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천오는 뿌리쳐진 그대로 얼어붙었다. 온기를 잃은 제 손만 그러쥔 채 멍하니 스승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린 초윤의 얼굴은 시리게 차가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냉갈령한 목소리가 선고처럼 떨어졌다.
“모든 비난의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리던 도중 갑자기 나타난 이가 생채기를 내면 어찌 될 것 같더냐. 네 것이 아닌 미움만 잔뜩 떠맡기 십상이다.”
“그런…… 제 경솔한 언동이 스승님께 해를 입힌 겁니까? 저, 저를 미워하게 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발언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제가 부족하고 망솔하여…….”
“그만.”
잔뜩 겁을 집어먹고 당황한 채 횡설수설 잘못을 빌던 천오의 입이 반사적으로 닫혔다. 발화를 허락받지 못했으니 신음 소리도 하나 내지 못하고 하염없이 스승의 안색만 살펴보는 모습이 주눅 든 짐승과 비슷했다. 제자의 사죄를 단칼에 가로막은 초윤은 그대로 잠시 멈춰 있다가, 곧 미약한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천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금방 주먹을 쥐고 거두어 버렸다.
“앞으로 조심하면 될 일이니 미워하지 않는다. 이만 나가 있거라.”
“수색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사형의 소식을 찾기 전까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용서를…….”
“이만하면 되었으니 나가 있으라 하였다.”
“…….”
천오는 스승의 이런 음성을 난생처음 들어보았다. 얼어붙은 동굴의 바닥을 맨손으로 긁는 것처럼 낮게 쓸리는, 누가 보아도 올라가려던 언성을 억지로 잡아 붙든 어조. 서리 낀 축객령을 듣지 않은 게 다행인지, 아니면 비수처럼 꽂힌 냉한 명령이 상처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에 천오는 얌전히 일어나서 무언의 인사를 남기고 단정하게 돌아 나왔다. 설레고 벅차는 마음으로 들어섰던 문을 닫고 나니 가슴이 통째로 도려져 나간 듯 허했다.
그렇게나 중요한가?
그렇게나 애틋한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았다. 서문천오에게 임사현은, 아니 임사현과 임사영은, 그러니까 스승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리 큰 무게를 지니지 못했다. 그들이 천오와 얼마나 긴 시간을 함께 보냈건 상관없었다. 제 길을 찾아 떠났다면 떠난 것이고, 일신의 힘이 부족해 죽었다면 죽은 것이었다. 천오가 능동적으로 그들을 돕거나 찾을 필요는 없었다.
천오의 짧은 인생에서 이토록 능동적이고 간절하게 뒤쫓고 매달려야만 하는 사람은 오로지 스승뿐이었다. 약선 초윤만이 천오를 되살렸고, 살게 했고, 완성했다. 자신의 곁에 그가 온전히 있어야만 천오는 스스로의 실존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오는 은연중에 스승 또한 자신과 같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리춤에 닿지도 않는 아이일 때부터 장성한 지금까지 함께 있었고, 그의 지식과 지혜를 오롯하게 물려받았으며, 그의 가장 우수한 제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일 테니까. 나는 내 의무에 불과한 복수를 마친다면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올 거니까. 나는 권력과 야망보다, 명예와 혈족보다, 무력과 인정보다 내 스승님의 곁에 머무는 게 더욱 중요하니까.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에.
내가 스승님을 중하게 여기는 것만큼, 스승님이 나를 중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함께한 십여 년이 내게는 생애 대부분이지만, 스승님에겐 긴 세월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 중 하나라면.
어떻게 하지?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도 아니었다. 그저 막막한 무력감에 눈앞이 깜깜했다. 발붙이고 서 있는 땅이 어딘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마음의 차이’, 이를 인지하고 수용하기엔 서문천오의 추앙이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다. 비슷한 감정을 돌려받길 바라는 심정은 광신도의 맹목과도 다르단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어떻게 하지, 같은 의문이 다시 한번 천오의 머릿속을 꽉 메웠다. 천오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무작정 걸음을 떼었다. 성큼성큼 내원을 가로질러 닫아 둔 대문으로 향했다. 파릇하게 돋아나던 풀잎들이 무작스러운 발밑에 짓밟혔다. 평소라면 스승의 고뇌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여쭈었을 테지만, 빌어먹을. 천오는 이미 경망스러운 말로 초윤에게 미움을 받을 뻔했다. 그 생각만 하면 뇌와 심장이 헤매는 와중에도 덜컥 두려움부터 엄습했다.
