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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70)화 (170/257)

170화

“내내 그 아이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던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이런 외진 곳이 얼마나 위험한데 겁도 없이.”

천오는 시간의 흐름이 살가죽에 생채기로 남지 않는 자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 왔다. 또한 자신이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유일한 이가 누군지도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를 아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보통 오만한 게 아니거나 제정신이 아니리라는 사실까지 막힘없이 유추했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천오는 허리에 차고 있던 백홍의 코등이를 엄지로 살짝 밀어 올리며 소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스승을 닮았다는 생각을 무심코 떠올리게 한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 타래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스승에게 빗대어선 안 될 종자였다. 단지 빛깔이 밝다는 이유로 그분의 눈동자에 견주어선 안 될 하품(下品)이었다.

“뭐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어? 표정이 심상치 않은데.”

“……천보도 임사현의 행방을 아십니까?”

“막내는 똘똘하구나. 네 이야기는 그다지 전해 듣지 못해서 궁금한 게 많아.”

지붕 위에 앉은 채 발목을 까딱거리던 소년은 곧 작은 기합과 함께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 반동으로 담장 너머 천오의 앞에 사뿐히 내려서는 움직임이 이질적으로 가벼웠다

어떠한 경계심도 없이 다가오는 걸음하며, 무공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몸뚱이하며. 사람을 많이 만나 본 적 없는 천오로선 상대방의 기만적인 행동거지에 적대감이 어려 있는지 도통 분간하기 어려웠다. 스승님을 방자하게 지칭하는 것부터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게 되었지만, 만일 이자의 목적이 자신의 추측대로 정말 약선 초윤이라면 분명 나를 그분의 약점으로 쓰려고 할 텐데. 그럼 이 소년의 인상착의만 기억하고 안전하게 도망쳐서 스승님께 알려 드리는 게 좋을까, 아님 위험을 감수하고 조금 더 말을 섞어 보는 게 좋을까.

검집을 쥔 채 조금 고민하는 찰나 자신의 손을 걷어 내던 초윤의 흰 소맷자락이 어렴풋이 뇌리를 스쳤다. 고집스럽게 이쪽을 돌아보지 않던 옆모습도, 먼 방향을 가리키며 자리를 비키라 말씀하시던 목소리도 기억났다. 스승님의 명을 어기고 바깥으로 나온 이유를 상기한 천오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돌아가기엔 알아낸 사실이 많지 않았다.

“제 스승님과 구면이십니까.”

“아주 오랜 구면이지.”

“천보도 임사현과 함께 계십니까.”

“이미 확신하고 묻는 것 같은데.”

“……목적이 뭡니까?”

“아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거든. 오랜만에 만나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 그 아이는 나를 다시 보기 싫어할 테니 아주 약간의 수작을 부리는 중이고.”

“……만남을 거부하는 상대에게 본인의 바람만을 밀어붙여 봤자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진 못할 것 같습니다만.”

심지어 사형을 해하는 방법으로 겁박을 하고 있지 않나. 초윤의 윤리관을 들으며 자란 천오는 이런 행위가 관계에 악영향만 가하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리는 없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의 소중한 존재를 인질로 삼아 보채는 상상도 가정이기에 가능했지, 실제로는 스승님께 미움을 받고 사제 관계가 파투 날까 두려워 절대 이행하지 못할 공상이었다.

그러나 천오의 말을 들은 소년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는 듯 숨 막히는 소리를 내더니, 곧 배를 쥐고 폭소를 터트렸다.

“아하하! 조, 좋은 인상! 흐하하, 하핫! 내가 아윤에게? 하하핫!”

“…….”

“둘째도 그렇고, 막내도 그렇고. 정말 산속에만 콕 박혀 살았나 보구나, 응? 무르고 약한 심성에 겁까지 많으니 제자랍시고 들인 것들이 죄다 이리 물정 모르고 천진해 빠졌지!”

역시 그 아이에겐 내가 필요하다니까. 용약한 주제에 고집은 강해서 인정하려 하진 않는다만. 월량이 중얼거리며 찔끔 배어 나온 눈물을 닦았다. 혼잣말을 들으란 듯한다기보단 눈앞의 천오를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서문천오는 소년의 난데없는 모욕을 가만히 듣다가, 무언가를 확인하듯 조용히 몇 마디를 더 물었다.

“당신이 말하는 ‘아윤’은 약선 초윤, 내 스승님을 일컫는 애칭이 맞습니까?”

“원래부터 그리 꼬치꼬치 캐묻는 성정인가? 들은 바로는 만사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다던데.”

“당신은 내 스승님과 무슨 관계입니까?”

“글쎄, 나도 아윤에게 묻고 싶구나. 이제 나는 그 아이에게 무엇인지.”

“스승님을 만나서 무얼 하고 싶은 겁니까?”

“보지 못한 시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물어야 하고, 사과해야 하는 것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아무튼 풀어야 할 회포가 많아. 그러니 이만 들여보내 주지 않으련?”

나긋하고 온화하며 어린 목소리가 천오를 달래듯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동시에 기름 막처럼 불쾌하고 괴이쩍은 아지랑이가 월량을 중심으로 퍼지며 새벽안개처럼 발목 밑에 낮게 깔렸다. 천오를 올려다보는 월량의 두 눈 주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야음 속 형형한 금수의 눈알처럼 바라본 이의 나약한 본능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상대의 정신이 마땅히 굳건하지 않다면 이지를 무너트리는 금술이었다.

