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28)화 (128/257)

128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칠성검 대협. 하오문 소속 강서단(剛誓團)의 단장 임사영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초면부터 추태를 보여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책임은 기별도 없이 찾아온 이쪽에 있습니다. 환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멀끔하게 웃는 얼굴보다 어깨에 둘러멘 활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모용단은 황망한 심정이 미처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틈을 놓치지 않은 사영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임이라면 의무를 다하지 못한 소식통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대협. 동행하는 내내 한 줄 연락을 넣는 것조차 해내지 못한 하오문도로 말미암아 미숙한 대접을 하게 되었으나, 바라건대 방금 전의 처벌로 너그러운 관용을 보여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대접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타고난 오성(悟性)으로 말이라면 한 번도 밀려 본 적 없던 모용단이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복형 말고는 아무도 공경하지 않던 모용서조차 어쩐지 얌전하게 굳어 눈만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의 수완이 상당히 만만치 않았다.

중원에서는 늘 동떨어진 취급을 받는 세가, 배척받는 땅끝의 이방인일지언정 모용세가는 오대세가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최소한으로 추렸다고는 하나 쟁쟁한 무사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도달했고, 다음 세대의 가주가 될 인물과 그의 동생까지 일행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당당하게 활을 겨누다 못해 떡하니 화살까지 쏘아 올린 무례는 도무지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파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지만 하는 일은 사파에 가까운 하오문 소속의 인물이었기에, 이는 세력 간의 적대 행위로도 비칠 수 있는 민감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임사영은 이를 간단한 말 한마디로 덮어 버렸다. ‘의무를 다하지 못한 하오문도를 향한 질책’ 내지는 ‘동생 임사현을 나무란 누나 임사영’으로 조금 전의 일을 포장함과 동시에 ‘너희들이 일부러 기별을 넣지 못하게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 정도로 넘어가자.’라는 뜻을 은근히 내포함으로서.

모용단과 모용서는 부정할 수 없는 불순한 의도로 이곳에 도달했다. 이미 저지른 짓이 있으니 눈앞에서 활시위를 당긴 자에게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강서단은…… 요녕에서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마땅한 정보 조직을 갖추지 못한 게 한이군.’

이렇게 되면 구경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오문의 문턱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해 준 것조차 배려가 되나. 조용히 한숨을 삼킨 모용단이 말했다.

“문주님께 대면 상담을 요청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이리 급히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실례지만 긴급한 용무를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대협. 다만 문주님께선 지금 앞선 일정으로 경황이 없으시니 저녁 즈음에 자리를 만들 수 있을 듯합니다. 괜찮으십니까?”

“몰염치한 방문을 하게 되었으니 재촉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을 내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읍할 뿐입니다. 이쪽의 장위가 머무실 곳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사영의 뒤에 있던 남자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모용단은 그에게 가볍게 묵례한 뒤 먼저 몸을 돌렸다. 일행이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영의 두 눈이 묘한 기색을 담고 모용서에게 머물렀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모용서는 사영과 눈이 마주치자 이유 모를 압박감에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임사현은 누나 앞에 홀로 남게 되었다. 살고 싶다면 일행을 따라 몸을 피해야 했건만 발이 떨어질 리 없었다. 지나가는 하오문도들은 이쪽을 힐끔거리기만 할 뿐 도울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고, 누나에게 잘 말해 준다던 친우도 냉큼 떠 버린 뒤였다.

장장 4년 만에 만난 누나인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무 화살을 쥔 손에 땀이 배어 축축해졌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누나의 발치만을 보고 있자, 사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많이 컸다?”

“어…… 어, 응?”

화들짝 놀란 사현이 고개를 들었다. 못 본 사이 자신보다 훨씬 작아진 누나가 어깨에는 활을 메고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럽게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임사현이 커 버렸다.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너는 그 먼 땅에서 그동안 도대체 뭘 배웠기에 저런 꼬맹이 하나도 못 떨쳐 내? 팽 대협이 너 데려가선 방치하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나? 화 안 난 건가? 사현이 둔한 눈치로 열심히 누나를 살폈다. 마냥 마음을 놓기엔 대뜸 날아온 화살의 충격이 컸다.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은 천보도라는 위명에 걸맞지 않게 볼품없이 주눅 들어 있었다.

“쟤가 좀…… 날쌔.”

갑작스럽게 생긴 스승, 갑작스럽게 결정된 대회, 갑작스럽게 결정된 행선지와 갑작스럽게 다가온 친우.

