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성큼성큼 서슴없던 걸음이 하릴없이 한 바퀴를 헛돌았다. 스승님이 바라시니 완수한다, 스승님이 하고자 하시니 따른다. 간접적인 이유로 움직였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부턴 서문천오 본인이 필요하다 여겨 마음먹은 일이었다. ‘어떻게’ 할지도 막막했지만 무엇보다 낯설음이 컸다. 천오는 빠르게 혼란을 잠재우고 하오문 바깥으로 향하며 생각을 이어 갔다. 스승님도 하지 못하신 일을 일개 제자 나부랭이가 해내려면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했다. 천오의 머릿속에서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법한 조언이 하나하나 펼쳐졌다.
스승과 단둘이서 지낸 지 8년, 성장기 소년인 천오는 스승과 함께 꾸준히 하산을 했다. 하루가 다르도록 자라나는 아이에겐 옷과 쌀이 필요했고, 종이와 책이 불가결했으며, 먹과 향신료도 요긴하게 쓰였다. 초윤은 천오가 산에서 혼자 고립된 이후로 절대 아이들을 집에 홀로 둔 채 산을 떠나지 않았으니 매달 한 번씩은 스승님의 손을 잡고 도심에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장날이면 장난감 상인들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전쟁 영웅의 일대기를 들려 주며 조잡한 목검을 팔아먹거나, 비극적인 연인의 이야기를 그림자극으로 펼친 뒤 관람료를 뜯어내는 행사가 열리곤 했다. 천오는 손끝에서 불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눈짓으로 나무를 베지도 못하는 것들이 너 죽고 나 죽네 하는 이야기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 나이 또래의 애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곳이면 스승의 발걸음이 늘 미련을 지닌 것처럼 느려졌기에, 온순한 제자는 군말 없이 앉아서 소소한 문화생활을 수행했다. 그렇게 보고 들은 이야기가 세 개를 넘어가자 천오는 대중적인 이야기의 구조를 대강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남은 궁금증은 하나였다.
-왜 다들 뜻밖의 상황을 마주치면 상대방에게 목적을 묻는 겁니까? 순순히 대답해 줄 리가 없다는 사실쯤은 알 텐데요.
‘도대체 저희에게 왜 이러시는 건가요.’, ‘네 이놈들, 무슨 속셈이냐!’ 어디에서든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었다. 물론 매번 돌아오는 말은 속을 벅벅 긁는 빈정거림뿐이었지만, 온갖 가상의 인물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계속해 상대방의 의도를 물었다. 마주 보고 대치한 채 의미 없는 입씨름이나 하는 것보단 악의를 확인하자마자 그냥 죽여서 끝내는 게 간단하지 않나. 스승을 제외한 이들의 속내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서문천오로서는 매번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이에 천오의 스승은 면사 너머로 현명한 눈을 지그시 깜빡이더니 말했다.
-……어느 정도는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흔해진 관례기도 하지만, 모든 관행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목적을 묻는 건 상대방의 도달점을 알기 위해서다.
-그것이 중요합니까?
-단적으로는 두 가지 면에서 가치가 있다. 하나, 당한 자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막중한 피해를 입으면 분통이 터지지 않겠느냐. 너 또한 이전에…… 아니, 됐다. 잊거라.
-해를 입었다면 울화를 푸는 것보다 되갚아 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습니까?
-둘, 더욱 철저하게 되갚을 방도를 찾을 수 있다.
-…….
늘 무슨 피해를 입든 무관심하게 돌아설 것만 같았던 스승이 자발적으로 복수라는 말을 하자, 천오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초윤을 올려다보았다. 스승의 생경한 면모를 알아 갈 때마다 집중하게 되는 이유가 그저 치기 어린 호기심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상대방이 제 목숨보다 목적에 큰 가치를 두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상대를 죽인다 한들 그의 목적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상대를 죽이는 것조차 그자의 의도일 수 있다.
-……막고 없애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겁니까.
-그래. 반대로 상대방의 의중을 안다면 행동 방침을 정하기가 쉽겠지. 그 대단한 취지를 꺾어 더한 절망감을 안겨 줄 수도 있고, 어쩌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간파해서 중간에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승님처럼 무욕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선 감정을 철저히 제외하고 효율적인 판단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상 무욕은 불가능하다.
초윤은 단호하게 말하며 아직 어리던 천오를 품에 안아 올렸다. 등에 멘 대나무 바구니에 장을 본 물건들이 한가득 차고 넘쳤지만 조금의 무게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천오는 그 당시 붐비던 인파와 초윤의 목소리, 그리고 끌어안은 어깨의 감촉을 생생히 기억했다.
-뿌리 뻗는 식물마저도 한 방울의 물을 탐내는데 사람에게서 욕심을 제거할 수 있겠느냐. 효율은 최선과 같은 말이 아니다. 무엇이든 과해지지 않도록 적당한 선을 지킨다면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어렵고 복잡합니다. 꼭 다른 사람의 뜻을 파악해야만 합니까? 저는 스승님 말고는 궁금하다 여겨지는 사람이 딱히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껏 나를 궁금해하거라. 내 결정에 의문을 품고, 내 속내를 파악하려 들거라. 그러는 도중 방도만 체득하여도 족하다.
하기야 스승님의 머릿속을 헤아릴 정도라면 상대가 누가 됐든 사람 속을 몰라 애태울 일은 없을 듯했다. 천오는 공손히 알았다 대답하고, 초윤의 목을 꽉 안은 채 바글거리는 시장통을 빠져나왔다. 몸이 자라고, 더 이상 인파 사이에서 잃어버릴 일이 없게 되기 전까진 그런 식으로 종종 스승님의 품에 안겨 다녔다. 초윤의 뒤를 쫓아 정신없이 성장하며 잃어버린 기회 중 하나였다.
