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약선이 암존을 위한 군사로 자랐다는 뜻입니까?”
“비슷하지만 달라요. 거기 쓰여 있는 걸 자세히 보세요.”
여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에 들린 종이를 꼼꼼히 읽었다. 오래된 문서는 색이 바래고 먹도 흐려진 데다 잘 알 수 없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경진(庚辰)…… 팔십오…… 신체 중하(中下), 두뇌 상중(上中), 불완전 성공? 이게 뭡니까?”
“점수를 매긴 거예요. 경진년 팔십오 번 아이, 신체 능력은 중하, 두뇌는 상중이요.”
“불완전 성공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낙인을 찍듯 붉은색 안료로 쓰인 커다란 글씨는 칙칙한 갈색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여와가 그곳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자, 희는 곧 부서질 것 같은 문서를 쏙 빼앗아 가며 말했다.
“궤멸된 조직에서 간신히 끌어모은 자료를 취합한 거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난 그걸 일종의 실험이라고 생각해요. 객관적으로 추론해 보세요, 여와. 광명교가 ‘암존’을 키워 내는 곳이라는 이야기는 저번에도 했지요?”
“예. 주기적으로 물갈이를 하여 포화된 무림을 덜어 내는 역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한 무림인들을 키워 내는 게 과연 일반적인 방법으로 가능할까요?”
복면에 가려진 여와의 아래턱이 꾹 다물렸다. 희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종이를 본래 있던 자리에 다시 집어넣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력만이라면, 그래요. 도중에 몇 명이 죽어 나가든 상관 않고 가혹한 훈련을 시킨다면야 어쩌다 얻어걸리듯 천고기재가 나올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무엇보다 ‘특별한 능력’을 가질 수 없어요.”
“……특별한 능력이라면?”
“은영암제는 그림자 속에 들어가 몸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하잖아요. 홍주귀제는 붉은 피 구슬로 귀신을 다뤘다고 했고, 광천마제는 깜깜한 밤에 하늘을 밝혔다고 전해졌어요. ……마지막 건 무슨 소리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으레 돌아다니는 과장 아닙니까. 당장 결패도 팽치정만 해도 바다를 가른다는 헛소문이 돌고 있으니 말입니다.”
들개 한 마리를 잡은 일이 산 하나만 넘어가도 백호를 사냥한 무용담으로 와전되곤 하는데 무림인이라고 다를까. 높은 경지에 다다른 무예가 목격자의 입에서 외부인의 귀를 타며 기적이 되는 경우는 이미 비일비재했다.
정보를 다루는 하오문은 특히나 이러한 생리에 익숙했기에, 여와는 모든 구전(口傳)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희가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찡그린 얼굴을 감상했다.
“사실 그게 정말이든 아니든 큰 상관은 없어요. 중요한 건 광명교가 그 정도의 무림인을 꾸준히 키워 내는 방법을 알고 있고, 약선 대협이 그곳에서 자랐다는 거예요.”
“…….”
“아마도 굉장히 힘들었겠지요? 어렸을 적부터 받아 온 세뇌를 깨고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광천마제 초월량을 공격할 정도면.”
참고로 초월량의 문서에는 ‘성공’이라고 적혀 있었대요. 덧붙이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팔십오 번이란 무슨 뜻인가. 그 이전에 팔십사 번이 있었다는 소리다. 그 이후로도 몇 명이 더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이만한 수의 아이들을 모아 성공과 실패를 따져 가며 해낼 만한 일…….
희가 손끝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먼 과거의 기억을 훑다가 현재로 돌아온 여와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지웠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무림인치고 순탄한 인생을 산 이는 없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맞는 말인 듯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그들이 어디에 새로운 소굴을 만들었는지도, 무얼 계획하고 있는지도 전부 약선 대협이 더 잘 알고 계실 거예요. 흔적을 모으는 것밖에 못하는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해 뒤쫓아 가는 게 상책이에요.”
“……어쩌면 모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설마요.”
이국의 피를 받아 새파랗게 물든 눈에 서늘한 예기가 어렸다. 붉은 입술 끝에는 비스듬한 웃음이 걸리고, 검은 머리카락이 어둑한 음영을 그렸다. 희는 여와를 응시하며 답이 정해진 물음을 던졌다.
“여와, 잊었나요?”
“……잊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외면할 수 있었나요?”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만약에, 다른 것을 전부 해 줄 테니 포기하라고 말한다면 할 건가요?”
“……그건 처음의 계약에 위배되는,”
“알아요, 알아. 그냥 해 본 말이에요. 말릴 생각도 없어요.”
명랑하게 손을 내저은 희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턱을 괴었다. 세상만사 질린다는 듯, 재미없고 무료하다는 듯 반쯤 내리뜬 눈이 냉랭했다. 뒷짐을 진 여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으로 서신 더미를 헤집던 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이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모든 아픈 경험은 좋은 기억보다 선명히 남는다는 걸 알잖아요.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고 무뎌지긴 할지언정 벗어날 순 없어요.”
