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33)화 (133/257)

133화

“……여기까지? 누군데?”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혼자고, 적의는 없으며, 속도도 빠르지 않습니다.”

“그럼 이 야밤에 정체 모를 인간이 하오문 안에서도 가장 깊은 이곳에 유유자적 홑몸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썩 좋은 용건은 아닐 것 같았다. 여전히 먼 바깥에 시선을 둔 천오가 가장 먼저 방을 나섰다. 사영은 형형한 눈으로 어깨에 활을 둘러멘 채 자리에서 일어났고, 어느새 풀어 둔 도집을 움켜쥔 사현이 그 뒤를 말없이 따랐다.

문 하나를 지나자 밤바다 특유의 습한 바람이 폐를 적셨다. 인기척 없이 정원을 지나는 세 명 사이로 긴장감이 넘실거렸다. 깜깜한 밤, 스승이 자리를 비운 사이 큰일을 맞닥뜨렸던 경험이 있다 보니 경계심이 최고조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내부를 가로질러 대문 앞에 다다른 천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낮만 해도 따스하게 열리며 사현을 마중했던 문은 이제 와 음산하게 닫혀 있었다.

[오십 보 앞에 있습니다.]

[나도 알아. 숨길 생각이 없나 본데.]

[어? 잠깐만, 누나. 나 이거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내가 문 열어도 돼?]

[뭐? 누군데? 일단 가만히 있어 봐.]

소리 없는 대화가 빠르게 이어지는 와중 사영은 품에서 신호용 폭죽을 꺼내 쥐었다. 익숙한 기운을 느낀 사현만이 긴장을 풀고 문을 가리키며 입을 뻐끔거렸다. 점점 가까워지던 발걸음은 이윽고 바로 앞에 멈춰 섰고, 쇠로 만든 문고리를 잡아 두드리는 소리가 풀벌레 울음소리 가득하던 정적을 채웠다. 뒤이어 낮은 음성이 정중하게 문 틈새로 흘러 들어왔다.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잠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천보도 소협과 서문 소협께선 이곳에 계십니까?”

[이거 그 사람이야! 서하네 형, 모용세가 소가주 칠성검 모용단!]

“미…….”

미친 거 아니야? 그 작자가 여길 왜 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고 했던 말을 황급히 삼킨 사영이 까드득 이를 악물었다.

칠성검 모용단이 누구인가. 명실상부 현 세대의 무림을 이끌어 나가는 주축 중 하나이며, 최연소의 나이로 백협맹 간부회에 참석하는 무소불위의 인물. 지학(志學)에 비려십오검과 청죽수를 대성하고 약관에는 기관진식에 심취해 새로운 유파를 창시했으며 이립인 지금에 이르러선 요녕성 최후의 방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하오문에서 온갖 소식을 다 듣는 사영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업적 또한 세세히 꿰고 있었다. 그중에는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천자문을 꿰고 붓을 잡았다는 둥, 다섯 살에 세가의 무사를 이겼다는 둥 허황된 소문도 많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자칫 주눅이 들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영의 입꼬리는 도리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이 모든 사전 정보의 위압감을 거뜬히 넘어서는 이유가 있었다.

이 새끼도 그 발랑 까진 놈이랑 한통속이었지.

사영에겐 아직 쌓인 게 많았다.

이런 것까지 준비해 줄 필요는 없는데…….

초윤은 월장석과 비취를 꿰어 만든 주렴 뒤에서 어색하게 쭈뼛거렸다. 무공을 어느 정도 익히면 이 정도의 가림막은 시야에 방해도 되지 않는다지만, 호화롭게 얼굴을 가려 주는 구슬발 뒤에 있으니 진짜 상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모용서보다 늦게 이 방에 들어온 것 또한 희의 연출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래도 희의 ‘상전 대접’에 긴장했던 속이 풀리는 것 같아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8년 전 희를 마주했을 때도 마음을 놓을 순 없었지만, 그때는 초윤이 거래를 할 수 있는 정보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대하는 사람은 초윤이 알고 있는 전개를 고스란히 겪을 예정이었던 자였으며, 초윤은 그의 앞날을 어느 정도 망치기까지 해 버렸다.

거기에 더해 변명할 말도 아직 명확히 떠오르지 않은 채 상황에 쫓기듯 만나게 되었으니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초윤은 착잡한 눈으로 앞에 앉은 모용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액정 너머 삽화로만 보던 캐릭터를 직접 대하게 되다니 와중에도 조금 신기하긴 했다.

그때, 어쩐지 불안해 보이던 모용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담화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리는 데에 앞서, 사죄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협을 만나 뵙기 위해 술수를 쓴 점, 죄송합니다.”

어라, 얘가 이렇게 정중한 성격이었나?

분명 <귀환영웅>의 모용서는 나이 많고 지위 높은 무인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냉소적 입담과 악역보다 악역 같은 태도가 트레이드마크였는데? 나한테도 건방지게 굴어야 되는 거 아닌가? 형을 제외하면 새어머니에게도 껄렁하게 굴던 애 아니었나?

