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하지만 독은 결국 풀리지 않았으니, 스승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했겠습니다.”
“대협께서 과연 미행을 알아차리지 못하셨을까요?”
“알아차리셨어도 미행하는 자들을 처리하는 모습을 천아에게 보여 주시거나, 제게 서신으로 전해 주시진 않으셨을 겁니다. 어쩌면 객잔에 천아를 홀로 두고 가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셨을 수 있고요.”
“마교도들은 정보를 불 바엔 자결하도록 세뇌받았으니 왕정이 꼬리를 자르듯 내빼기도 쉬웠을 테고……. 4년이나 지난 일이니 그때 무슨 타격을 입었든 지금은 회복했을 가능성이 크군요.”
골치가 아프네요, 덧붙인 희가 뻐근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정작 당사자인 초윤은 사람이 많은 대낮에만 움직인 탓에 누가 쫓아오든 말든 ‘같은 방향인가 보지’ 정도로 생각하며 넘어갔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치미는 부아와 겹친 피로를 미처 감추지 못한 희는 손을 내려 책상 옆의 찻주전자를 더듬더듬 찾았다. 곱게 다듬은 손끝이 뜨거운 몸체에 닿기 직전, 기척 없이 나타난 사람이 한 손으론 희의 손을 잡아 치우고 나머지 손으론 주전자의 손잡이를 쥐어 찻잔에 기울였다. 눈만 내놓은 채 갈색 고수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여와였다.
희는 익숙한 듯 시중을 받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새어 나가면 하오문의 신뢰가 단번에 추락할 게 분명하니, 하나씩 준비를 한 다음 몰아치듯 정리하는 게 낫겠어요. 일단은 제갈세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부터 알아보죠.”
“왕 지부장을 축출하는 것이 먼저 아닙니까?”
“섬서성에 도사린 마교의 정확한 규모를 모르는 이상 무턱대고 내쫓긴 어려워요. 그렇다고 왕정만 이곳으로 부른 뒤 섬서성을 치자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연락을 보내자마자 들통이 날 테고. 솔직히 말하자면 제갈 소저가 이런 의뢰를 하러 온 게 천운으로 느껴져요.”
그렇게 말한 희는 찻잔을 내려놓고 검지 끝을 찻물에 퐁당 담가 적셨다. 그리고 손톱자국이 남은 서안 위에 쓱쓱 글씨를 썼다.
시무(時務).
“귀한 손님의 다급한 부탁이잖아요. 비밀리에 움직여야 한다는 명분도 있고, 최대한 빨리 사태를 파악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조사단’을 파견 보내도 이상할 건 없지요. 조사단이 곧 방문하리란 사실을 전하는 전서구가 ‘우연히’ 늦게 도착해도 어쩔 수 없고요. 도착한 사람들이 혹시 모를 제3세력을 경계하며 ‘숨어 다녀도’ 그럴 만해요.”
“……그 조사단이 어쩌다 하오문 지부의 부정부패를 발견할 수도 있겠습니다. 문주님이 다망하셔서 몇 년간 시찰도 못 가셨으니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럼 이제 문제는 인선(人選)이에요.”
다 쓴 종이에 손을 닦은 희가 머릿속으로 문도 목록을 쭉 뽑으며 말을 이었다.
“두 번에 나누어 보낼 예정이지만 선발대의 역할이 중요해요. 마교도를 상대하려면 무력이 든든하거나 잠행술(潛行術)이 뛰어나야겠지요. 제갈세가를 조사하면서 동시에 내부 감찰로 배신자를 가려내야 하니 일머리가 아주 좋아야 하고, 왕정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옭아맬 독심도 있어야 해요.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이니 여러 명의 부하를 지휘할 지도력도 겸비해야 하며 이렇게 위험한 임무를 적극적으로 이행할 이유도 있으면 좋겠네요.”
“무후(武侯)라도 되살릴 요량이십니까? 아니, 그자도 잠행술을 배웠단 말은 없습니다.”
사영이 인상을 찌푸린 채 타박 아닌 타박을 하는 순간, 희가 사영의 손을 덥석 잡아 올리며 말했다.
“임 소저가 강서단을 이끌고 가 주지 않을래요? 딱 좋을 것 같아요!”
“예?”
“소저는 제 수제자나 다름없잖아요. 임 소저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일을 맡기겠어요?”
“아니, 잠깐만…….”
“이제 소저도 광동성을 벗어날 때가 되었어요. 설린 소저와 대담을 나눠 보고,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조사단의 규모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최대한 지원할게요.”
아, 이거 말이 안 통한다. 생각을 와르르 쏟아 내는 희에게 잡혀 있던 사영이 익숙한 듯 뒤에 서 있던 여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소리 없는 한숨을 쉰 여와가 조심스레 다가와 희의 어깨를 잡고 둘을 살짝 떼어 냈다. 희는 여와를 힐긋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진정한 듯 입을 다물었다.
신중한지 무모한지, 계획인지 충동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사를 둔 사영은 기묘한 희열과 현실적인 고충을 저울질하며 차분히 말했다.