“…….”
“그러니 약선 대협이 이를 모르진 않을 거예요. 대협의 껍질을 뒤집어쓴 다른 사람이 아니고서야 말이지요.”
마지막 말을 비교적 장난스럽게 끝맺은 희가 구겨진 서신 한 장을 집어 올렸다. 그 안에 간단히 쓰인 문장에 시선을 고정하며 쯧 혀를 찼다. 음울한 자책감에 휩싸여 있던 여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조그만 머릿속에 태산만 한 궁리를 품은 자를 주군으로 모시게 된 지 수 년, 빠르게 전환되는 주제에는 익숙해졌다.
“이런, 여와. 아무래도 길이 좀 엇갈린 것 같아요. 약선 대협이 오시니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지만 이건 뼈아프네요.”
「사천당문 직속 단금상단 상단주 실종」
십여 년에 걸쳐 불어난 괴리와 오해, 착각의 후폭풍은 이미 닥쳐오고 있었다. 당사자가 손쓸 틈도 없이.
◇
요녕은 풍족하나 척박한 땅이다. 토지가 기름져 작물이 풍성하지만 겨울이 길고, 광물이 풍부해 자금이 넘쳐 나지만 전쟁이 잦다. 억척스러운 성정의 사람들은 툭하면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종종 통치자가 바뀌는 탓에 절대적인 소속감도 희박하다.
그러니 활기차게 번화한 무역 도시 광동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내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람, 사람, 웃고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요녕과는 자그마치 칠천 리가 떨어진 탓일까, 오가는 언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 요녕성에서는 죽기 전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희귀한 물건이 옥수수 한 되 값에 팔리고, 발에 채도록 흔했던 물건은 특산 한정품으로 둔갑해 경악스러울 가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 바다와 강을 낀 탓일까, 광동성은 유난히 독특한 먹을거리가 많았다. 여정 내내 건량으로 끼니를 때운 무사들이 연신 군침을 삼켰다. 길거리 가게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섞인 김이 폴폴 올라왔고, 식당과 주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문전성시였다.
배가 고픈 건 두 번째 삶을 사는 이도 마찬가지였다. 살아온 시간을 합한다면 중년을 넘어가는 모용서 또한 이런 모습의 광동성은 처음이었다. 아우의 설렌 얼굴을 오랜만에 본 모용단이 말했다.
“서제, 마음에 걸린다면 잠시 들렀다 가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형님. 저잣거리가 이 정도라면 하오문은 더 엄청날 거예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최고를 맛보고 싶네요.”
“…….”
예고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온 불청객이 그만한 대접을 바라도 될까. 한량이라고 평가받는 모용서와는 다르게, 늘 예의와 도리를 중시하는 모용단으로선 살짝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와 버린 이상 다른 방도는 없었다.
모용단은 대신 오는 내내 누누이 강조했던 것을 한 번 더 입에 담았다.
“노파심에 같은 말을 다시 하겠습니다, 서제. 나는 당신의 자유로운 면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큰 무례를 저지르고 있으며, 하오문주 희는 우습게 볼 자가 아닙니다.”
“예, 형님. 알아요.”
“예상대로라면 곧 만나 뵙게 될 분은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계획에 동참한 것은 이쪽이니 모든 책임을 당신에게 묻진 않을 테지만, 남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태도는 삼가야 합니다.”
“물론이죠.”
모용서가 쾌활하게 대답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이복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용단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그저 믿고 준비해야 했다.
고개를 들자 하오문일 게 분명한 건물이 멀찍이 시야에 들어왔다. 금색과 붉은색으로 칠한 기와,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처마, 겹겹이 쌓아 올린 으리으리한 구조물이 궁을 연상시켰다. 눈을 가늘게 뜨자 웅장한 입구 앞에 기다리듯 나와 있는 인물이 어렴풋이 보였다. 검은 무복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이는 손에 무언가 커다란 막대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아니, 저건…… 활인가?’
설마 하는 마음에 모용단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러자 그 사람은 들고 있던 활에 시위를 메긴 뒤 망설임 없이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흡,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저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던 화살 한 자루가 무서운 속도로 공기를 찢고 내리꽂혔다. 이 대낮에, 민간인도 있는 거리를 향해, 하오문에서 나온 사람이 활을 쏘았다. 어지간히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굳어 있던 것도 찰나에 불과했다. 모용단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나란히 걷던 모용서가 한 손을 올려 빠르게 형의 움직임을 멈추었고, 이윽고 낙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짤막한 비명 소리와 경악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바람 같은 파동이 번지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때맞추어 불어온 바닷바람이 텁텁한 황진을 안고 사라졌다.
그 속에서 드러난 천보도 임사현은 울기 직전의 얼굴로 정수리에 꽂힐 뻔한 나무 화살 한 자루를 간신히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