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벗겨내는 행위는 손쉽고 간단했다. 거친 삼베 자루 밑으로 턱과 입술이 드러났다. 갈라지고 부르텄으며 물어뜯고 씹어 엉망이 된 입술, 양 뺨에 적갈색으로 흘러내린 핏자국과 찢어진 콧잔등의 피부. 빼곡히 드리운 어둠 속에서도 모든 찰나가 기억이 되어 뇌리에 꽂혔다. 순간 결과를 직감한 사영이 저도 모르게 앓는 신음을 흘렸다. 사현의 감긴 두 눈두덩은 움푹 패어 있었다.
“현…….”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는 동생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다. 사람이 너무도 좌절하면 피가 식는다던데, 제 몸뚱이 하나 가늠할 감각조차 박탈당했는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나 그래도 아까는 울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저 아이가 나 보는 앞에서 죽어 갔을 때도 울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손바닥만 한 함에서 굴러다니는 눈알을 보았을 때도 눈물을 흘렸던 것 같은데.
불현듯 손을 들어 제 뺨과 광대 언저리의 피부를 더듬거렸다. 눈물은커녕 식은땀조차 메말라 있었다. 오열하고 울부짖는 것보다 밑바닥인 감정이 있구나. 사영은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멀거니 임사현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네 주제를 깨달은 낯짝이 되었구나. 왜 이리 되었는지 짐작이 가느냐?”
얇게라도 숨은 쉬는 듯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어깨가 보였다. 드디어 제 누나가 바로 앞까지 찾아왔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천보도 임사현, 대단하다고 추켜세워지던 후기지수 다 이기고 당당하게 우승한 사람인데. 길거리에서 훔친 음식으로 연명하고, 누나에게 배운 도둑질로 보탬이 되려다 두들겨 맞고, 죽기 직전까지 구타당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훌륭하게 자란 아인데.
그런 사람이 어째서 저런 꼴을 당해야 하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옥리에게 무도한 짓거리를 해 놓고선 멍청하게도 홀로 주절거리더구나. 제 누이가 누구고 제 스승이 누구인지 자랑이라도 하듯 말이다. 이토록 헐렁한 입을 가졌으면 귀하신 분이 묻는 말에도 재깍재깍 답할 것을, 뒤늦게 지조를 지키겠다고 조가비처럼 딱 다물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모용단이 자신을 통해 스승님의 행적을 알아냈단 사실을 듣고 하얗게 질려 있던 사현이 떠올랐다. 이에 사영은 답답함이 앞서 무작정 화를 내고 타박했지만, 스승님께선 오히려 안도하셨다. 천천히 알아 가면 된다고, 이만큼 너희를 안전하게 키운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너와 같은 피를 나눈 쥐새끼답게 독하긴 독하더구나. 생니를 뽑고 근골을 비틀어도 줄줄 울며 비명을 지를지언정 그 대답 하나를 안 하더군그래. 비루한 몸뚱이로 다 죽어 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동안 뭘 훔쳐 먹고 자란 건지 쓸데없이 단단해서는……. 나중 가선 그분도 질리셨는지 강수를 두신 게 이 꼴이다.”
수십 수백 번을 되풀이하며 자책했던 일을 떠올렸다. 사현은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어떻게 해야 자신을 속인 친구와 원만히 화해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경솔한 언행으로 스승님께 폐를 끼쳤다고 전전긍긍하고, 거구를 옹송그린 채 사영의 뒤를 따르며 순진한 아이처럼 조언을 구했다.
역시 내가 그때 문주님과 이야기하는 대신 현아를 데려다줬다면, 아니면 수상한 사람들이 주변에 돌아다니는 거 같으니 다른 곳에 나가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라는 한마디라도 해 주었다면.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타박할 생각으로 해무당에서 끌고 나오지 않았다면, 이 아이가 스승님 곁에서 안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아, 내 잘못이다. 고의든 아니든 동생에게 매몰차게 굴지 말라고 스승님께서 그렇게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내 잘못이다.
“하여간 아둔하기 그지없더구나. 이미 가장 중요한 정보를 누설한 주제에 별 시답잖은 걸 지킨다고 고집을 부렸다. 약선 초윤의 약점이나 거처를 물은 것도 아니고, 그저 너희들을 멀끔히 살려 놓은 영약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뿐인데.”
-현아 너는 기억에 없지만 스승님의 피를 마신 적이 있어.
-무림인들이 이걸 가만히 놔둘 거라고 생각해? 현경이고 뭐고 스승님 피 한 방울만 마시면 인생이 바뀐다는데? 떼거지로 눈 뒤집혀서 칼부림할 게 뻔해. 우린 지금 엄청 부담스러운 정보를 떠맡은 거라고!
변명과 도피의 여지도 없다. 내 잘못이다.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년을 내가 왜 이리 가만두고 보겠느냐. 이제는 네년에게 물을 차례기 때문이다. 네 동생이 물꼬를 튼 일이니 네가 수습해야 하지 않느냐.”
남궁호관은 비어 있는 다른 손으로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어두컴컴한 등잔불에 비친 날이 예리하고 섬뜩하게 빛나며 고개 숙인 사현의 귓바퀴 뒤쪽을 겨누었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손 치워, 더러운 새끼야!”