하지만 월량이 마주 선 이는 다른 이도 아닌 서문천오였다.

천오는 피식자의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고, 역겨움에 비위가 상하는 느낌을 몰랐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수많은 인간적 감정이 누락된 채, 곤두선 본능이라고는 흉포함밖에 없는 폭력적인 존재. 초윤이 채워 넣고 메우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공혈들이 이제 와 천오의 해자가 되었다. 서문천오는 두려움에 얼어붙은 제물이 되는 대신 율법이 된 조건을 하나하나 따졌다.

이자의 행동은 스승님께 명백한 위협이다.

스승님과 오랜 시간 함께 해 봤자 좋을 관계가 아니리라 추정되고, 스승님께서도 이자와 친밀하게 지내실 생각은 없으신 듯하다.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애착 또한 죄악이라고 배워 왔다. 더 이상 조목조목 짚을 것도 없다. 어렵지 않다.

가느다란 일섬이 횡으로 번쩍였다. 검 뽑아 드는 소리, 옷자락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그 끝에야 뒤늦게 따라붙었다. 아직 멎지 않은 심장이 박동하자 월량의 목에서 세찬 피가 터져 나왔다. 근육과 연골이 가로로 쩍 갈라지며 속살을 내보였다. 옷깃이 시뻘겋게 젖어 들고, 흰 머리카락은 반쯤 뚝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첫 살인, 천오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턱과 뺨에 튀어 오른 피는 빠르게 식었다. 목을 감싸 쥐고 허리를 굽히는 월량을 지켜보는 새까만 눈엔 어떠한 희열도 없었다. 다만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스승님께 보여 드리기 쉽도록 머리를 떼어 가져가려고 했건만 왜 칼날이 반절밖에 들지 않았는가.

뭐, 나중에 자르면 되는 일이니 그다지 큰 고민은 아니었다. 천오는 월량의 갈비뼈 틈새로 고쳐 잡은 검을 쑥 밀어 넣었다.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운 적은 없으나 급소와 경혈은 익혔다. 제대로 노릴 필요도 없이, 인간의 몸이란 대충 허파를 찢고 복막을 터트리면 알아서 죽어 주는 연약한 포대 자루였다.

그러나 천오의 단호한 참살은 의외의 반응으로 가로막혔다. 비틀거리던 월량이 제 몸을 깊숙이 찌른 천오의 팔뚝을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피에 젖은 두 손이 말끔하던 옷자락을 축축이 적셨다. 이윽고 드러난 낯짝은 허옇게 뜬 채 난처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뭔, 애가 이렇게…….”

성대가 잘렸을 텐데 어떻게 말을 하지? 귀신보다 섬뜩한 낯짝에 두려움보다 의구심이 앞섰다. 천오는 제 팔을 붙든 작은 몸을 털어 내듯 밀쳤다. 월량은 뒷걸음질로 물러나선 골목의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사정없이 목을 베어 낸 백홍이 따라붙었지만 아무런 위기감도 없어 보였다.

천오는 예리한 검 끝을 눕혀 월량의 입술 사이에 쑤셔 넣고 위로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자신이 썰어 낸 부위를 유심히 보았다. 그러자 처음 목도하는 광경이 눈이 들어왔다.

한 사발 피를 쏟아 낸 게 언제냐는 듯 새롭게 흘러내리는 흔적은 없었다. 벌어져 있던 환부는 어느새 울퉁불퉁하게 끓어오르며 닫혀 있었고, 가슴과 턱 끝까지 마른 나뭇가지 같은 혈관이 바짝 돋아 있었다.

그리고 사지의 말단부터 기이한 먹글씨의 나열이 꿈질꿈질 타고 오르더니 목에 생긴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로로 줄지은 글자들이 잃어버린 피와 잘려 나간 살점을 대신하자 창백하던 피부에 차츰차츰 혈색이 돌았다.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입에 검을 물고도 실실 웃던 월량은 한 손을 들어 검 날을 잡았다. 연한 손바닥에 실금이 생겼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이한 전개에도 무감각한 천오는 흔들림 없이 소년의 입천장을 뚫으려 했으나, 백홍을 잡힌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막중한 무게가 느껴졌다. 천오의 무표정이 미간부터 깨져 나갔다.

월량은 검을 뱉지 않았다. 대신 붙잡은 검을 가만히 옆으로 밀었다. 예리하게 정련한 칼날이 소년의 입꼬리를 부드럽게 가르고 뺨을 쪼개었다. 백홍은 기어코 월량의 입을 찢었다.

목에 난 틈새로 들어가던 글자 몇 줄이 그대로 턱을 타고 올라와 반쪽 난 볼에 스며들었다. 얇은 엄지로 입꼬리를 몇 번 문지르자 그나마 봐 줄 만한 작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물기 시작한 뺨에 바람을 몇 번 채워 본 월량은 연이어 시험하듯 의미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사람, 천오는 오랜만에 그 뜻을 되새겼다.

의지를 가진 것처럼 기어오르는 사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월량이 웃으며 말했다. 스산한 위기감이 슬며시 엄습했다.

“아윤에 대한 질문은 그리도 캐물었으면서, 정작 너 자신에 대한 건 하나도 묻지 않는구나. 내가 널 어떻게 할지는 궁금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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