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비가 잦아들고 다시 여정을 시작하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동안 형편이 마땅치 않은 집에 의탁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초윤은 약함을 털어 신세를 진 가족 구성원 여섯 명의 건강 상태를 개선하는 데에 힘썼다. 떠날 즈음엔 관절염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던 할머니가 걸어 나와 배웅을 해 줄 정도였다.
천오가 독립하면 돌아갈 방도를 찾아보겠다 결심하긴 했지만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짐작 가는 실마리 하나 없었다. 기껏해야 주인공 근처에서 얼쩡거리거나 스토리가 끝날 때까지 버텨 보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러나 원작 스토리의 주축을 이끌고 나가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주천오가 이렇게 훌륭히 자란 이상 본래 알고 있던 엔딩을 기대하긴 어려울 테고…… 결국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는데, 가는 곳마다 마음이 약해져서 약이고 뭐고 다 퍼 주고 있으니 괜찮을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산에서 내려올 때마다 큰일 하나씩은 꼭 터졌는데, 과연 주인공의 행보를 조용히 쫓아다니며 지켜볼 수 있을까? 도무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천오와의 여행이 먼저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제자는 스승이 딴생각을 할 수 없게끔 신경을 잡아끄는 재주 또한 특출한 것 같았다. 그리 판단하게 된 발단은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어쩐지 미묘한 분위기의 대화가 오간 다음 날의 천오는 지극히 평소와 같았다. 그날 밤을 통째로 샜던 초윤과는 정반대였다.
도대체 ‘이만 괜찮다’의 뜻은 뭐고, 자신을 치료해 줄 것이냐 물어본 이유는 뭘까?
그리고 대체 왜…… 천오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대체 왜 새삼스럽게 의식되지?
온갖 답 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미 동이 틀 시간이었다. 더 이상 수면이 필요 없는 편리한 몸이긴 했지만 정신적 피로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천오는 그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초윤의 어색함도 그에 맞춰 조금씩 사그라졌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예민했던 것 같다며 왠지 모를 죄책감까지 느껴 버렸다.
그렇게 다시 길을 떠난 후에 완전히 마음을 놓아 버린 것이 초윤의 가장 큰 실수였다. 사냥을 할 때는 상대가 안심한 틈을 타서 급소를 노려 치명타를 입혀야 한다고 가르치질 말 걸 그랬다.
“녹림왕이 스승님의 존체를 섭취한 것은…… 경합 도중 스승님께서 고독을 죽이신 그때가 맞습니까?”
“음? 맞다.”
초윤을 뒤흔든 천오의 첫 번째 질문, 눈을 뜬 채 꼬박 새웠던 지난밤을 합한다면 네 번째가 되는 물음은 오룡강(烏龍江)을 건너는 도중 뜬금없이 날아왔다.
강이라고는 하지만 바다로 이어지는 민강으로 갈라지는 곳을 건너게 된 탓에 폭이 장장 4리에 달했다. 경공으로 물 위를 박차고 달릴 수 있다고 해도 괜히 시선을 끌긴 싫어 배가 뜨는 시간을 기다렸다. 아직 불안정한 수면을 조그만 나룻배로 웃돈까지 주며 넘어가는데, 딱 중간 지점까지 왔을 때 얌전하던 천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에게도 혈액을 주셨습니까?”
“아니, 그자는 고독을 죽인 충격만 가라앉히면 되니 타액을 썼다.”
‘초윤’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꺼내 썼던 몇 안 되는 경험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한테 보이면 큰일이 날 게 분명하니 절묘하게 가리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났다. 숨결을 이용할 때도 그랬지만, 화경을 넘은 무림인은 초능력자에 가깝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백호철은 어떻게 됐을까? 사천당문의 뇌옥에 갇혀 있던 걸 희가 회수했다고 했는데…… 뭐, 상관없나. 주인공의 전투력 측정용 조연이 두 번 이상 나올 확률은 희박하니까.’
초윤이 언제나와 같이 남의 집 어른에겐 냉담히 굴고 있을 때, 폭탄은 우리 집 아이에게서 덩그러니 떨어져 나왔다.
“……입 맞추셨습니까?”
“……지금 뭐라고 했느냐.”
순간 아연해진 기분으로 천오를 보자, 조그만 배의 한구석에 앉아 있던 천오는 잠시 눈치를 살피듯 초윤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스승의 말에는 반드시 대답을 하던 아이가 입까지 꾹 다무는 것을 보니 굉장히 의기소침해하는 것 같아 아예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건가?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첫사랑이 누구인지 첫 키스는 해 봤는지 물어보는 그런 건가? 아니,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울적하게 물어보는 거야? 그리고 왜 하필 그런 비위생적인 산 도적을…….
뒷짐 지던 손을 들어 잠시 이마를 짚은 초윤은 마음을 가다듬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셨습니까?”
“턱을 쥐어 입을 벌리게 한 뒤 그 안에 뱉었다.”
