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섬서성 동관시의 약왕산에는 무림에서도 평균 지능이 가장 높은 집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통상적인 무림의 세가와는 다르게 진법, 병법, 의술을 끊임없이 연구해 오대세가 중 한 자리를 당당하게 꿰찬 제갈세가였다. 무공 실력으로는 중간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지만 규모가 큰 전투나 암투에서는 누구든 제갈세가의 공로를 인정했으며,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제갈세가는 혈족으로 이루어진 이상 대부분의 구성원이 ‘몸이 약하다’는 선천적인 약점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벌모세수를 시켜도, 온 중원을 뒤져 찾아낸 영약을 곱게 갈아 먹여도 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신체 건장한 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혼인을 하기도 했고,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한 무공을 익혀 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가끔 그나마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지만 십 할의 확률로 머리가 그닥 좋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 총명하고 영특한 편이라고 해도 지극히 머리 좋은 사람들만 모여 있는 제갈세가의 눈에는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제갈세가의 자존심은 곧 지력이 되었다. 힘이 전부인 세상에서 이를 뒤엎을 수 있는 월등한 지력만이 제갈세가의 존재 의의이자 마지막 자부심이었다.
제갈의 사람들은 학자가 주로 들고 다니는 섭선(摺扇)이나 철로 만든 판관필(判官筆)을 무기로 썼다. 지혜를 구하러 온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한껏 우아하게 혜안을 베풀었고, 매일같이 땀이 나도록 몸을 만드는 이들을 천박하다 비웃었다. 자신의 예측 한 마디에 우르르 몰려 움직이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는 오만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당연시된 세가의 풍조를 한심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
“아가씨, 분부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창 밑에 붙여 둔 책상에 앉아 서책을 읽고 있던 제갈설린은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닫아 두었던 문이 옆으로 드르륵 열리며 소식을 고한 시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숙여 눈은 마주치지 않았으며, 양손에는 옻칠을 한 작은 쟁반을 공손히 들고 있었다.
시비는 종종걸음으로 설린에게 다가가 쟁반을 들어 올렸다. 설린은 그 위에 놓인 주머니를 집으며 물어보았다.
“정확히 스물세 개 맞나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나요?”
“예, 아가씨.”
“맨손으로 만지는 일은 없었겠지요?”
“예, 분부하신 대로 각별히 주의했습니다.”
“새로이 전염병이 돌거나 의문사를 당한 사람은?”
“금일 오전에 보고드린 그대로입니다, 아가씨.”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쉰 제갈설린은 예의 바른 축객령으로 시비를 돌려보냈다. 그런 뒤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 앉아 손에 든 주머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 커다란 비단 주머니는 손으로 만질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설린은 곧 주머니를 열어 책상 위에 와르르 쏟았다. 안에 있던 것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굴러 쌓였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모난 자갈처럼 생긴 그것은 연한 하늘색으로 투명하게 빛났고, 속에 물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일렁였다.
이를 본 설린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하!”
설린은 조소를 터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돌렸다. 곧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설린의 입 밖으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제갈세가의 금지옥엽이 자신의 개인실 주위로 온갖 접근 금지 진법을 두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들어올 수 있는 인물을 철저히 통제하는 이유였다.
“곧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면서, 지금 대비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면서! 정화석까지 가져와 걸기에 믿어 보았건만 결국 허풍이라니! 모용의 이름을 등에 업고 대참사라는 말을 쉬이 입에 담아? 그 어린 공자의 머리에는 진중함과 진솔함 따위 없는 것이냐!”
고작해야 열둘, 열셋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벽력같은 일갈이었다. 방 안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비난의 대상인 ‘어린 공자’가 앞에 있었다면 몸을 움츠리고도 남을 기세였다. 시비가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예의 바른 말투를 쓰던 규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갈설린은 제갈소서의 딸이었다. 제갈세가의 인물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멸시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 실질적 권력자 제갈소서의 유일한 외동딸, 미약한 절맥증을 앓아 무공은 절대 배울 수 없지만 그만큼 천재적인 지능을 갖고 태어난 어린 기대주가 바로 제갈설린이었다.
