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사영은 약간의 간극을 두고 되물었다.
“예?”
“사현 소협이 삼보대회에서 아주 극적인 승리를 거머쥐었어요. 보는데 정말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니까요? 얼마나 꿋꿋하고 착실하고 예의 바른지 고지식한 도사들도 전부 기특하게 여기더라고요. 천보도는 우승자의 특권으로 얻은 별호인데, 다른 이름도 많이 붙었어요. 태산처럼 묵직하고 신중한 일격을 내지른다고 온중공자, 아무리 다쳐도 쓰러지지 않는다고 불괴…….”
“잠시만, 잠시만요.”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깍듯하게 거리를 두던 말투도 무너졌다. 사영은 한 손을 올려 막힘없이 쏟아지던 희의 말을 멈추고 다른 손으로 양쪽 눈꺼풀 위를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난 지금 선잠에 든 게 아닐까. 원래 얕은 잠에 들면 괴상한 꿈을 꾸잖아. 차분히 생각하던 사영이 물었다.
“현아는…… 결패도 대협을 따라 장강으로 백 일 단련을 나선 게 아니었나요?”
“맞아요! 그런데 팽 대협이 워낙 충동적인 면도 있잖아요? 호남으로 갔더니 다들 삼보대회만 얘기하고 있어서 불쑥 호언장담을 해 버렸나 봐요. 그대로 섬서성에 올라가서 참가하게 된 것 같아요. 임 소협 덕분에 팽 대협의 기분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니까요. 아, 맞다. 그런데…….”
“아니, 아니, 잠깐만요.”
사영은 재차 희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희는 흐뭇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귀가 시끄러웠다. 아니, 머리가 복잡했다. 밀려들어 오는 정보량이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초과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롭게 알게 된 건 ‘동생이 삼보대회에서 이겼다’뿐이었지만,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결과가 도출된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화는 한참 뒤에야 간신히 이어졌다.
“걔가…… 이겼다고요?”
“네, 한 번도 안 지고 1등을 했어요! 조금 다치긴 했지만 금방 나을 수 있는 상처였어요. 약선 대협의 금창약도 갖고 있었고요.”
“걔가 지금…….”
“임 소협은 정말 엄청났어요. 그 뒤로 팽 대협을 따라 요녕에 올라가게 됐으니 돌아오는 시기는 아무래도 늦어질 듯해요. 어쩌면 몇 년을 하북팽가에서 보내게 될 수도 있고…….”
“아니, 걔가 언제 그렇게…….”
얼굴을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하던 손이 입가를 가렸다. 하도 놀란 탓에 손끝이 차가웠다. 사영은 미간을 찡그린 채 책상을 노려보다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임사현이…… 내 동생이 무림 대회에서 온갖 쟁쟁한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제치고 이겼다고?
그럴 수가 있나?
사현은 상냥하고 온순하며 순진했다. 물론 몇 년 사이 징그러울 정도로 쑥쑥 자라긴 했지만 사영에게는 여전히 서투르고 유약한 동생이었다. 귀빈 대접을 받으며 하오문에 머물렀던 결패도 팽치정의 눈에 들어 수제자로 들어가게 되어도, 매일 우는 소리를 내며 버거운 수련을 해도, 그 결과로 점점 강해지고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져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강해지는 동생을 질투한 적 역시 없었다. 사영은 사현과 무공을 겨룰 생각도, 모든 면에서 동생을 앞질러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무공이 자신의 특기라고 여기지도 않았을뿐더러 오직 무력으로만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사현이 강해질수록 사영은 안심할 수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그렇긴 했는데…….
동생이 강해지는 것과…… 강해진 동생이 갑자기 중원을 제패하고 돌아오는 건 좀 다르지 않나?
이 느닷없는 부조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이렇게 표현하는 것치곤 동생을 거칠게 다루긴 했지만 이건 아끼는 것과 별개로 남매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켜 온 강아지가 실은 우락부락한 멧돼지였다는 걸 알게 된 기분이었다. 지지난달까지만 해도 힘들어 죽겠다며 징징거렸던 놈이 뜬금없이 천보도에 온중공자 소리를 듣고 있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쁘지 않다. 그래, 희의 말마따나 축하할 일이다. 사현이 몇 년에 걸쳐 노력하는 걸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봐 왔기 때문일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 동생이라면 응당 그럴 법도 하다는 비논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손으로 가리고 있던 입꼬리는 히죽 올라갔다. 스승에게 보낼 서신에 이 일을 쓸 것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들떴다. 사영은 애써 자세를 가다듬고 우아하게 말했다.