머릿속에 있던 주인공의 이미지와 실제로 마주한 모습의 격차에 얼떨떨해진 초윤은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다급해진 모용서가 줄줄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받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찾아뵙고 싶었지만 연락을 취할 길이 막막하던 찰나, 친우인 임 형과 대협의 관계를 알게 되어 욕심을 부렸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임 형에게도 꼭 사과하겠습니다.”

“……관계를 알게 되었다?”

“……임 형이 비밀리에 보관해 둔 다량의 단약을 발견했습니다. 영약에 가까운 약을 그렇게나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대협뿐이라 생각했고, 그만큼이나 지니게 할 까닭은 사제 관계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무엇보다…….”

“…….”

“임 형은 본래라면 나타날 리 없는 인물이니까요.”

자신의 저의를 알겠냐는 듯 이쪽을 응시하는 눈빛이 퍽 맹렬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약을 들켰구나. 내가 역시 너무 많이 보냈나. 이런 고민이나 하고 있던 초윤은 이번에도 대응할 시기를 놓쳐 버렸고, 찔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모용서는 더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4년 전, 주천…… 서문천오와 맞닥트렸을 때 그가 대협의 존호를 언급했습니다. 신강에 있어야 할 자가 섬서의 한가운데에 있을 이유는 누군가의 개입밖에 없을 듯했습니다. 아무도 몰랐을 제 가형의 고독을 죽이는 데에 도움을 주고, 염라군 주천오의 마교행을 막았으며, 천보도 임사현을 키워 낸 사람……. 모든 것이 대협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정말 많은 사고를 쳤구나…….

자신이 회상하는 것과 남이 말해 주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초윤은 열심히 한탄을 참았다.

모용서는 잠깐 입을 다물더니 숨을 고르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뒤 말했다. 아마 본인은 수 년에 걸쳐 수도 없이 고뇌했을 질문이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대협. 대협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드디어 주인공에게 이 말을 듣는 날이 와 버렸다. 더는 이를 수습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초윤은 약간 체념한 기분으로 수긍했다.

“네가 아는 것보단 많이.”

“이전의…… 제가 돌아오기 전의 세계를 아시는 겁니까? 그를 기반으로 이 모든 일을 주획하신 것이 맞습니까?”

“흘러가는 대로 둔 게 계획이라면 주획도 맞겠지. 지금에 이르러선 소용없는 이야기다. 이미 많은 게 변한 마당에 기반이라 할 게 어디 있겠느냐. 완벽한 예언이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너와 내가 ‘아는 것’은 더 이상 무기가 될 수 없다.”

네가 다 해 먹고 다녔어야 할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미안해! 근데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리고 어쩌면 원작보다 이 전개가 나을 수도 있잖아. 주천오가 태어날 배경을 없앤 것만 해도 감지덕지 아니야? 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도저히 모르겠으니까 좀 봐주라!

약간은 비굴하고 상당히 뻔뻔한 속내와는 다르게, 말은 제법 우아하게 튀어 나갔다. 모용서는 어둡고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낮게 물었다.

“이전 세계에서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초윤’은 회귀자가 아니니 당연했다. 간결하게 답한 초윤은 이제 예의 그 질문이 나오나 싶어 내심 바짝 긴장했다.

어떻게 이를 알게 된 건지 물어보는 흐름이지? 역시 꿈에서 봤다고 해? 이걸 뭔가 있어 보이는 말로 바꾼다면 뭐가 되지?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건 좀 과한가?

그러나 가슴을 졸인 게 무색하게도 뒤이은 물음은 초윤의 예상과 전혀 딴판이었다.

“대협께선 최종적으로 무엇을 목표하고 계십니까?”

“…….”

주렴 너머로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빛은 경계심을 넘어 비장하게 보였다. 마치 초윤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흑막이라도 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초윤은 무심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네 생애를 어쩌다 알게 되었는지는 궁금하지 않고?”

“밤을 새워 가며 모든 의문을 밝혀 달라 청할 수 없는 입장이란 사실은 숙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전 세계를 알게 된 경위가 명확하지 않은 만큼 대협께서도 마찬가지가 아니실까 추측할 뿐입니다. 설령 아니라 하셔도, 저는 과거의 전말보단 현재의 세계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이전 세계를 알게 된 경위가 명확하지 않다……?”

모용서의 말을 느리게 곱씹은 초윤이 한순간 가벼운 손짓으로 주렴을 걷었다. 그와 동시에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다과상이 마찰력 없이 주욱 옆으로 밀려나고, 모용서의 덜 자란 몸은 누군가 멱살을 잡아당긴 것처럼 초윤의 앞까지 끌려왔다. 단련된 무림인인 모용서가 힉 숨을 삼키며 간신히 방어 본능을 억누르는 찰나, 허공섭물로 모용서를 가까이 잡아 온 초윤의 손이 턱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대, 대협?”

그리고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다급하게 모용서의 허리춤과 소맷자락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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