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저는 스승님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약학이나 검법을 떠나 어떻게 걷는지, 어떻게 뛰는지, 어떻게 먹는지, 어떻게 숨 쉬는지, 어떻게 잠드는지…….
자신의 일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 당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말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목소리는 다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직접 보지 않아도 손등 위로 들러붙는 새까만 눈동자가 느껴졌다. 초윤은 한순간 서늘하게 심장을 스치고 지나간 이질감을 착각으로 치부하며 애써 이야기에 집중했다.
“언젠가 제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잠시 스승님의 곁을 벗어난다 해도, 그 여정에서 수많은 사람과 엮여 변화한다 해도 제 기저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모든 언행에서 스승님의 흔적이 묻어날 것입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이 곧 저라는 결과물로 나타날 것입니다.”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며 점차 확신을 더했다. 서문천오에게 그의 스승은, 스승과 함께 보낸 나날은 겉가죽에 얄팍하게 찍히는 낙인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천오의 본질을 조형했다. 제멋대로 우그러지고 비틀린 것을 맨손으로 잡아 빚었다. 미지근한 체온으로 녹이고 지닌 양분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새겨진 지문을 선명히 느낄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서문천오 본인이었다.
“그렇기에 저는…… 증명하고 싶습니다. 저 스스로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고 싶습니다. 스승님께서 제게 쏟아 주신 시간이, 정성이 헛되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습니다. 저를 거두신 스승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
“어린아이 하나를 상대하면서도 이만큼이나 당해 버렸으니 아직은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갈 길이 멀긴 뭐가 멀어! 너 걔 죽일 뻔했잖아!
천오의 말에 울컥한 것도 잠시, 가만히 말을 곱씹다 보니 다른 의미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자마자 둘을 떼어 놓느라 싸우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지 못했고, 천오가 다친 것에만 신경이 쏠려 싸움의 행방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알고 있었다. 천오의 공격을 막아 낸 당사자로서 알 수밖에 없었다.
초윤이 막지 않았다면 모용서는 오늘 그 자리에서 죽었다.
겨우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자 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 녀석이 겉으로 보기에만 열한 살이지, 속은 지금 마흔이 넘어 닳고 닳은 무림인인데! 회귀한 지 4년이 넘었으니 요녕에서 온갖 영약은 다 찾아 먹고 숨겨진 비급도 다 찾아 익혔을 텐데!
‘그런 사람을 검도 아닌 맨손으로 두들겨 팬 거잖아? 내가 지금 뭘 키우고 있는 거야?’
주인공이 검기를 쓸 수 있는 경지인 절정 고수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천오의 상처로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절정 고수가 무엇인가. 웬만한 문파의 장로 자리는 떡하니 차지할 수 있는 실력자 아닌가.
그런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을 주먹 하나로 이겨 먹은 서문천오…….
무협지의 주인공 정도 되면 지루할 수 있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쉽게 넘어갔을 뿐, 사실 내부에 쌓은 무형의 내공을 물리력을 가진 유형의 무기로 쓰는 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세상의 기운이 무슨 중금속도 아니고 ‘내부에 쌓는다’는 과정부터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빙의한 시점에 ‘초윤’의 몸이 이미 이를 밥 먹듯이 해내는 노련한 무림인이 아니었다면 상식에 얽매여 있는 정하윤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무공을 익힐 수 없을 터였다.
오랜만에 천오의 성장 속도가 무섭게 느껴졌다. 얼렁뚱땅 몸만 현경이지 정신적으로는 일반인에 가까운 초윤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선생 노릇을 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8년이면 오히려 오래 가르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니 천오의 스펙도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우리 천오는 회귀하진 않았지만 하늘이 내린 천재지……. 영약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듬뿍 먹었고, 비급 대신 살아 있는 무림 고수가 매일같이 일대일 맞춤 케어를 해 주고 있구나…….’
답안지를 알고 있는 독종과 개인 과외를 받아 온 천재의 대결이었다. 게다가 그 천재의 과외 선생님은 독종이 모르는 답과 해설까지 알고 있었다. 원작의 스토리라인은 어긋난 지 오래였지만 누가 어떤 야욕을 품고 있는지, 언제 무엇이 터질 예정인지만 기억해도 아예 모르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이렇게 된다면 주인공이 천오에게 지는 것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구나……. 초윤은 불길한 예감을 간신히 억누르며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도 주인공에겐 그 까마귀 신물이 있으니까…… 어, 근데 잠깐만.’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귀환영웅>의 시작 부분에서, 주인공은 7살의 몸으로 깨어나 혼란스러워하던 와중 목에 걸려 있던 신물을 발견하고 자신의 기억이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 뒤로 쭉 신물을 지니고 다니며 까마귀 모양의 목걸이는 곧 주인공의 상징이 되는데…….
