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그다지.”
“하기야, 목광전엽(目光電燁)이 먹히지 않는 모양을 보니 제 목숨에 관심 없는 머저리거나 인두겁을 뒤집어쓴 금수 새끼겠구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고개를 까딱 기울인 채 어깨를 으쓱인 월량이 중얼거렸다. 천오는 손에 든 백홍과 월량을 힐긋 번갈아 보곤 조용히 확신했다. 소년은 지금 금술을 쓰고 있었다.
백호철이 금제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모습을 보고 돌아온 뒤로, 천오는 스승에게 몇 가지 상식을 더 듣게 되었다. 사람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거나 잔혹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금지된 술법을 통틀어 금술(禁術)이라고 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금제 이외에도 수많은 금술이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마교의 서고나 세가의 지하에 묻혀 있다고 했다.
그중 하나일까? 아니, 과연 하나일까? 방금 언급한 이름을 봐선, 목광전엽이라는 금술과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한 방법은 서로 다른 것일 테니 적어도 두 개 이상은 되는 듯했다.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상념을 정리한 천오는 흔들림 없이 검을 뻗어 소년의 가슴팍을 길게 베었다. 월량은 뒷짐을 진 채 뒤로 물러나며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검극을 피했다. 지나간 칼날에 옷깃조차 닿지 않았는데도 날카로운 예기가 살갗을 갈랐다. 흰 손톱 끝에서 생겨난 붓글씨의 나열이 다시금 틈을 메우고 피부를 꿰맸다. 천오는 조금 더 거칠게, 조금 더 사납게 검기를 벼렸다.
“네 나이가 열아홉이던가? 내가 잠들기 전엔 없었던 붉은 별이 하늘에 떡하니 박혀 있던데, 그게 너 때문인가?”
“모르는 일입니다.”
“아윤이 너를 거두어 교화를 시도하기라도 한 건가? 여태껏 저 스스로 해낸 거라곤 하나도 없는 주제에 무림이 피바다에 잠기는 꼴은 면하고 싶어 하다니, 어지간히도 무모한 짓을 벌였구나.”
무형의 가시가 빽빽이 돋아난 검이 월량의 복부를 찢어발겼다. 신기에 가까운 회피가 무색하게도 공세마다 치명상이 생기고 있건만, 월량은 적당히 움직일 수만 있다면 빌린 몸 따윈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너덜너덜해지는 몸은 발뒤꿈치를 떼기가 무섭게 얼기설기 수복되었고, 천오의 입가가 경련하듯 한 차례 비틀려 올라갔다.
“심저를 헤쳐 보면 천살성이 분명하건만 동공에 살심이 없으니 신기한 일이야. 이만 똑바로 서서 제대로 나를 마주 보지 않겠어? 너는 영특하다고 했으니 지금 괜한 기운을 빼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텐데.”
“생각 없습니다.”
무공이든, 금술이든, 현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모든 행동에는 그만한 값이 필요했다. 태연한 듯 보이지만 틀림없이 속에선 무언가가 소진되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몸을 복구하는 데엔 막대한 양분과 기력이 쓰이니 무용하다며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절망을 모르고 낙담에 무지한 천오는 눈앞의 광경에 쉬이 현혹되지 않았다. 입을 놀리기 어려울 정도로 사정없이 몰아치는 폭력에, 결국 먼저 두 손을 든 쪽은 월량이었다.
“알았어, 안 피할게. 나를 굽든 삶든 맘대로 해. 대신 날 죽이면 내 사질은 아마 살아 나올 길이 요원해질 거야. 하핫, 내가 이런 말을 다 하게 되다니.”
“…….”
“네 사형을 찾으러 나온 게 아닌가? 음……. 그럼 이건 어때. 아윤이 제 얘기를 잘하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
턱 근육을 가로로 베어 버리려던 검격이 우뚝 멈추었다. 천오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월량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함께했어도 내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내 속은 기가 막히게 캐면서 제 마음은 먼저 말하는 법도 없고, 난초처럼 내 곁에 뿌리 내리고 살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홀연히 바닷바람에 실려 가 버릴 것 같고. 네게는 그렇게 굴지 않았나?”
“……그다지.”
“그럼 그냥 죽이지 그래. 그 아이가 이 몸뚱이만 할 적의 이야기는 평생 나돌 일 없겠어.”
미끼랍시고 던진 이야기가 고작해야 초윤의 과거라니 자신에게만 중요한 가치를 내세운 꼴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본능과도 같은 호기심을 과신한 건지, 혹은 천오의 깊은 저변에 도사린 동질감을 무의식중에 알아차렸는지 월량의 태도는 떳떳하고 여유롭기만 했다.
그리고 천오는 제게만 단 꿀에 어쩔 수 없이 혹해 혀끝을 움츠렸다. 미심쩍고도 구미 돋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하물며 임사현을 내 사질이라 일컫지 않았나. 내가 글을 잘못 배운 게 아니라면 저건 분명 눈앞의 소년이 스승님의 사형쯤은 되어야 할 수 있는 표현일 텐데.
스승님께서 내겐 그다지 달관한 듯 대하지 않으셨다고 허세를 부리긴 했으나, 천오는 월량의 말을 이해했다. 십이 년을 보아 왔지만 그분에 대해선 하나도 알지 못한 듯하고, 내 머릿속은 쉽게도 들여다보시지만 정작 나는 그분의 대의조차 짐작할 수 없고, 매일 새벽 내려앉는 산안개처럼 영원히 그 자리에 계실 듯하다가도 해가 뜨면 증발해 사라지실 것 같았다.
