맛도 없었지만! 나무와 풀 냄새가 났, 났으며! 죄송합니다! 제대로 보지도 못한 쓸모없는 눈! 죄송합니다!”
“……잘 들었지?”
월량은 그제야 웃음을 되찾고 호철의 머리카락을 툭 놓았다. 호철은 거품 무는 소리를 내며 다시 흙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사영의 얼굴은 어느새 핏기가 빠져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네가 위험하다면 얼마든지 팔아도 좋으니 알려 준 것이다.
그러나 사영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다. 위험에 빠져도 절대 발설하지 않으려 했으며, 스승님께 인간 된 도리를 다하고자 했다.
그렇게 노력했으나…….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줄줄 새고 있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