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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75)화 (175/257)

175화

초점을 되찾은 눈에 차가운 흙바닥이 보였다. 의식을 차리게 도와준 결로(結露)와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 그리고 불을 피워 밝힌 듯 기름 냄새와 심지가 타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지하에 위치한 공간 같았다.

아무렴, 광동성 안에 감금 설비가 있는 곳이라면 모조리 뒤졌으니 여염집 지하실밖에 더 남았겠나. 사영은 냉소하면서도 감각에 의지한 분석을 계속했다. 겹쳐 들리는 소음으로 보아선 최소 3층 이상의 높고 큰 목조 건물, 움직이는 사람은 열 명 남짓. 공간의 넓이에 비해 사람이 적었다. 경비 인력조차 배치하지 않은 걸까 싶었지만, 바닥에 귀를 댄 채 조금 더 집중해 보자 새로운 이질감이 느껴졌다.

‘열 명 다 보폭이 똑같아. 불균형하게 움직이려고 노력하지만 10보 안팎으로 일정한 규칙이 생겼어.’

잘 걷는 방법, 즉 보법(步法)은 무공을 배울 때 심법보다도 먼저 익혀야 하는 기초였다. 제 몸을 효율적으로 제어하며 신체의 무게 중심을 자유자재로 옮기는 요령을 체득해야만 그다음으로 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중심이 한쪽에 쏠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반대쪽은 약점이 되기에, 항시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정확하게 걷는 법은 무림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이는 가장 기본적인 만큼, 무림인이 아닌 척을 할 때 반드시 흐트러뜨려야만 하는 소양이었다. 사영 역시 민간인 시늉을 배웠기에 알 수 있었다.

-인간은 관성적인 동물이에요. ‘척’을 하면 반드시 티가 나지요. 일종의 정형화된 양식이 생겨 버린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당신은 못마땅한 마음을 숨길 때 항상 손끝에 힘을 주고 눈을 한 번 깜빡여요. 이제 와서 안 하려고 하면 또 다른 버릇이 튀어나올걸요?

요컨대 ‘무림인이 아닌 척 체화된 보법을 숨기느라 저도 모르게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걸어 다니고 있는 무림인’ 최소 열 명이 저 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결론을 내린 사영은 떠올리기만 해도 짜증이 울컥 솟는 목소리를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손끝에 힘을 주는 버릇은 아직까지도 고치지 못했다.

‘음식과 술 냄새가 나. 객잔인가?’

객잔치고는 사람이 너무 없었지만, 거액을 내고 숙소 전체를 대절하는 일은 자칭 귀빈들에게 꽤 흔했다. 무림인보다 민간인이 많은 객잔은 함부로 수색하기도 어려웠으며, 이제껏 기감에만 의지해 사현을 찾아다녔으니 대놓고 도심에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한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인간’이 관련되어 있다면 휘하의 무림인으로 점소이나 숙수를 대체할 법도 했다.

그 인간.

사영은 이를 악물고 분을 삭였다. 남궁호관, 그 역겨운 새끼가 살아 있었다.

스승님의 독에 온갖 피를 흘리며 쓰러져선 꼴사납게 경련하던 모습이 마지막이었기에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어느 기록을 찾아보아도 그 뒤로 행적이 끊겼기에 속절없이 죽었다고만 생각했다. 남궁세가의 대공자라는 위명에 어울리지 않게 시답잖은 죽음을 맞이해서, 민간인에게 패악을 부리다가 볼품없이 목숨을 잃어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맹세컨대 약선 초윤의 독에 당하고서도 기어코 살아남았다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애써 달래 두었던 증오심이 드글드글 끓어오르며 심장을 달궜다. 동생을 죽이려 들고, 친우를 잡아가려 하고, 자신을 억누르려 하던 폭력에 속절없이 당해야만 했던 수치심이 폐를 채웠다. 계월에게서 들은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작은 도련님 얼굴을 물어뜯었거든. 이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형제가 지옥에서 기어 나온 것이었다. 사현은 남궁옥리를 만나 버린 것이었다.

사현의 심정이 어땠을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무서웠을까. 화를 냈을까. 그 순한 애가 난폭한 반응을 보이다니, 쉽사리 당하지 않았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걸까.

여기까지 생각한 사영은 붉은 주머니와 호두나무 상자를 퍼뜩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를 감춘다는 목적조차 내 버리며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차게 식은 양손으로 성급히 제 품을 더듬었다.

분명히 이곳에 챙겨 온 상자가 없었다. 쓰러질 때까지만 해도 잘 지니고 있었는데, 사라졌다.

사영은 노호를 터트리는 대신 옷깃을 부여잡고 쌕쌕 숨을 골랐다. 일어난 모든 일에 현실감이 없었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어쩌면 아직도 사실이 아니기만을 바랐기에 도피하고 있었다.

되짚어 보아도 겹겹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남궁형제는 살아 있었고, 어느새 마교와 결탁하여 광동성에 들어왔다. 동생은 그들에게 잡혀 무슨 고문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스승님께 위치를 알린다는 포부는 채 실행하기도 전에 고꾸라졌다. 그럼 이제 사현을 찾고 이곳을 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주위를 둘러싼 현실에 압박될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혼자서 잡극을 찍고 있군그래. 왜. 잘 생각해 보니 속이 타 죽을 것 같더냐?”