천오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것이 끈질기게 돌아가자며 스승님을 보챘던 진짜 이유였다. 산속의 조그만 오두막, 눈 돌리면 그곳에 계시다며 안심할 수 있는 무심서라면 몰라도 드넓고 탁 트인 땅은 불안했다. 상대의 말마따나 바다에서 불어오는 실바람에 흩어지실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필요 없을 테니 작별이라 이르며 등을 보이실 것 같았다.
그러니 그분께 내가 약점이 될 수 있단 사실을 확인받는다면, 겸사겸사 그분의 근원을 전해 듣는다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마음이 놓이고 갈증이 해소되지 않을까.
사형을 찾기 위해 그러셨던 것처럼, 나를 위해 도심을 헤매고 가슴을 쥐어뜯으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조금은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결정했어?”
“예.”
천오가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다시 집어넣었다. 청량한 쇳소리가 울리자 월량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럼 나와 같이 가자. 네 사형의 앞에서 이제 와 아는 이 없는 옛이야기를 해 줄게. 한껏 들뜬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하고 한순간 꺾였다. 맨손이 되어 성큼 걸음을 좁힌 천오가 월량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고 으스러트렸다. 연약한 경추를 부수고 간신히 이어 붙인 근육을 뜯었다. 힘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무릎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천오는 월량이 지어 보였던 환한 웃음을 흉내 내며 말했다.
“직접 듣는 게 훨씬 나아. 스승님은 내가 여쭈면 반드시 답해 주시거든.”
생기 잃은 눈에 대고 지껄여 봤자 아무 소용없었으나, 천오의 기준에선 말이 많았던 월량을 나름 조롱한 행위였다. 천오는 금방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선 소년의 조그만 머리를 양손으로 고쳐 들었다. 겨우 잡은 실마리를 죽이는 건 역시 과했나 싶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남은 건 이 난장판을 잘 정리하고 추스른 뒤 스승님께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천오는 겪어 본 적 없는 금술을 눈앞에서 목도하고도 충분히 경계하지 못했다. 상식은 있으나 경험이 없으니 당연히도 그 이상을 예상할 수 없었다.
“이런, 아윤이 도대체 뭘 키운 거야?”
돌아올 리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시답잖은 농담이 통할 놈은 아니었구나. 내가 너를 발견했길 천만다행이다.”
다시 뜨일 리 없는 눈이 깜빡였다.
“네가 아윤에게서 떨어져 나왔기에 또 만만다행이고.”
벌어질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천오가 받쳐 들고 있던 목의 단면과 이목구비에서 검은색의 진득한 액체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천오는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으나 뺨을 타고 흘러내린 액체의 점성에 손바닥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월량의 머리와 천오의 양손, 그리고 주인 잃은 몸을 뒤덮은 검은 액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몸집을 불렸다. 이는 월량의 피부를 따라 기어오르던 글씨를 써낸 먹물 같기도 했고, 지하 깊은 곳에서 퍼낸 역청 같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역겨움에 몸서리칠 장면과 감촉이었지만 천오는 차분히 팔을 빼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내공을 운용해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고, 바닥에 떨어져 웅덩이처럼 고인 액체가 발목까지 엉겨 왔다. 이젠 쥐고 있던 머리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지를 뻑뻑하게 옭아매는 통에 집어넣었던 검으로 손을 뻗을 수조차 없었다.
“제, 젠장.”
액체는 이지를 가진 듯 차근차근 천오의 몸을 타고 올라와 뒤덮었다. 양팔을 지나 어깨와 가슴을 에워싸고, 턱선을 지나 악문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점액질과 저절로 가빠지는 숨에 난생처음 욕설이 터져 나왔다. 벼랑에 몰려 절박하게 부를 이는 하나밖에 없었다.
“스승……!”
이마저도 끝맺지 못하고, 천오가 월량의 금술에 먹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한 대낮, 도심과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골목에서 육척을 넘는 청년을 삼킨 역청 덩어리는 한참을 굼뜨게 꿈틀거렸다. 위장에 들어가서도 발악하는 먹잇감을 질식시키는 것 같기도 했고, 억지로 녹여 소화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이 각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곳을 지나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월량의 내부에 도사린 금술은 고작 두어 개가 아니었다.
보기에 메스꺼운 거품을 일으키며 부풀었던 거체는 움직임이 잠잠해진 뒤에야 천천히 가라앉았다. 주인의 몸으로 돌아가선 시신 같은 몸뚱이에 피가 되어 혈관을 돌았고, 살이 되어 손실을 메웠다. 이윽고 바닥을 뒹굴던 머리까지 슬금슬금 기어 와 제자리에 붙자, 월량은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에는 전염된 것처럼 이목구비에서 같은 액체를 흘리는 서문천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역시…… 내 것 아닌 몸을 쓰려니 너무 불편하네.”
월량이 천오의 손이 닿았던 얼굴을 팔뚝으로 슥 문질러 닦았다.
“화경까진 어찌어찌 되는데 손실이 너무 커. 정말 몸을 어떻게든 해야지, 원…….”
그리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듯 고개를 까딱인 뒤 허리 숙여 천오의 목덜미를 잡았다.
월량은 그대로 골목의 안쪽에 겅중겅중 걸어 들어갔다. 일상과 다를 바 없으나 산 것이 보이지 않는 거리는 한밤중보다도 을씨년스러웠다. 천오의 몸이 바닥에 질질 끌렸지만 소년의 발걸음은 아무런 무게도 없는 듯 이질적으로 가벼웠다.
“뭐, 그동안 정진하여 약선이 되었다는데 설마 이 형을 살릴 영약 하나 모르겠어? 조카들도 모았겠다, 차근차근 해 보자고.”
잔향처럼 남은 건 유쾌한 목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