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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19)화 (119/257)

119화

혼선은 짧았다. 흠칫 정신을 차린 초윤의 머릿속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의지’뿐, 초윤은 어떠한 이상조차 느끼지 못하고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애당초 아는 자가 그다지 없기도 하고, 있다 해도 의심에 불과하거나 속세에 나올 입장이 아닌 이들이다. 이제 와선 확실치 못한 소문을 이유로 나를 쫓을 간 큰 인물은 없다.”

사실 그리 장담할 순 없었지만 천오에게 확신을 주는 게 중요했다. 12년을 살면서 문제가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초윤 스스로도 어느 정도 경각심을 갖고 있기에 남들 앞에서 대놓고 이 능력을 쓰는 일은 의식적으로 기피해 왔다. 더군다나 명색이 현경인데 알맹이가 다른 사람이라 해도 나 하나쯤은 지킬 수 있겠지, 싶은 평화로운 안일함 또한 태평한 태도에 한몫을 했다.

서신을 접어 끈으로 봉하며 말을 이어 나가던 초윤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시선을 들었다. 마주 앉은 천오가 새까만 눈으로 이쪽을 ‘관찰’하고 있었다.

초윤의 손톱 끝이 무의식적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본인조차 미처 감지하지 못한 초조함이 몸의 말단부터 스멀스멀 엄습했다.

하지만 ‘내가 키운 아이에게 이따위 위기감을 느낄 리 없다.’, 오로지 이 무의식 속 강박적인 방벽 하나만이 초윤의 추측을 매번 엇나가게 만들었다. 발톱을 감춘 범처럼 의도를 숨긴 질문은 매끄럽고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스승님은 어떠한 연유로 그런 체질을 갖게 되신 겁니까? 약초를 다량 섭취하며 높은 경지에 이르면 그리됩니까?”

“아니,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나는 우연에 불과한 경우니…….”

훌륭한 선생님 역할에 걸맞게 성실히 답하던 초윤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잘만 떠오르던 ‘초윤’의 기억이 갑자기 틀어막힌 듯 깜깜하기만 했다.

이건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나 보지. 짧은 한숨으로 찝찝한 기분을 털어 낸 초윤은 서안을 정리하며 말했다.

“이만 눕거라. 시간이 늦었다.”

“……예, 스승님.”

약간의 뜸을 두고 공손히 대답한 천오가 자리를 떠났다. 붓과 벼루를 제자리에 돌려 놓고 다 쓴 서신을 챙긴 초윤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움직임을 멈췄다. 때맞춰 열어 둔 창문으로 불어온 바닷바람이 등잔불을 꺼트렸다. 타 버린 심지에서 연기와 기름 냄새가 피어올랐다.

왜 이렇게 모든 일이 전조처럼 느껴질까. 십 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제자들을 보러 가는 즐거운 여행, 다 큰 제자를 졸업시키는 뜻깊은 여정인데. 분명 중간까지는 마냥 마음 편히 좋았던 것 같은데 무엇을 계기로 이렇게 불안해진 걸까.

지금은 아무리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았다. 초윤은 한숨을 폭 쉬고 책상 옆에 있던 새장을 열었다. 하얀색의 고운 깃털을 가진 비둘기 한 마리가 쫑쫑 나와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초윤은 봉인한 서신을 전서구의 다리에 잘 묶은 뒤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훈련을 받은 비둘기는 탁 트인 밤하늘 위로 날아올라 금세 사라졌다.

모든 게 기우였으면 좋겠다. 초윤은 부질없는 바람을 빌고 등을 돌렸다. 그 뒤로 창문이 닫히며 세상을 차단했다.

우기의 광동성은 뜨거운 햇볕과 습한 공기,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빗줄기로 지옥에 가까웠다. 내륙의 산 깊은 곳에서 수년을 자란 임사영은 이 시기만 되면 치솟는 불쾌지수로 예민하기 짝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땐 광동성의 빈민가에서 더운 줄도 모르고 근근이 살았다만, 시원하고 쾌적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되자 매년 몇 달이 정말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오늘은 더 내릴 것도 없는지 하늘이 맑은 편이었다. 사영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손에 든 서신을 와락 구기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런 미친놈……. 이 중요한 걸 이제 와서…….”

“뭔데? 현아가 보낸 거 아이가?”

옆에서 사영에게 부채를 부쳐 주고 있던 장위가 고개를 기울여 구겨진 서신을 힐끔 보았다. 바득바득 이를 갈던 사영은 이거 보라는 듯 책상에 대고 편지를 다시 좍좍 펼치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 미친놈이 지금, 도착하기까지 닷새도 안 남았는데, 갑자기 모용세가 떨거지들을 달고 광동성에 들어오는 중이라 하잖아! 이걸 이제 와서 말해 주면 어떡해!”

“모용세가 떨거지?”

“모용단과 모용서!”

“그…… 그건 떨갱이는 아인 것 같은데.”

보통 한 세가의 소가주와 그의 동생을 떨거지라고 하나? 점점 험해지고 있는 사영의 입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장위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든 말든, 장위의 부채질이 무색하도록 사영의 부아는 점점 더 뜨겁게 치밀고 있었다.