정말 어떻게 하지. 똑같은 물음만을 거듭하던 천오는 대문의 커다란 빗장을 손끝으로 치워 열고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동시에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슥슥 지우고 새로운 의제를 제기했다.
무엇을 하지?
당장 스승님의 고심을 덜고, 자신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신경을 잡아채 끌어오며, 다시금 용서를 빌고 답을 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지?
이번에는 판단을 내리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원인인 임사현을 찾으면 끝날 일이었다. 본인을 잡아 오는 게 불가능하다면 행적이나, 혹은 시신이라도.
어쩌면 시신이 나을 수도 있겠다. 자취에 불과하다면 이를 쫓느라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될 테지만, 사체라면 이미 모든 게 끝나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아닌가.
아직 사망이 확실히 확인되지도 않은 제 사형제를 두고 스승님의 복수 여부를 따져 보던 천오는 문득 멈춰 선 채 시선을 들어 정면을 보았다.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잡다한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지만 다가오는 기척 하나 알아차리지 못할 아둔패기는 아니었다. 새까만 눈을 물끄러미 고정하자 보이는 건 낯익은 인물들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서문 소협. 약선 대협께선 해무당 안에 계십니까.”
“…….”
조금 피곤해 보여도 단정한 행색의 모용단이 먼저 포권을 취하고 고개를 숙였다. 흉흉하고 예민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제 형과 나란히 걸어오던 모용서는 천오를 보곤 별다른 인사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곁에 초윤도 없고, 속에 정신머리도 없는 천오는 불청객들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 초윤이 골머리를 썩인 게 무색할 정도로 사현의 실종은 모든 갈등을 애매하게 덮어 버렸다. 특히 꼬박 이틀에 걸쳐 형제 두 명과 입씨름을 벌인 ‘모용서와 천오의 만남’ 또한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풀려 버렸다.
성정이 기민한 모용서는 사영이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동생의 행적을 묻고 다닐 때부터 이변을 감지했다. 이에 강서단을 동원해 도시를 수색하는 사영을 찾아 사건의 경위를 물었다. 모용의 힘을 빌린다면 좀 더 빨리 사현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영은 즉각 도움을 청했고, 모용서 또한 그날부터 추적을 거들게 되었다.
늘 놀려 먹고 속이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마음을 내어 준 친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 소식은 모용서를 황폐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약선 초윤에 이어 회귀의 기억이 일말의 보탬도 되지 않는 일을 연달아 두 번이나 만났으니 정신력 또한 점차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사형을 찾던 천오를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된 모용서는 의외로 과거의 원수를 묵묵히 외면하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서문천오는 처음부터 모용서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니 그가 자신을 보고 어떻게 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사람은 이전에도 무작정 해무당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으니, 여기서 대답을 하지 않고 무시하면 스승님이 계신 곳에 멋대로 들어가지 않을까. 꽤 긴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천오는 천천히 대답했다.
“안에 계시지만 방문은 거절하실 겁니다. 따로 전달해 드려야 하는 소식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 그다지 진척된 사항은 없습니다. 투입된 인력에 비해 과할 정도로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대협께 임 소협의 종적을 찾을 방도가 따로 있어 해무당에 칩거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진위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스승님의 용의를 속속들이 파악하기엔 미력한 몸입니다. 다만 지난 나흘간 스승님께선 기감을 펼치는 데에만 집중하셨고, 성과는 따로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실패를 암시하는 말을 들은 것치곤 모용단의 대답이 그리 어둡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모용단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 턱을 매만지더니 곁에 서 있던 모용서를 바라보았다.
“이 도시 안에서 약선 대협만큼 기에 민감하신 분도 아니 계실 텐데, 이렇게까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면 정말 서제의 예상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여기서 한참은 먼 곳에 엄중하게 모셔져 있습니다, 형님. 임 형이 죽었을 가능성이 더 크겠죠. 역시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부터 알아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반드시 최악부터 가정할 필요는 없듯이, 실마리도 순서가 정해져 있진 않습니다. 접근 방식을 다르게 하면 오히려 길이 보일 수 있습니다.”
‘사형을 찾는다.’는 단기적 목표를 정한 천오는 비교적 주의 깊게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본인들만의 대화를 나누던 형제는 곧 천오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서문 소협. 약선 대협께 알현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기물이 약왕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현 말입니까?”
방문은 거절하실 것이라 했는데, 나조차도 내침을 당했는데 전언을 넘어 기어코 만나 뵙겠다고? 천오의 눈가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