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누구 기다리니?
아이를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유해지는 목소리는 스승에게 물려받은 배려였다. 냉담한 표정과 고저 없는 어조와는 별개로, 스승의 손끝에서 묻어나던 애정은 사현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소년은 사현을 올려다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네, 형.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요.
-여기서 보기로 했어?
-아뇨, 다른 곳인데 어딘지 모르겠어요.
-어딘데?
길을 잃었나. 그런 것치곤 침착해 보이는데. 어딘가 미묘한 태도였지만 사현은 아이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사현에게 사교성 짙은 미소를 짓던 소년은 이곳과 정반대에 있는 장소의 이름을 말하고 물었다.
-어떻게 가는지 아세요?
-응, 반대쪽으로 왔구나. 좀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해.
사현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제안은 초윤의 제자라면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잘 모르겠으면 데려다줄까?
-그래도 될까요? 감사해요.
-잠깐만.
이런, 어른이 어디 같이 가자고 하는 말을 쉽게 믿으면 안 되는데. 데려다주면서 얘기해 줘야겠다. 어렸을 때부터 스승의 당부를 누누이 들어 온 사현은 속으로 탄식하며 품에 든 주전부리를 고쳐 안았다. 불쑥 튀어나온 꼬치를 하나 꺼내 소년의 손에 쥐여 주기도 했다.
도시의 외곽을 향하는 갑작스러운 동행은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었다. 역시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도 소년의 튀는 외관을 눈여겨보지 않았고, 사현만이 옆에 선 아이를 연신 힐끔거렸다. 소년은 사현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간식에만 집중하다 대뜸 고개를 돌렸다. 별다를 것 없는 일반적인 행동이었지만, 연한 갈색의 눈을 마주하자 괜히 허점을 찔린 기분이 들었다.
조금 당황한 사현이 어떻게 말을 꺼내나 헤매고 있을 때 소년이 말했다.
-왜요?
-어, 어? 아니…… 닮아서.
당황 끝에 나온 말은 사현의 본심을 고스란히 대변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하얀 머리카락에 끌렸지만 점점 기이해졌다. 스승은 주위에 녹아들 듯 동화되어 존재감이 흐렸지만, 이 소년은 정말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듯했다. 스승의 눈은 햇빛 아래서 투명하게 비치는 호박 같았지만, 이 소년의 눈동자는 나무의 속껍질처럼 탁하고 얇은 막과 같았다.
보면 볼수록 닮은 듯 닮지 않았고, 그러다가도 스승이 아니라면 찾아 볼 수 없는 면모가 튀어나왔다. 사현은 술렁이는 심정과 떨리는 손끝을 그저 신기한 마음 때문이라고 여기며 어설프게 웃었다. 소년 또한 사현을 따라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누굴요?
-음…… 아는 사람.
그렇구나, 소년은 가볍게 대답하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사현은 어딘가 안심한 기분으로 아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낭랑한 목소리가 인파에 묻히지도 않고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든 건 그 순간이었다.
-저도 형이랑 닮은 사람을 알아요.
-그래? 뭘 닮았는데?
-냄새요.
냄새? 사현은 고개를 돌려 제 어깨에 대고 킁킁거렸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이 소리 높여 웃으며 광택 없는 눈을 숨겼다.
-이상한 냄새는 아니고요. 숲에 들어가면 맡을 수 있는 거 있잖아요.
-숲?
-네. 안개 낀 새벽에 나는 물 냄새 같기도 하고, 커다란 나무들 틈의 차가운 흙냄새 같기도 하고, 막 꺾은 나뭇가지의 덜 마른 냄새 같기도 하고, 짓이긴 이파리의 녹음 냄새 같기도 하고.
소년의 말이 이어질수록 사현의 안색이 이상하게 변해 갔다. 아이가 나열하는 건 전부, 모조리, 자신의 스승인 약선 초윤의 체향을 표현할 때 쓰던 말이었다. 그리고 사현은 십 년 가까이 타지 생활을 하며 단 한 번도 스승과 같은 향이 난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없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지만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사현의 곁을 걸었다. 아이의 몸에선 여전히 단련한 내공 한 자락 느껴지지 않았고, 사현은 조금씩 혼란스러워졌다.
소년은 향에 관한 묘사를 계속해서 즐겁게 토해 냈다. 다만, 내용은 점점 괴상해졌다.
-내 아우가 답 없는 호기심으로 무작정 뜯어 먹었던 독초의 냄새 같기도 하고, 오랫동안 함께 살자 약조하며 살 깊숙이 배게 했던 영약의 냄새 같기도 하고, 그 아이를 위해 바닥이 흥건해지도록 채웠던 피의 냄새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건 숲에서 맡을 수 없잖아.
참다못한 사현이 입을 연 찰나, 소년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사현은 고개를 돌리고 그와 두 눈을 마주쳤다. 이쪽을 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동공을 통해 뇌를 헤집기라도 할 것처럼 뚜렷한 물리력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사현은 못 박힌 듯 소년을 보고 굳었다.