“이게 왜 지금 임사현의 손에서 내 귀로 들어오는 건데? 호남의 멍청이들은 지금까지 뭐 했어? 예정대로 호북에서 갈라진 게 아니라면 재깍재깍 보고를 했어야 할 거 아냐!”

“그…… 내 함 상덕이랑 영주에 연락해 볼게.”

“그쪽 인간들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임사현 이 자식이 제일 어이가 없어! 도대체가 얘는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모용서랑 친구를 먹더니 아주 동네 부잣집 아들 정도로 보이나 보지? 무려 중원을 종단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퍽이나 그냥 여행이겠다!”

아, 이거 큰일 났다. 내가 가라앉힐 수 있는 화가 아니다. 사영의 성질을 딱 잡아 누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문주님도 출타 중이시니 답이 없다. 장위가 금방 재가 될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사영의 민감한 청각이 가까워지는 새의 날갯짓 소리를 잡아냈다. 열어 둔 창문에 놓아두었던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리고, 갈색 비둘기 한 마리가 창틀에 내려와 앉으며 꾹꾹 울었다. 사영은 잠시 화내는 것을 멈추고 비둘기의 가느다란 다리에 묶인 서신을 꺼내 들었다. 그 뒤로 장위가 들릴 듯 말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냉정해진 얼굴로 조그만 종잇조각에 적힌 글씨를 읽던 사영이 말했다.

“혜주시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리지?”

“걸어가 사흘쯤 걸리나? 마차 타모 하루 반이지.”

“이런 제기랄!”

“아니, 대장!”

짤막한 욕설을 내뱉은 사영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기겁을 한 장위가 창틀을 잡고 밑을 내려다보며 사영을 불렀다. 벽과 처마를 타고 날렵하게 바닥에 착지한 사영이 장위를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작은 비명을 질렀다.

“상덕이랑 영주의 그 무능한 인간들 잡아 족치는 거 잊지 마!”

“아니, 어데 가노!”

“마중하러!”

사영은 그 말만 남기고 서둘러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려 말 두 마리의 고삐를 잡은 사영이 자신의 애마를 타고 하오문의 담벼락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멀어지는 등과 세 마리 말을 아연하게 보고 있던 장위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렇게 좋을까 싶다가도, 자신이 본 그때의 그 사람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게 문제였다.

아무래도 혼자 여행할 땐 이동 수단을 하나 마련해야겠다. 초윤은 슬슬 몸을 불리는 부담감을 느끼며 결심했다.

바다 도시를 지날 땐 괜찮았다. 운이 좋으면 마차를 빌려 탔고, 번화가에선 삯을 지불하고 탑승했다. 사실 공기 중 습도가 95%를 상회하고 흉기 같은 직사광선이 아무리 내리쫴도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를 진작 넘어선 무림인의 육체는 늘 쾌적했다. 초윤의 육체가 가진 특징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장점이었다.

문제는 마차를 끄는 사람이었다.

돈을 낸다고는 하지만 이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내륙의 땡볕 아래에서 내내 일을 시키는 것은 역시 못 할 짓 같았다. 하물며 손님 두 명이 다 더위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데, 이런 사기에 가까운 편리함을 누리지 못하는 일반인이 저 바깥 자리에 앉는 것은 불공평해 보였다.

마음을 정한 초윤은 마차를 세우고 안에서 내렸다. 본디 주기로 했던 품삯에 덧돈을 붙여 넉넉히 지급한 뒤 이만 돌려보냈다. 사영이가 있는 광주시에 가까워지자 괜히 조급한 마음에 마차를 타긴 했다만, 여기서부턴 그냥 걸어가는 게 나을 듯했다.

광주시는 지금껏 지나온 도시 중 단연코 가장 화려했다. 하오문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런지, 다른 곳에서는 하나같이 찌든 얼굴만 하고 있던 하층민들이 나름 활기찬 표정으로 각자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초윤은 시장에 늘어선 노점에서 새우가 들어간 만두튀김을 사 천오의 손에 쥐여 준 뒤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언제 어색했냐는 듯 괴상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그만둔 천오는 복스럽고 깔끔하게 간식거리를 받아먹으며 초윤을 따랐다.

그때, 멀리서부터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익숙한 기운을 느낀 초윤이 자리에 멈칫 멈춰 섰다. 뒤이어 감각이 예민한 천오도 이를 알아챘는지 사람으로 가득 차 잘 보이지 않는 지평선의 한 점을 바라보았다.

“오고 있구나.”

“조금이라도 빨리 스승님을 뵙고 싶었나 봅니다.”

벅찬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장 달려가지 못하는 건 어디까지나 ‘초윤’의 몸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었던 것은 초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을 타고 질주하던 사람이 인파로 가득한 거리를 보곤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이쪽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는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고삐를 대충 노점상의 기둥에 묶어 놓고 이쪽으로 황급히 달려오는 발걸음엔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스승님!”

8년 만에 만나는 제자는 어느새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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