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스승님께선…… 두망…….”
웅크린 탓인지, 스승을 배반한다는 생각에 껄끄러운 탓인지 사영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단장이라는 자가 저 단어와 비슷한 약선의 거처를 말했던 것 같은데,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건가. 턱이 긴장되도록 어금니를 악문 호관은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고 채근했다.
“똑바로 말해야 알아듣지 않겠느냐. 저버린 인륜이 이제 와서 걱정되는 것도 아니고, 잘만 돌아가던 혀는 어디에 두고 온 것이냐.”
“……심서에…….”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구나.”
결국 참지 못한 남궁호관이 등잔을 내려놓고 겅중겅중 걸어 사영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흩어진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올린 뒤 손에 든 단도를 목에 겨누었다. 사영의 독한 심성을 알았기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무기도 내공도 없는 빈민이 무얼 할 수 있겠나. 급한 마음은 경각심과 조심성을 단호하게 잘라 버렸다. 날카로운 검 날에 베인 피부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큭!”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년은 끝났어. 네 아우도, 너도 끝났다고! 눈깔 없는 네 동생과 목숨이라도 건져 나가고 싶다면 바른대로 말하거라. 네년이 아는 것을 모조리 다!”
면전에 대고 윽박을 지르자, 사영의 얼굴이 울음을 터트릴 듯 일그러졌다. 호관은 사람의 인격을 끄집어 내리며 쾌감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흐느끼며 고개를 숙이는 사영의 머리채를 천천히 풀어 주었다. 조만간 이 입술에서 원하는 답을 곧 들어 낼 수 있으리라, 어렸을 적부터 내도록 악랄한 짓만 저질러 온 사람만의 본능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남궁호관은 단검을 떨어트렸다.
쇳덩어리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손바닥과 손등의 위화감을 깨달았다. 무언가 끼인 듯, 배긴 듯 미묘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가냘프게 우는 줄만 알았던 임사영은 어느새 독 오른 뱀 같은 눈을 치뜨며 호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허하고 새까만 시선이 송곳니처럼 혀를 물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 입만 뻐끔거렸다. 매의 발톱 같은 손아귀가 손목을 움켜쥐자, 호관의 눈동자가 뒤늦게 검을 놓친 자신의 손에 가 닿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반사하는 금속성의 암기가 손바닥을 관통하고 손등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아니, 암기가 아니다…….
비녀였다. 여인네들이 머리꽂이로나 쓰는 물건, 붉은 산호도 푸른 옥석도 하나 달리지 않은 은제의 하품(下品)이었다.
정확히 호관의 수심혈을 찌른 사영은 호관의 손모가지를 붙잡은 그대로 비녀를 잡아당겼다. 무른 금속으로 빚은 장신구였으나, 사영은 약선이 빚어낸 것들의 성능을 으레 알고 있었다. 은잠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호관의 손바닥을 갈라 찢으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왔다. 겉면에 새겨진 섬세한 비늘 문양에 피가 고였다. 머리끝까지 긴장하여 좁아진 동공이 한 점 흔들림 없이 남궁호관에게 꽂혔다. 뒤늦게 핏대가 서는 목과 경직되는 근육, 추악하게 일그러지는 얼굴과 소리를 지를 듯 벌어지는 입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이어지는 비명은 없었다.
“……끄윽, 흐으…… 허윽…….”
“…….”
틀어막힌 것처럼 기이한 숨소리가 둘 사이의 작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가로로 찌른 비녀 끝에 기도를 관통당한 남궁호관이 죽어 가는 소리를 내었다. 손끝은 바들거렸고, 입에선 거품이 끓었다. 분노가 어렸던 두 눈은 점차 뒤집어지며 흰자위를 보였다.
사영은 손에 힘을 주어 다시 한번 천천히 비녀를 끌어당겼다. 절삭력과 내구성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은잠이 남궁호관의 성대와 울대뼈를 으스러뜨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멎지 않은 호관의 심장박동에 따라 피가 튀었다. 촤악, 흩뿌리는 소리는 다섯 번을 채 넘어가지 못했다.
“누, 누나……. 누나? 거, 거기 있어?”
침묵을 견디지 못한 사현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은보요를 고쳐 쥐고 쓰러지는 호관의 허파를 겨냥해 연신 찔러 넣었다. 옥예에 유중, 유근에 영허. 머리카락만큼 얇은 침으로 조심스레 취혈해도 모자랄 혈을 무작스럽게 파고들었다. 검보다 뭉툭한 비녀는 너무나도 쉽게 근육을 헤집고 내장을 뚫었다. 이윽고 바닥에 널브러진 남궁호관은 신음 하나 내지 못하고 퍼덕거리며 경련했다. 허무한 주마등과 소용없는 몸부림은 소리 없이 잦아들었다.
“…….”