“먼저, 제가 맡고 있는 강서단은 무공의 수준이 그리 높지 못합니다. 장위를 비롯한 다른 단원들도 초절정은커녕 아슬아슬하게 일류 무사와 절정 무사를 저울질하고 있는데 어떻게 마교도와 맞붙이겠습니까?”
“대신 잠입과 첩보에 능하고, 소저의 무위가 높잖아요. 인원도 열 명이 채 되지 않으니 무사를 몇 명 더 끼워 넣을 수 있어요. 후발대도 곧장 보내도록 할게요.”
“저는 활과 비도만 좀 다룰 줄 알 뿐 무위가 높진 않습니다. 사현이보다도 약한데요.”
“하지만 임 소협을 이길 자신은 있지요?”
“……말씀하셨듯이, 저는 광동성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실전 경험도 부족한데 이렇게 중한 일을 덜컥 맡기시면 어떡합니까.”
“해부를 보내서 빠른 연락이 가능하도록 할게요. 경험은 적극적으로 겪어야 쌓이는 거지요.”
“저보다는 밀정이었던 여와가 훨씬 잘할 겁니다!”
“당신은 대외 활동이 적었던 탓에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사람이 내 다리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아요. 여와는 너무 노골적으로 내 의심을 드러내게 될 거예요. 내가 직접 가는 것과 다름없을걸요.”
“……아니요, 그래도 안 됩니다. 스승님께서 아직 해무당에 계시니, 저는 떠날 수 없습니다.”
“약선 대협께선 산하에 내려오시면 한곳에 오래 머무시는 법이 없지 않나요? 아니면 이러한 임무를 받아서 섬서성에 가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손을 빌려주실지도 모르잖아요.”
“문주님!”
스승을 이용하라는 것과 진배없는 소리에 사영이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사영 역시 위험한 임무를 맡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초윤을 떠올렸기에, 구체적으로 따지거나 반박하진 못하고 이를 악물기만 했다.
자그마치 8년에 걸쳐 옆에 두고 가르친 아이가 지레 찔린 듯 쌕쌕 숨을 고르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희가 나직하게 말했다.
“사영, 이제 그만 적당히 선택해요.”
“……무엇을 말입니까?”
“서문 소협은 약선 대협만 계시면 되고, 임 소협은 소박한 행복만 누려도 만족할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
“당신은 야심을 품은 사람이에요. 약선 대협처럼 속세와 떨어진 채 살아갈 수 없어요. 세상에 나와서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부딪히고 내달리며 분투해야 해요.”
하오문에 둥지를 튼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에, 시장과 항구를 누비는 굶주린 쥐 떼에 관한 소문을 듣자마자 알았다. 사람은 도자기처럼 덜 자라 물렁할 적에 빚는 대로 굳어지는 법. 희는 어린 임사영의 행적을 전해 들으며 몇 번이나 감탄하고 바라 왔다. 폭력의 흔적을 끝으로 사라졌단 보고를 받고선 얼마나 아쉬웠던가.
“스승님께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은 알지만, 속세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세요. 당신은 약선 초윤의 제자라는 이름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이상 무슨 일을 하든 대협과 연관이 생기게 될 거예요. 대협께서 이 사실을 모르고 당신을 거두셨을 것 같나요?”
“……아니요.”
“약선 대협은 당신과 임 소협을 키우기 시작하신 뒤로 지난 이백 년을 통틀어 가장 빈번히 속세에 모습을 보이고 계세요. 기꺼이 사천당문에 방문하셨고, 처음으로 하오문에 와 주셨어요. 이 모든 게 전부 책임감에 떠밀려 억지로 행하신 일일까요?”
-문제를 알았어. 우리야. 우리가 문제야.
-그런데 그분과 속세를 연결하는 접점이 생겨 버렸어. 사천당문에 가게 되신 이유, 절강성을 찾아가신 이유, 하오문까지 긴 여행을 하게 되신 이유가 전부 뭐야. 우리 때문이잖아.
희가 꺼낸 주제는 공교롭게도 얼마 전 사영이 죄책감으로 담아 둔 채 해소할 길 없이 썩히던 심정을 건드렸다. 사영은 자신과 동생의 존재가 스승의 족쇄가 된 것 같아 속이 상했고, 그런 와중에도 스승의 도움을 받을 생각부터 떠올라 스스로를 책망했다.
하지만…… 스승님께선 이미 이 모든 걸 예상하셨다고?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의지만 한다면, 일찍이 독립을 한 의미가 있을까?
상념에 잠긴 사영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희는 안타까운 웃음을 짓고 설득을 계속했다. 사영을 섬서성으로 보내는 까닭과는 꽤 멀어진 대화였지만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납득시킨 뒤 밀어붙이는 것 또한 화술 중 하나였다.
“우연히 좋은 집안에 태어났단 이유로 떵떵거리며 사는 인간들도 부지기수인데, 당신을 아끼는 스승님의 후광을 빌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그냥 조금 든든해진다고 생각해요. 여차하면 스승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여차하면 스승님께 조력을 구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그렇지만…….”
“믿을 구석이 하나쯤 있는 것도 좋잖아요. 당신은 나까지 포함해서 둘씩이나 되는걸.”
마지막 말이 사영에게 쐐기를 박았다. 사영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 뒤 순순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