“그 아이가 우승을 할 정도라면 현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상정했던 기준을 밑돌았나 봅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소저밖에 없을 거예요.”
절대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 기절초풍을 한 것도 모자라 원흉인 희까지 쿡쿡 웃고 있으니 속이 살짝 비틀리긴 했지만 기분은 이미 풀려 버린 지 오래였다. 아닌 척 대꾸해 봤자 먹히지 않을 게 빤했다. 아무래도 희는 겉으로야 어떻든 이 소식에 가장 기뻐할 사람은 사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영은 자신에게 불리한 화제를 능숙히 돌렸다.
“결패도 대협과 함께 요녕에 가게 된 거라면, 현아는 정식으로 하북팽가 소속이 된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하북팽가에 머무르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팽 대협의 제자로서 신세를 지는 거지 팽가에 들어갈 순 없다고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걸 들었거든요. 하나뿐인 누님이 하오문에 의탁하고 있어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고 하던데요?”
“핑계는……. 음, 현아가 지닌 내공은 스승님의 심법에 기본을 두고 있으니 여타 무림인과 비교하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아, 확실히. 어느 정도 연륜 있는 도사들은 사현 소협의 내공이 지극히 정순하고 막대하다고 감탄했어요.”
두망산을 내려온 뒤에야 스승이 무림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된 사영은 자신과 동생이 약선의 제자라는 사실을 세간에 밝히고 싶지 않았다. 평생 문하를 만들지 않던 약선 초윤의 가르침을 받은 남매에게 응당 쏟아질 관심과 후폭풍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다. 일신의 능력이 한참 모자란 지금으로선 희의 그늘 밑이 비교적 편리하게 느껴졌다.
새파란 눈을 굴리며 검지로 뺨을 톡톡 두드리던 희가 곧 활짝 웃었다. 약간 긴장한 채 그의 판단이 끝나길 기다리던 사영은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약선 대협과 사현 소협을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팽 대협도 모르는 듯했고, 약선 대협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보다는 우연히 영약을 찾아 먹게 되었다는 게 더 현실성 있잖아요? 약선 대협이 무공을 쓰시는 모습을 본 사람도 지금 시대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요.”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하긴, 사영도 스승의 검법을 본 건 단 두 번밖에 없었다. 스승의 내공을 선명히 느껴 본 적도 없었고, 주 무기가 검이라는 사실도 하오문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스승은 무공을 아예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단전 자체가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특유의 정결한 공기는 심법의 효과보다는 스승 본연의 기운 같았다.
그렇지만 스승님께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절로 의구심이 들긴 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약선 초윤과 자신이 알고 있는 스승의 양상이 확연히 다르니 어쩔 수 없었다.
스승은 분명 누군가를 가르치고 키우는 데에 능숙해 보였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긴 해도 말 한 마디와 손짓 하나에서 묻어나던 배려를 보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다지 무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정성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 하나하나의 체질에 맞추어 매일같이 약욕과 약식을 준비할 수가 있나.
산속에서 홀로 지내시는 동안 입에서 입을 거쳐 와전된 정보가 얼마나 퍼진 건지. 스승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소문만 믿고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을 들으면 가끔은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아무튼, 가장 먼저 떠오른 걱정은 전부 해결했다. 하오문의 요녕 지부가 생긴 지도 꽤 되었으니 그쪽으로 편지라도 한 통 보내야겠다. 오래 머물게 된다면 이쪽에 두고 간 짐도 정리해서 보내 주고. 사영은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뿌듯하게 입을 열었다.
“쉴 틈도 없으리라 하신 이유는 역시 뒷수습 때문입니까? 난데없이 나타난 아이가 우승을 한 일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만 있진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것도 있지만 소저가 할 일은 다른 거예요. 사실 이번 삼보대회는 이상한 점이 많았거든요. 아니, 섬서성의 분위기 자체가 영 미심쩍었달까. 원인으로 추정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마침 요녕에 살고 있는데…… 사현 소협과 이미 안면을 튼 것 같더군요. 천운이 따랐어요.”
“예?”
그렇다면 사현이가 위험한 것 아닌가? 불안한 마음부터 들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희는 그림자처럼 미동도 없이 대기하던 여와를 불러 백지를 가져오게 하고 붓을 들었다. 기뻐하던 것이 언제냐는 듯 안절부절못하던 사영은 가까이 오라는 희의 부름에 서둘러 다가가 마주 앉았다. 걷지 못하는 희 대신 사영이 움직이는 일은 흔하디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