이젠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다짐하자마자 얼마나 많은 혼란이 연달아 덮쳐 왔던가. 지난 4년간 사현이 한 번도 광동성을 찾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사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 더 강해져서, 조금 더 단단해져서 만나고픈 욕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 여러모로 망하다니. 사현은 걷잡을 수 없이 울적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시시각각 변하는 동생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사영이 쯧 혀를 차더니 말했다.

“바보야, 화 안 났으니까 지레 겁먹고 쫄지 마. 저 싹퉁머리 없는 꼬맹이 기선 제압 하려고 쏜 거야. 아직도 네 누나를 그렇게 몰라?”

“……진짜?”

“저기에 옳다구나 휘말린 너도 많이 답답하지만 뭐 어떡하겠냐. 천성이 순해 빠졌으니 어쩔 수 없지.”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두들겨 패고 싶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저쪽이 더 괘씸하더라고. 내 동생 착한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무심한 듯 내던지는 말이 사현의 가슴에 쿡쿡 박혔다. 서럽지 않은 눈물에 코끝이 찡해지고 목구멍이 뻑뻑하게 메었다. 어째서 울 것 같은지도 알 수 없었다.

사영은 한 걸음 성큼 다가가 양팔을 벌렸다. 품에 안기도 버거울 정도로 자란 동생을 끌어안고 넓은 등을 도닥였다.

“어서 와, 현아야. 스승님도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

못 본 사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누나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코를 훌쩍이는 버릇은 변하지 않은 듯했다. 사영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오문주 희가 마련한 거처는 초윤의 취향에 꼭 맞아떨어졌다. 새것일 게 분명한 가구에선 오래 쓴 듯 은은한 나무 향이 났고, 소박하지만 견고한 집기는 단아하게 놓여 있었다. 잘 말린 약재와 향초가 황토 바른 벽에 매달려 있었으며 번잡한 소리는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초윤은 편백나무로 짠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가만히 바깥을 내다보았다. 바다로 이어지는 커다란 강줄기 위에 배 몇 척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소금기 섞인 습한 바람이 뺨을 간질이며 하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나붓나붓 내리감겼다.

차분하고 고아하게 앉아 있던 초윤은 생각했다.

‘어떡해…….’

아무래도 진정하긴 단단히 틀려먹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장장 8년 만이었다. 유학 보낸 아이를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얼굴 한 번 못 보다가 겨우 만나게 되었는데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영이와 재회했을 땐 이 근엄한 몸으로 저잣거리에서 포옹을 했을 정도였다.

같은 성질의 내공을 품은 사현이의 기척이 멀리서부터 느껴지자 설렘을 넘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늘 동양화 속에 사는 것처럼 정적인 ‘초윤’이기에 망정이지, 마음 같아선 버선발로 뛰쳐나가고도 남았다. 먼 강을 바라보며 애써 기분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약재를 손보고 있던 천오가 고개를 들었다.

“사형이 온 것 같습니다, 스승님.”

“그래.”

“마중을 나갈까요?”

“……그게 좋겠구나.”

우리 막내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해무당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타인의 눈에 띄진 않을까 염려하던 초윤이 천오의 핑계를 대며 창틀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정원까지만, 혹은 문 앞까지만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담 너머로 발을 내디딜 생각은 없었지만 따라 일어난 천오가 공손히 내민 죽립은 자연스럽게 받아 썼다.

흙바닥을 자근자근 밟아 나아가는 발걸음이 날 듯이 가벼웠다. 이 순간에도 익숙한 기척 둘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날카롭게 벼려 온 칼날처럼 얇은 예기와 강철에 강철을 덧대어 쌓아 온 거대한 무게감. 어느새 고요히 다가와 곁에 선 천오가 나직하게 말했다.

“사형이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초윤은 이를 부정할 수 없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초윤의 눈앞에 오래전의 광경이 덧씌워졌다. 그때는 조그만 아이 둘이 허름한 오두막 안에서 문을 열고 뛰쳐나와 초윤에게 뛰어 들어왔었다. 초윤의 품에는 더 작은 아이가 정신을 잃은 채 안겨 있었고, 예기치 못한 일에 크게 당황했었다.

그러나 안겨 있던 아이는 이제 장성한 채 곁을 지켰고, 넓은 세상으로 나갔던 두 남매는 열린 문 틈새로 앞다투어 초윤에게 돌아왔다. 문턱을 넘어 들어오자 눈에 들어온 이를 보고 밝아지는 얼굴에 환한 기대감이 반짝였다. 초윤은 이 순간 자신이 웃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임사현이 귀가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