스스로의 혼란을 쉽게 잠재웠던 아까와는 달리, 불쑥 치민 그리움을 벗어나는 데엔 비교적 긴 시간이 걸렸다. 천오는 하오문의 문턱을 넘으며 사현의 신변을 확보한 사람들의 목적을 추론하기 위해 애썼다. 스승님께선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내게 말씀해 주시진 않으셨으니 알아서 생각해 내야겠지. 맹신은 그대로였지만 처음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면에선 괄목할 성장이었다.
천오는 가장 먼저 사라진 사람의 신분에 집중했다. 사영과 초윤이 애정에 휩쓸려 사현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지 못할 때 누구보다도 냉랭하고 정확한 평가를 내렸다.
사현은 위험을 감수하고 일에 끌어들일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무공은 딱 성가실 정도로만 출중했고, 비밀을 알기엔 친우에게도 뒤통수를 맞는 성정이었으며, 스승님처럼 육체적으로 아주 특이한 특징을 지니지도 않았다. 하오문에 그만한 실력을 가진 문도는 많지 않았지만 없지도 않았으며, 이곳에 소속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북방에서 지냈으니 사라져 봤자 영향을 받을 사람은 사저와 스승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사저가 목적일까. 천오는 대로변을 따라 걸으며 곰곰이 되짚었다. 사저는 하오문주의 측근인 듯했으니 충분히 접근하고도 남을 법했다. 사저 본인에게는 어떠한 고문도 먹히지 않겠지만, 이제껏 봐 온 둘의 유대관계로 짐작하자면 사형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최근까지만 봐도 정신없이 사현만 찾으러 다니지 않았나.
그리고 사저를 노린 일이라면 하오문 전체가, 어쩌면 그 황자라는 희가 목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오는 고개를 슬며시 기울이며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늘 나무 향 가득한 숲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기름에 튀긴 주전부리 냄새부터 온갖 사람의 인기척이 들끓는 도심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사저와 하오문주가 도달점일까? 천오는 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자에게 별달리 큰 관심은 없었지만, 그가 고작 측근의 밀고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사람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항상 곁에 붙어 있는 호위무사라면 모를까, 부하직원에 불과한 사영에게 자신이 위험할 정도의 기밀을 맡길 이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그 남궁 형제? 아니, 스승님을 만나 뵙기 위해 거리낌 없이 사형을 속인 자들이었다. 어쩌면 정말 사형이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연루되어 있나? 아니, 스승님의 정보도 하나 단속하지 못한 면을 봐선 홀로 비밀을 간직할 성정의 인물은 도무지 아니었다.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사현의 실종에 영향을 받을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사현의 유일한 혈육인 사영이나, 아니면 사형에게 꾸준히 애틋한 정을 쏟아 키워 주신 스승님 말고는…….
……스승님?
스승님께 영향을 미칠 사람을 콕 집어 빼돌리고, 이로 인해 쉽게도 스승님을 불안에 빠트리고, 스승님의 눈을 피해 오랫동안 숨을 저력을 갖추었다.
처음부터 약선 초윤이 목적이었다고 상정한다면 모든 의문이 단숨에 명쾌히 풀렸다. 애초에 초윤 하나만이 목표이자 도달점이었던 천오였기에 끌어낼 수 있었던 결론이었다. 무엇을 보든 그 안에서 초윤을 찾아낼 정도로 모든 사고가 스승을 향해 있었기에 가능한 추론이었다.
누군가 스승을 노리고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불쾌해진 천오는 그믐밤 어스름 같은 존재감을 희미하게 흩뿌리며 더욱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고찰이 연이었다. 어떻게 약선 초윤이 광동성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까. 배후에 도사린 인물 또한 사현을 잡은 뒤에 듣게 된 정보지만 천오는 이를 알 리 없었다. 어째서 약선을 노리고 있는가. 스승님의 과거와 연관된 이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니 이 또한 넘어가야 할 항목이었다.
목적을 끼워 맞춘 것까진 좋았지만 이후로 영 풀리는 게 없어 답답하게 느껴질 찰나, 스승의 조언이 다시 한번 귓가에 울렸다.
-어쩌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간파해서 중간에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약선 초윤이 목표라면, 이제부터 그들이 달릴 과정은 무엇일까.
나라면…….
만일 내가 스승님께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있는데, 그분께서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 같다면. 그 어떤 좋고 예쁜 것을 갖다 바쳐도 요원할 것 같다면.
“스승님이…… 거절하실 수 없도록 하겠지.”
아마도 그분께 소중한 것들을 차곡차곡 양손에 쥐겠지.
부서트릴 듯 힘을 주며 애처럼 떼를 쓰겠지.
그것에 연연하실 분이 아니지만, 그리고 나 또한 끝내 그분을 상처 입힐 수 없을 테지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스승님께서 이성을 잃고 지키려 하실 대상이 있다면.
예를 들어 사형과, 사저와, 나처럼.
-그런데 그분과 속세를 연결하는 접점이 생겨 버렸어. 사천당문에 가게 되신 이유, 절강성을 찾아가신 이유, 하오문까지 긴 여행을 하게 되신 이유가 전부 뭐야. 우리 때문이잖아.
천오는 하오문이 자리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래 걷지 않았으니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지만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 담장 너머 단층집의 기왓장 위에 다리를 늘어트리고 앉아 천오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네가 막내구나.”
스승님처럼 흰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공교롭게도 아이는 높게 솟은 하오문의 형상을 그 몸으로 정확히 가로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