첫 살인, 사영은 무감각했다. 머리의 한구석이 마비된 것 같았다. 스승이 네 몸을 지키라며 주셨으니 목적에 맞게 쓴 듯했다. 머리를 자르고 나서도 늘상 깨끗이 관리하여 품에 넣고 다녔던 비녀가 검붉은 핏방울을 떨어트렸다. 더럽혀졌으나 무뎌지지 않은 은잠 끝을 힐긋 본 사영이 어렴풋이 의문을 가졌다. 무림인에겐 젓가락 한 짝도 무기가 될 수 있단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내 암기는 다 회수해 놓고서 왜 이건 빼앗아 가지 않았을까. 그 덕분에 이번에는 인간의 도리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비녀에 묻은 혈흔을 옷에 문질러 닦으려 했으나 이미 전신이 호관의 피로 엉망이었다. 혀 찰 정신도 없이 품에 갈무리하고선 사현에게 달려갔다. 발밑에서 피 웅덩이가 찰박거렸다. 그다지 큰 자극으로 와 닿지 않았다.
“현아야.”
“누, 누나. 누나!”
“쉬잇, 쉬잇. 누나 괜찮아. 조용히 해.”
지저분한 동생의 뺨을 한 번 쓸어 주며 속삭인 뒤 황급히 구속구를 살폈다. 하릴없이 붙들고 울며 괜찮은지, 무슨 짓을 더 당한 건지, 얼마나 아픈지 물어보기 전에 들쳐 업어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먼저였다. 잃어버린 내공은 스승님께 간다면 어떻게든 되리라 믿었다. 사현의 두 손발은 의자에 못 박힌 쇠고랑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의자를 부수는 게 빠르겠다 싶어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앉는데, 사현이 입을 열었다.
“안…… 안 돼.”
“아니야, 나갈 수 있어. 내가 지금껏 배운 게 있는데.”
“안, 안 돼. 아니야. 그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이 아니라.”
귀를 자르겠다는 협박을 들었을 때보다도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불길한 낌새를 직감한 사영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사현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안구 잃은 두 눈을 마주할 용기는 아직 제대로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이 아니야……. 모, 못해. 도망…… 도망가, 누나…….”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아니라니.”
기척을 숨겨도 모자랄 판국에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낸다니 위험천만했다. 하물며 도망가라니, 나를 뭐로 보고. 사영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부들부들 요동치던 사현이 곧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동생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사영이 얼어붙었다.
“오, 온다고. 와! 사, 사백이, 사백이.”
“현아야? 현아야! 야! 그러니까 오기 전에 나가야지!”
“사백이 스승님을, 스승님이 사백을 배신해서, 우, 우리가. 누, 누나, 도망, 얼른.”
“정신 차려, 야! 우리한테 사백이 있을 리가 없잖아!”
사영이 낮게 속삭이며 사현을 얼렀다. 하지만 사현의 귀에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스승님과 누나, 그리고 도망치라는 말만을 염불 외듯 중얼거리는 동생을 보며 사영은 설핏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이 흐린 것을 보아 눈물이 아예 마른 건 아닌 듯했다.
안 되겠다. 기절을 시켜서라도 얼른 데리고 나가야겠어. 사영은 치미는 설움을 삼키고 의자의 다리로 손을 뻗었다. 구속구에 비해 그다지 튼튼해 보이지 않는데, 왜 사현이가 이것 하나 부수지 못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 사영의 머리 위에서 사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틀렸다. 왔어…….”
검푸른 절망에 푹 젖은 음성을 듣자 전신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어째 너희들은 잠시라도 눈만 떼면 일을 벌이는 것 같아. 아윤한테서 사고뭉치가 되는 법만 배운 건가?”
어렴풋한 빛에 드러난 자의 모습은 백발만 제한다면 이상할 곳 하나 없는 소년이었다. 오래전의 어느 때처럼 흰 머리카락 타래가 평화롭게 문틀에서 넘실거렸으나, 사영은 헛된 기대를 품지 않았다. 일평생 살아남기 위해 가다듬어 온 직감이 도리어 요란하게 경종을 울렸다. 민첩하게 일어난 사영이 다시금 비녀를 꺼내 쥔 채 사현과 소년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소년은 사영이 든 장신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지그시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며 이제야 호관의 시신을 발견한 척 태평히 말을 이었다.
“이런, 허튼짓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곤란하게 됐네. 이번 대의 정파는 영 멍청한가 봐.”
“…….”
“저놈이 뭐라고 했기에 우리 맏이가 이렇게 화가 났을까.”
사영은 그제야 그의 한 손에 들려 있는 두툼한 포대 자루를 발견했다. 상당한 무게를 지닌 듯 묵직하고 거대한 덩어리였다. 소년의 키는 사영의 가슴께밖에 되지 않으니 분명 바닥에 질질 끌며 여기까지 왔을 텐데, 아무런 기척도 듣지 못했다는 게 영 이상하고 찝찝했다.
아무리 무공을 잃었다 할지언정 단련된 감각기관은 그대로인데 어째서일까. 대답 없이 찡그리자, 소년은 사영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짧은 소리를 내고선 들고 있던 것을 지하실의 안으로 내던지듯 팽개치고 발을 들였다.
가죽 포대처럼 보이던 물건이 떨어지며 바닥에 육중한 진동이 울렸다. 꿈틀거리는 것에 잠시 눈길을 주던 사영이 숨을 삼켰다. 그건 포대도 물건도 아니었다. 사지가 없어 그저 꿈틀거리는, 전신에 멀쩡한 곳이라곤 누설할 입 밖에 남아 있지 않는, 그리고 사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