밝다고만 생각했던 아이의 피부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눈을 중심으로 꿈틀거리는 혈관의 괴기스러운 모습과는 다르게 입술은 아직까지도 환히 웃고 있었다. 사술(邪術)이다, 직감한 사현은 몸을 속박하던 경직을 깨부수고 재빨리 허리춤의 도를 움켜쥐었다. 소년의 무방비한 몸을 겨누어 도검을 잡아 뽑았다. 한쪽으로 선 날이 얇은 옷과 여린 살을 베어 가르리라 의심치 않았다.
고심 끝에 챙겨 담았던 군음식이 발치를 뒹굴었다. 통행인들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흙투성이가 된 간식거리를 거리낌 없이 밟으며 지나갔다.
사현은 이상할 것 없는 거리 한가운데에서 발도한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길들인 도검은 그의 옷깃까지 반 치가 남은 거리에서 멈췄고,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밖에 없었다.
그는 사현을 향해 한 걸음 걸어 들어왔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 턱에 고였다. 소년은 사현의 턱을 틀어쥐고 음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네 단전에서 아윤의 냄새가 나는 거지?
그리고 사현의 아랫배를 잡아 뜯기라도 할 것처럼 맨손을 뻗었다.
세상이 느리게 흘렀다. 사현은 이다음 순간 자신이 산 채로 내장을 뜯겨 죽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그저 작고 여린 손이 다가올 뿐인데도 비할 바 없는 살심이 느껴졌다. 이 소년은, 아니, 이자는 자신의 가죽을 찢고 단전을 꺼내 목표했던 ‘냄새’를 알아낼 것이다. 절망적인 확신이 선고처럼 내렸다.
그 찰나를 파고든 타인의 음성은 사현에게 구원이자 또 다른 절망이 되었다.
-존제?
어딘가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목소리였다.
사현은 유일하게 제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시선을 들어 불청객에게 던졌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청년은 옅은 벽색의 무복 차림으로,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파리한 안색과 삐쩍 마른 체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호리호리하고 낭창한 몸이나 버드나무처럼 곡선을 그리는 콧대, 가느다란 입술과 호인을 가장하는 눈매가 어딘가…….
……익숙했다.
사현의 뇌리에 벼락같은 기억이 꽂혔다. 지독한 폭력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미숙한 자아를 고통에서 지켜 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행했던 모든 짓이 떠올랐다. 아물 때를 놓치고 잠겨 버린 흉터가 흉측하게 드러나고, 쌓아 온 탑의 지반은 모래에 불과했다.
-현아 너는 기억에 없겠지만 스승님의 피를 마신 적이 있어. 아마 그걸 계기로 몸이 달라졌을 거야.
스승의 혈액을 먹은 일이 어째서 기억에 없었던가.
-그럴 일이 있어. 깊게 생각하지 마.
제 누나는 어째서 이 말을 하기 꺼려 했던가.
자신이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저 얼굴을 한 자의 손에 잡혀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넘어갔던 숨을 억지로 끌어온 여파로 장장 두 달을 앓았던 일을 모조리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저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나 보니 두망산이었다. 몸 눕히고 바람 피할 오두막이 있었고, 늘 자신을 지켜 주는 누이가 있었으며, 배 곪지 않게 돕는 어른이 있으니 일부러 의심하지 않았다. 어린 기억이 몇 달쯤 비는 건 흔하다고 합리화했다.
멀쩡한 몸의 뼈마디가 부서진 듯 아팠다. 멍 자국 하나 없는 살이 내리친 듯 괴로웠다. 폐에 피가 찬 것처럼 호흡이 가빠졌고, 고막이 터진 것처럼 귀는 먹먹했다. 너무도 완벽히 잊어버린 탓에 초윤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 충격이 뒤늦게 전신을 점령했다. 이는 소년의 사술을, 죽음의 위협을 뛰어넘어 사현을 마비시켰다.
-시끄럽게도 나돌아 다니는구나. 더러운 쥐새끼 주제에.
오래된 환청이 머리에 울렸다. 사현은 한참을 빌어도 목소리가 되어 나가지 않던 말을 중얼거렸다.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잃었던 말을 되찾은 지 십수 년이 되어 간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그러고는 풀썩 쓰러져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도 평소처럼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이나, 머리 위로 쏟아지던 의아한 눈길을 알아챌 여유도 없었다. 사현의 머릿속은 암전되기 직전까지 온통 미련뿐이었다. 누나가 바깥에 있을 텐데, 이 사람을 마주치면 안 되는데, 다치면 안 되는데.
누나가 하오문에 있을 텐데, 이 사람들을 마주치면 안 되는데, 다치면 안 되는데…….
“허억…….”
이 모든 과거를 기어코 떠올린 사현이 숨을 삼켰다. 경위를 알고 주위를 다시 보자 새로운 공포심이 들이닥쳤다. 몸을 묶은 사슬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사현은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먹 쥐고 벽의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내공을 끌어 올릴 순 없었지만 단전은 멀쩡했다. 오감에 기운을 집중할 순 없었지만 여태껏 단련한 신체는 여전했다. 그렇기에 들렸고, 알아챌 수 있었다.
하필이면 바로 지금,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