그에 누구냐고 되물을 만큼 아둔하진 않았다. 사영은 기민하게 자리를 박차고 뒤로 물러나며 목소리의 근원지를 직시했다. 분명 기감으로 살폈을 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생각하자마자 마교도 두 명이 각각 들고 있던 기물이 떠올랐다. 기척을 감쪽같이 감출 수 있는 방도가 존재하는 이상 경계를 늦춰선 안 되는데, 제기랄. 실수했다.

고개를 드니 예상했던 대로 창문 하나 없는 지하층이었다. 벽에 매달린 횃불 하나가 어둠을 밝혔고, 멀찍이 일렁이는 조그만 등잔이 보였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불꽃이 얇은 심지를 태우며 자황색 빛을 드리웠다. 사영은 등잔을 든 남자의 손과 팔, 어깨를 거쳐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

흘러간 세월에 비해 많이 녹슬긴 하였으나, 사영이 기억하는 남궁호관이었다.

“설마설마했더니 정말 하오문도가 되었더구나. 거짓말쟁이 쥐새끼가 딱 어울리는 시궁창을 찾았어.”

“그러는 나리께선 이제 대의를 위해 마교와 결탁도 할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끄나풀과 다르게 양잿물에 던져도 정신은 못 차리시겠군요.”

“네년 신세 하나 조지는 게 무언 대단한 대의라고.”

“매몰차게 말씀하시는 것치곤 제가 깨어나기만을 아주 학수고대하셨던 모양인데요. 몸소 기다려 주시기까지 하고 말입니다.”

빌어먹을 입담은 여전해. 호관이 상욕을 섞어 말했다. 그러나 사영은 생각보다 태연한 자신의 태도도, 이전만큼 막강하게 와 닿지 않는 남궁호관의 기세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치밀던 살심조차 금세 가라앉아 불안정한 고요를 가장했다. 사영의 신경은 새로이 눈에 들어온 다른 이에게 쏠려 있었다.

남궁호관의 옆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허름한 나무 의자의 팔걸이 위에 결박당한 손목이 보였다. 하도 득득 긁어 줄지어 파인 표면과 피 맺힌 손끝이 보였다. 가슴께에 한가득 말라붙은 혈흔과 떨어트린 고개에 뒤집어쓴 삼베 자루가 보였고, 그가 입은 무복과 눈에 익은 체형이 보였다. 역시 기물을 썼구나. 반경 안의 숨소리와 고동조차 감추는 물건이니 바로 앞에 저 아이를 두고도 몰랐다. 모름지기 저열한 인간들이란 사람의 약점을 후벼 파지 못해 안달이 나 있으니, 사영은 사현에게 집중하는 자신을 호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남궁호관은 쯧 혀를 차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사현이 앉아 있는 의자의 등받이에 비스듬히 팔을 기대며 이기죽거렸다. 사영은 손끝에 바짝 들어가는 힘을 풀며 호관만을 응시했다.

“개죽음을 모면하고 깨어나서야 알았는데, 아주 천운을 타고났더구나. 그래, 약선이라고?”

“천운은 나리께서 지니고 태어나지 않으셨습니까. 무공이 벼슬인 강호에서, 명색이 대(大)남궁세가의 자제씩이나 되시니 지금 그 자리에 서 계신 거죠.”

스승님의 발끝에 비견되기는커녕 같은 문장에 이름을 올릴 자격조차 없으면서 함부로 지껄이는 모습이 고까웠다. 네 논리에 따라 더 강한 자가 널 죽이려 한 것뿐인데, 집안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 주제에 아가리가 가볍네. 그 사건을 되풀이하듯 차분한 존대에 조롱을 담뿍 담자, 저 욕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들었는지 씨근거리던 남궁호관이 울컥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사영은 더 이상 남의 말에 끌려갈 인간이 아니었다. 세 치 혀로 사람 복장 터트리는 법이라면 십 년 가까이 배워 왔다.

“헌데 오늘은 나리의 아우분께서 보이지 않는군요. 매매꾼이나 할 더러운 일까지 함께 하시던 막역한 사이 아니십니까. 그분도 스승님께 억하심정이 가득하실 테니 분명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실 텐데.”

“옥리는…….”

“아!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며 어쩌다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부족한 아우가 방자하게도 감히 누구 낯짝을 대차게 뜯어 버렸다는데.”

아,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남궁호관의 같잖은 여유 뒤에 숨은 조급함과 분노가 물속 들여다보듯 훤히 비쳤다. 보라, 촌철살인도 아닌 말 몇 마디에 온통 휘둘려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사영은 양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눈을 휘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저자에게만큼은 등 뒤로 흐르는 초조한 식은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게 설마 나리의 옥리 도련님이셨습니까? 고운 얼굴이 험한 꼴을 당하여 유감이란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심성에 어울리는 외관이 되셨다는데 다행일 따름이죠.”

“네년이 정말 뚫린 입이라고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이 꼬락서니를 보고도 과연 계속 혀를 놀릴 수 있을까?”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낸 남궁호관이 사현의 머리에 씌워진 자루를 움켜쥐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란 것을 예상하고 유도한 사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직까지도 놓지 못했던 실낱같은 희망의 말로를 똑똑히 목도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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