그와 동시에 항시 지니고 다니던 비수로 손을 뻗으며 재빠르게 내공을 끌어 올렸다. 첩보와 잠입, 암살을 주로 익힌 사영은 속도가 특기였다. 십여 년의 세월에 정체한 역겨운 인간 따위 얼마든지 조각내어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익숙한 위치에서 움켜쥔 손은 텅 비어 있었고, 단전에 가득 모아 둔 기운은 돌덩이라도 된 듯 무겁게 뭉쳐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하며 한순간 얼어붙자 사현의 왼쪽 귀가 한 치 가까이 썰리며 겁에 질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흐, 아, 아아아악!”
“현아야!”
“한 보마다!”
고통으로 정신을 차린 사현이 경악하며 전신을 뒤틀었다. 날 선 검에 연골과 살점이 헤집어지자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제한당한 무공에 의심을 품으려는 찰나 이 광경을 목도한 사영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무작정 손을 뻗어 저 손아귀에서 사현을 끄집어내려 했다. 그러나 세 발자국을 미처 떼기도 전에 튀어나온 호령이 사영을 가로막았다.
남궁호관은 단검을 든 채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 이상 움직이면 한 보마다 네 아우를 조금씩 깎아줄 테니 처신 잘하거라. 귀 다음에는 코, 코 다음에는 입술, 입술 다음에는 손 발가락과 팔다리다. 내가 이 쥐새끼의 형체를 괜히 온전하게 두었을 것 같으냐?”
“…….”
“이제야 좀 볼 만한 낯짝이 되었구나. 그래, 남궁세가를 욕보인 놈들이니 그 정도 얼굴은 해 주어야 수지에 맞지 않느냐.”
호관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질 낮은 웃음을 지었다. 혈흔이 덕지덕지 말라붙은 사현의 뺨을 새로운 피가 주룩주룩 덮었다. 볼품없이 떨리는 사현의 울음소리에 부름인지 신음인지 모를 단어가 섞여 흘러나왔다. 호관은 몰라도 사영은 들었다. 누나. 그리고 더듬어 가며 한 번 더, 누나. 가슴을 쥐어뜯고 내리치는 것으로 이 속이 해결된다면 사영은 이미 제 흉통을 부수어 떼어냈을 터였다.
그러나 사영은 목메어 울며 사현을 되돌려 달라 읍소하는 대신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추어 섰다. 목울대를 연신 움직여 치솟는 감정의 구토를 억눌러 삼켰다. 생기를 잃은 대신 광랑하는 두 눈이 미동 없이 남궁호관을 응시했다. 비어 있는 품을 까득까득 긁는 손만이 사영의 황폐화된 심정을 암시했다. 변화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호관은 계속해 비아냥거렸다.
“단전 하나 봉인되었다고 절절매는 꼬락서니라니, 네년의 같잖은 무공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는구나. 네 동생은 제자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눈알이 뽑혀도 함구했다만 너는 어떻지?”
“……궁금한 게 뭐라고?”
“안, 안 돼…….”
실성한 채 흐느끼던 사현의 입에서 사영을 말리는 말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에 반해 결정을 내린 듯 차분하게 묻는 사영을 마주하며, 남궁호관은 만면에 웃는 얼굴로 단도를 조금 거두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저급하고 폭력적인 희열이 묻어 나왔다.
“구걸하는 자세가 아니구나. 거지새끼는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고 비위를 맞추어야 마땅하지.”
“…….”
사영은 눈물로 피를 씻어 내는 사현을 힐긋 본 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지하의 음산한 냉기와 습기가 무복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윽고 흙바닥에 이마를 대자 머리 위에서 파안대소가 들려왔다. 정말로 좋은 건지, 안심하는 건지, 불안한 건지, 비웃는 건지 모를 억양으로 폭소하던 남궁호관이 단도 끝으로 사현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 위명도 아까운 버러지는 분명 옥리가 손수 다듬이질해 주었던 쥐새끼였다. 내 기억에 이놈은 그때 숨이 다 넘어가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다 낫다 못해 아주 강건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더구나.”
“…….”
“약선 초윤이 무슨 약을 쓴 것이냐? 도대체 무슨 약이 사경을 헤매는 이를 이승에 붙들고 조각난 육신을 짜 맞추는 것이냐? 그리고 얼마나 넘쳐나기에 너희 같은 도둑놈도 거두어다 먹여 키운 것이냐?”
“…….”
“나는 이를 알아야만 한다. 내가 먼저 알아내어 그분께 전해 드려야만 그분께서 옥리를 살려 주실 것이다. 그래, 그래야만 한다…….”
태연한 척 감추고 있던 조급함의 원인이 드러났다. 사영은 남궁호관이 저도 모르게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엎드린 몸을 조금 더 나약하게 웅크렸다. 어렸을 적부터 사현을 구하기 위해 등 돌렸던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사영을 믿고 의지하던 강서단의 동료들, 구하지 못했던 장위,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사영에게 인간다운 삶을 돌려주었던 스승마저 저울에 오르게 되었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오가는 대화를 들었는지 임사현이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사영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