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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45)화 (145/257)

145화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초윤은 지금보다 곤란한 사태를 맞닥뜨리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만큼 당장 닥친 문제가 중대했고, 충격적이었다.

초윤은 얼마 전에도 앉아 있었던 창문 앞 의자에 똑같은 자세로 착석한 채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멍하니 정신을 놓았다. 고뇌고 근심이고 다 저곳에 떠내려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회피성 소원만 자꾸 치밀었다.

꼬박 열두 시간에 걸쳐 초윤을 손 놓게 만든 일의 원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어제 모용단이 주최한 대담(對談)때문이었다.

초윤은 전날, 결국, 정말 어쩔 수 없이 홀몸으로 하오문 밖으로 향했다. 천오를 홀로 두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대화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대동할 순 없었다. 모용 형제에게 천오를 더 노출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튼 혼자 책임지고 수습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룻밤 내내 마음을 다잡은 초윤은 천오가 점심을 먹은 후 뒷정리를 하러 나간 틈을 타, 금방 돌아오겠다는 짤막한 서신 한 장만 남긴 채 바깥으로 나갔다. 드높은 하오문의 담을 넘고 기척 없이 도심을 가로질렀다. 융성한 번화가에 도착해선 사람들 틈에 가만히 선 채 모용단을 찾았다.

희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서처럼 맹렬하지도 않지만 탄탄하게 갈무리된 내공, 맞춘 듯 균형 잡힌 기운과 눈속임 없이 정직한 기척. 칠성검이라는 거창한 칭호와는 반대로 너무나 정석적인 육체를 갖고 있어 도리어 기억에 선명히 남았다. 몸만 보자면 모용단은 분석적인 노력가가 분명했다. 동생처럼 밉상 짓만 안 한다면(초윤은 이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주인공 모용서가 못마땅했다) 괜찮은 사람 같은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기다 보니 아쉬울 뿐이었다.

아무튼 모용단이 잡아 놨다는 자리로 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현대의 전파 탐지기를 방불케 하는 능력으로 모용단의 위치를 특정했고, 그리로 슬슬 가 보니 객잔 하나가 통째로 비어 있었다. 얼굴과 옷차림을 가린 무사들은 죽립을 쓴 초윤을 아무 말 없이 들여보냈으며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다.

사이에 다과상을 두고 침묵을 지키자, 마주 앉은 모용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동안 동생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혼자 속을 끓였는지 이야기를 듣는 조건이나 허례허식조차 내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조건으로 천오랑 모용서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면 어쩌지.’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줄줄이 나오는 모용단의 말은 그 자체로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요녕의 비동에서 발견한 신물은 까마귀 모양을 띠고 있었습니다. 크기는 손바닥의 절반만 하고 도자기와 비슷한 질감에 그리 단단하진 않았습니다. 비동의 맨 밑바닥에 잠들어 있었으나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렀으며, 손으로 만지고 옮겨도 별다른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를 보관하며 훗날 주인이 될 사람에게 도움을 줄 생각으로 수년간 연구를 거듭하였으나,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사라진 게 벌써 4년 전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사라졌다? 무책임한 소리를 하는구나.

-감당하지 못할 물건을 소홀히 다룬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당장은 혼란을 억제하고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겼습니다.

신물의 주인을 찾는다는 핑계로 벌인 일이 몇인가. 모용세가와 소림사, 하북팽가, 아미파 등 자그마치 백협맹 절반에 달하는 문파의 비밀스러운 담합은 십 년에 걸쳐 중원을 뒤흔들었다. 이름 있는 문파들은 인재 영입에 혈안이 되어 대회를 열고, 새로운 아이를 영입하고, 무림 전체의 인구를 늘렸다. 이러한 변화는 순기능도 있었겠지만 부작용 또한 만만찮게 컸다. 각 세력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은 물론이요, 우승과 칭송을 두고 온갖 부정이 판을 쳤다. 나무를 숨긴다면 숲에 숨겨라, 어쩌면 이 격언처럼 우후죽순 불거진 혼란 덕분에 인재 찾기의 ‘진짜 목적’을 숨길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으나 결코 이상적인 전개는 아니었다.

이럴 때 그 ‘진짜 목적’이었던 신물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단 사실이 유출되면 또 어떻게 돌아갔을까.

모용단의 선택을 양심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것과 별개로, 모용단의 상황 자체는 납득이 갔다. 초윤 또한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면 입을 다물고 홀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을 듯했다.

-모용세가에 하잘것없는 좀도둑이라도 들었더냐.