아, 그런 방법이 있구나. 얼굴을 보니 천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아무래도 천오는 치료를 위해서라면 아무하고나 접문을 하고 다니는 초윤을 상상해 버린 듯했다. 산속에서 폐쇄적으로 살면서 초윤이 알려 준 기본적인 지식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탓일까. ‘애정의 표현 중 하나’라고 가르친 입맞춤을 스승이 남발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면 저렇게 반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초윤은 천오의 심정을 나름대로 파악했다 생각한 뒤 다시 안심해 버렸고, 그 대가로 얼마 뒤 또 다른 폭탄을 직격으로 맞아야 했다.
“사형도 그자와 같은 방법으로 스승님의 타액을 섭취했습니까?”
교역으로 번화한 복건성 천주시의 부촌, 하오문의 별저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게 된 초윤은 호롱불에 기대 빠르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태풍에 발이 묶여 조금 늦었다, 며칠 내로 도착할 것 같다, 사현이는 먼저 왔냐 등의 문장을 써 내려가던 초윤의 손이 우뚝 굳었다. 초등학교 4학년생 30명이 한꺼번에 집요히 사생활을 취조하려 든다 해도 지금보단 압박감이 덜할 것 같았다.
초윤은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고, 평온함을 가장하며 편지를 마무리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와 동요하지 않는 표정이 요즘 들어선 정말 다행이었다.
“네 사형제의 사적인 일이라 자세히 알려 줄 순 없다만, 그때는 타액이 아니라 혈액을 썼다.”
“그럼 자상(自傷)을 하셨습니까?”
“손을 쥐어 피를 짜냈으니 자상이라 할 것까진 아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내 몸을 분석하거나, 이 체질을 네 몸에도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불경한 것을 바라진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뭐가 궁금한 거니?
서신을 다 쓴 초윤이 붓을 내려놓고 종이 위로 후 입바람을 불었다. 빠르게 마르는 먹물을 확인하고 시선을 들어 맞은편의 천오를 보았다. 의아한 마음에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궁금해서 여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송구할 것까진 아니다. 그런 것을 계속 물어보는 연유가 알고 싶을 뿐이지.”
질문을 던져 놓고서 역으로 초윤의 심기를 살피던 천오는 희미하게 금이 간 초윤의 표정에 금세 풀이 죽었다. 저렇게 하나하나 일희일비를 하니 제대로 추궁을 할 수도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돌겠구나…….
하지만 저렇게 침울한 얼굴로 모르겠다는데 어쩔 수 있나. 질문이라는 건 언젠가 바닥이 나기 마련이고,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라 당황스러울 뿐 대답하는 게 곤란한 건 아니니 당분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는 듯했다.
“무엇이든 궁금증이 생긴다면 답해 줄 수 있는 이에게 묻는 게 맞다. 다만 궁극적으로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인지 천천히 고민해 보거라.”
“……정말 여쭈어도 되는 것입니까?”
“……못 할 것도 없지.”
머릿속 경고등이 왠지 웽웽 울리고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객관적으론 천오의 질문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이곳에 온 뒤로 한 것이라곤 전력을 다한 육아뿐이었으니 거리끼는 구석도 숨길 경험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소설 빙의’나 ‘악역’이나 ‘돌아갈 방법’ 같은 건 함구를 해야겠지만…… 천오가 내내 던진 질문의 방향성을 보면 이런 세계의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닌 듯했다.
여기서 초윤은 한 가지를 또 간과해 버렸다.
“스승님의 체질에 관해 알고 있는 자들은 전부 죽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다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누구이며, 정확히 몇 년이 지난 겁니까? 스승님에 관한 일을 기록했거나 다른 이에게 알리진 않았을까요?”
초윤이 낱낱이 기억하는 시간은 ‘하윤’이 들어온 이후의 12년뿐이며, 그 이전 ‘초윤’의 과거는 딱히 전부 꿰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답하는 게 곤란한 건 아니라 생각하고, 못 할 것도 없다 말하자마자 어려운 질문을 받아 버렸다. 어쩜 이렇게 매번 예상을 벗어나는 제자를 두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초윤’의 기억은 격발하는 사건이 있어야만 연쇄 작용처럼 머릿속에 들어왔다. 자신이 아니라 남의 인생이니 사천당문에 갔을 때처럼 큰 사건이 벌어진 게 아니라면 구태여 떠올리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건 초윤만의 사정이었다. 천오에겐 지금의 초윤이 전부일 터.
‘그래도 내가 걱정돼서 물어본 것 같네. 입맞춤은 좀 논점에서 어긋난 것 같지만, 뭐……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폭 한숨을 쉰 초윤은 곧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제 것이 아닌 기억을 더듬으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물며 약선처럼 산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면 더욱이.
“정확한 경과는 모르겠지만 족히 백 년은 넘게 지났을 게다. 아니, 애당초…….”
-하여간 너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자라기 짝이 없구나. 이 형님이 없으면 어찌 살아가려고?
순간 한 줄기의 환청이 초윤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갓 올라온 새순의 풋풋한 향, 나뭇잎 사이를 헤엄치다 밀려온 바람의 냄새, 손등을 간질이던 나무껍질색 머리카락과 경쾌한 웃음소리.
당장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한 감각들이 한꺼번에 초윤을 덮치고, 또 누군가 황급히 앗아 간 것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망연히 앉아 있던 초윤의 입에서 누구의 의지인지 모를 목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던, 그대로 묻혀 있어야만 했던 먼 과거의 이름이었다.
“……월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