‘가슴에 있는 수혈을 짚을 때 신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다른 곳에 매달고 있었나? 아니면 놓고 왔나?’
먼젓번 생에서 형 모용단이 남긴 유일한 유품이며 인과를 무시한 기회를 안겨 준 신물을 떼어 놓고 다니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터라 영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곧 들려온 천오의 목소리가 초윤의 고민을 뚝 자르고 주의를 잡아끌었다.
“주제넘은 발언일 수 있으나…… 스승님께서 제 성취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자라든, 무슨 일을 하든 변함없이 저를 아껴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
“그러니 이것은 제 이기심입니다. 제 욕심이며 의존입니다. 저는 스승님의 제자로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더욱 강해지고 싶습니다. 저의 승리가 곧 스승님의 승리기에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습니다.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스승님께서 낫게 해 주시리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특하고 사려 깊은 말의 한구석이 스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구태여 드러내지 않은 진심이 수줍은 자백보다 거대하기 때문이다. 수면 아래로 육중한 밑동을 숨긴 채 소담한 일각만 피력했기 때문이다.
이를 직감했지만 형용할 수 없었다. 절절한 진심 너머 도사린 것을 감지해도 밝혀낼 순 없었다. 조금만 더 물어본다면, 조금만 더 들추어 본다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약을 바르고 붕대를 덧댈 테니 얌전히 있거라.”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말하자. 돌아가서, 나중에.
초윤은 제대로 된 대답 대신 천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화제를 돌렸다.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마음에 상황이라는 변명을 내세우며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있단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
희미하게 의식이 떠오르자마자 기침이 솟구쳤다. 숨을 들이마실수록 건조한 가루가 들어와 비강에 들러붙었다. 내용물을 모조리 게워 낼 것처럼 연신 쿨럭거리며 늘어진 팔을 들자 허술하게 몸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덩그러니 떨어져 나갔다. 바닥을 뒹구는 낡은 자루에 시선을 줄 겨를도 없이, 모용서는 제 입과 코를 틀어막고 침을 삼켜 마른 목을 적셨다. 그렇게 한참을 진정한 뒤에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외진 골목의 담벼락이 그늘을 만들었다. 그 아래서 위를 보자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픈 곳은 없지만 어째선지 온몸이 녹진녹진했다.
손끝과 발끝을 움찔거리며 감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도중, 이 낯설지 않은 느낌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점혈을 당했구나.
누구에게?
모용서에게 기억은 산처럼 쌓인 파편과 같았다. 잊고 싶은 것과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서로 충돌하니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가끔 현실을 혼동했고, 자신이 아직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까진 미친 듯이 헤매야 했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짜 맞추어 더듬는 것은 이제 익숙한 작업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섬서성이다. 이곳에서 벌어질 사태를 막기 위해 형님의 일에 합류했다. 섬서성의 독 난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으며 세상이 기울기 시작했으니까.
어떻게 하려 했지?
제갈설린에게 정화석을 건네 맡기려 했다. 아니, 맡겼다. 훗날 천혜지봉(天慧智鳳)이라 불리는 그 사람이라면 어린 나이에도 섬서성을 장악하고 있으리라 믿었으며 이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 뒤로 며칠 동안 동태를 살폈으나 극독이 기승을 부릴 낌새는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제갈설린을 다시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래, 찾아갈 생각이었다. 지난번에는 세가의 사람들과 함께 공식적으로 방문한 뒤 몰래 빠져나와 제갈설린의 별채에 숨어들었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비밀스럽게 잠입해야 했다. 그래서 도시를 구경한다는 핑계로 빠져나와 호위를 따돌리고 열심히 달려갔다.
그러던 와중…… 대로 한복판을 지나며 이유 모를 인력을 느꼈다. 그것은 단련된 무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살기도, 위압감도 아니었다. 본능이라고 하기에도 미묘했으며 그저 자연스러웠다. 철이 자석에 달라붙는 것처럼, 깨어진 조각이 들어맞는 것처럼 당연한 이끌림이었다.
그렇기에 모용서는 순간 목적도 잊고 순리를 따랐다.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며 발걸음을 이끌었다. 홀린 기분으로 몸을 내맡기자 알지도 못하는 객잔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우글거리는 사람들과 뒤섞인 음식 냄새, 시끄럽고 산만한 광경 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누군가를 보았다. 자신의 모든 오감이 빨려 들어가듯 그에게 꽂혔다.
“빌어먹을…….”
모용서는 헛웃음을 지으며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쓸었다. 어깨와 머리 위에 소복이 쌓인 밀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입가를 가린 채 정면을 노려보는 모용서의 두 눈은 해소하지 못한 증오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