-……아닙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긴밀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만.

모용단은 입을 다물고 양손을 깍지 껴 모아 잡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겪은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듯, 현실적인 인간으로서의 번민이 느껴졌다.

-누군가 가져가지는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물은 바로 제 눈앞에서 녹아 없어지듯 사라졌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4년 전,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제갈세가의 도움을 받고 돌아온 날의 동틀 무렵에 제가 보는 앞에서 뭉그러지며 사라졌습니다. 놓아두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고, 그 뒤로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모습을 감추었을 뿐입니다.

내가 읽던 소설의 장르가 무협이 아니라 무협 퓨전 판타지였나?

초윤은 어리벙벙한 기분으로 <귀환영웅>에 마법적 장치가 있었는지 생각했다. 성과는 딱히 없었다. 그 뒤로 모용단이 취한 조치에 대한 설명이 차분하게 이어졌지만 귀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초윤이 가진 의문은 하나였다.

‘주인공을 상징하던 물건’이 본래의 궤도에서 벗어나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이는 무엇을 뜻하며,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그냥 망했다는 뜻 아닌가?

어쩌면 더 이상 주인공과 조연과 악역의 구분이 없는 독립적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꼬인 스토리의 영향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튀었을 수 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대차게 비틀리다 못해 망했으며, 아마도 유일하게 ‘현실’과 접해 있는 초윤은 이를 알아낼 도리가 없다.

모용단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초윤의 심각한 심정을 알았는지, 모용서나 천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말했지만 초윤이 듣지 못한 걸 수도 있었다. 그만큼 황망했고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하고 어떻게 해무당에 돌아왔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찾아오던 남매도 그날만큼은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다.

답 없는 생각에 몰두하던 정신머리를 붙잡은 건 천오의 한마디였다.

“스승님, 언제쯤 무심서로 돌아가실 요량이십니까?”

“음?”

귓가에 내리꽂히듯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의식을 되찾는 감각은 지극히 생소했다. 어느새 날은 어둑했고, 초윤은 천오와 마주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수저의 무게와 입 안에 머금은 음식의 맛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씹는 것을 잊은 채 멍하니 멈춰 있었던 것 같았다.

최근 며칠 스트레스를 왕창 받았더니 이게 또 도졌구나. 초윤은 속으로 여전히 자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밥알을 씹어 삼켰다. 혹시라도 마음을 쓸까 봐 잘 돌려서 말해 준 천오가 기특하기도 했다.

“……글쎄, 조금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구나. 돌아가고 싶더냐.”

“스승님과 함께 나오는 나들이는 늘 즐겁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와 다르게 심려가 크신 것 같아 감히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역시 천오한테도 보였나. 애한테 티 내고 싶진 않았는데. 초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와는 별개로 자신의 기분을 알아주는 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안심감 또한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초윤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천오가 무구하게 들리는 질문을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정말 순수한 궁금증에서 기인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해결해야 할 용건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그 일이 스승님을 힘들게 하는 겁니까?”

“그래.”

“스승님도 이루시기 어려운 일입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아예 잡아떼, 아님 말아?

초윤은 넘어가지 않는 식사를 억지로 하려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대신 미지근하게 식은 찻잔을 들어 입 안을 헹궜다. 자신의 제자들이 꼬여 버린 스토리에 깊게 연관되지 않길 바랐지만 천오는 어쨌든 이 여정의 일행이었고, 적어도 여행 일정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간단히 알려 줘야 도리일 것 같았다.

초윤은 아주 신중하게 단어를 고른 뒤 말했다.

“내가 저지른 일로 인한 부작용과, 인과 관계조차 불분명한 불가해의 사건이 생겼다. 전자는 하오문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후자는 어떻게 풀어 나갈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후자는 스승님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일입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계획에 큰 차질을 줄 것이 분명한 일입니까?”

“……결과마저 예상할 수 없다.”

“스승님께서 관여하시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입니까?”

“……그건 알 수 없다.”

“당장 귀추가 나타날 일입니까?”

“……그것도 알 수 없다.”

“이곳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스승님께서 크게 근심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심서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릴 순 없습니까? 하오문주를 통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아니, 모용단이랑 꾸준히 소통할 수단이 필요하긴 한데…… 이건 따로 방안을 마련하면 되나?

거듭된 과부하로 휴식을 바라는 정신이 슬그머니 천오의 제안에 무게를 기울였다. 초윤은 지그시 눈을 감고 객관적인 시선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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