제갈설린은 평소 호랑이 같은 제갈소서의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얌전하고 조용했지만 가끔 격분하면 왜소한 몸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살벌해졌으며,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제갈설린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단련도 하지 않은 아담한 손으로 어찌나 세게 쳤는지 말끔한 정화석 몇 개가 바닥과 허벅지로 굴러떨어졌다.
“그 말 하나만을 믿고 꼬박 보름 동안 섬서성 전역을 지켜본 나는 뭐가 되는 것이냐! 새어 나간 금전이 몇이고 소모된 인력이 몇인데, 낭비한 시간이 얼마인데! 희귀한 기물 몇 개만 쥐여 주면 사람을 이리 농락해도 되는 것이더냐? 저가 뭐라고 감히!”
“……생각보다 사납게 화를 내는구나. 몸에 좋을 것 하나 없으니 가라앉혀라.”
“누구냐!”
혼자인 줄로만 알았던 방 안에서 갑작스레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기겁을 한 제갈설린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자 단아하게 정리된 방 한가운데에 홀연히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제갈설린은 정체 모를 침입자가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났다는 상황을 인식하자마자 재빠르게 책상 밑에서 암기를 꺼내 날렸다. 이는 병약한 자식을 위해 제갈소서가 마련한 기물로, 잘 겨냥해 쏘기만 하면 극독을 바른 침이 직선으로 날아가는 암기였다.
동시에 책상 옆 서랍장 위에 놓인 도자기 선녀상에도 다른 한 손을 뻗었다. 이를 기폭제로 방 주위에 둘러친 진법을 발동시켜 위험에 처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을 여러 번 연습한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독침이 날아갔다. 선녀상의 목도 단숨에 뚝 분질러졌다.
하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순식간에 혼란이 온 제갈설린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무…… 무슨, 이게…….”
“겁을 주어서 미안하구나. 나는 너를 해칠 생각도, 어딘가로 데려갈 생각도 없다. 그저 전할 말이 있을 뿐이다.”
그의 목소리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낮고 부드러웠다. 시원한 소슬바람 한 줄기가 파고들어 몸속의 열을 식히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들끓던 기분이 한결 차분히 가라앉고, 오래 달인 탕약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그제야 제갈설린은 이성을 되찾고 불청객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누구십니까?”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온 사람이다. 정문으로 들어오면 일이 커질 것 같아 몰래 들어왔다만…… 이렇게 무서워할 줄 알았다면 서신이라도 한 장 쓸 것을 그랬구나.”
불청객은 염색을 하지도, 자수를 놓지도 않은 무명옷을 입고 죽립을 쓰고 있었다. 죽립은 위가 트여 있지도 않을뿐더러 허리까지 내려오는 면사가 달려 있어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키는 6척에서 한 치 정도가 모자란 것 같았고, 외공의 흔적이나 단전의 내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무림인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각종 진법이 망라된 제갈세가에 함부로 들어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이곳까지 왔을 리가 없었다. 이 사람은 최소한 진법의 대가이거나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이일 게 분명했다.
판단을 마친 제갈설린은 손에 쥐고 있던 빈 암기와 선녀상의 목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를 향해 정갈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 상황에 설린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분고분 따르며 정보를 얻어 내는 것뿐이었다. 더불어 그에게서 적의는커녕 어쩐지 호의가 느껴진다는 점 역시 제갈설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자 불청객 역시 설린을 뒤따라 그 자리에 앉았다. 한 장 반 정도 떨어진 방 가운데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서로를 재듯 흐르는 미묘한 침묵 속에서 제갈설린이 꺼낼 말을 고르고 있을 때, 불청객이 천천히 한 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경계를 늦추지 않은 설린은 흠칫 어깨를 떨었지만 이번에도 아무 일은 없었다.
아니, 일은 벌어졌다. 설린의 눈에 뒤늦게 들어왔을 뿐이었다.
“당가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독을 갖고 있었구나. 닿으면 좋지 않을 테니 얌전히 있거라.”
“허, 허공섭물…….”
쏘아져 나간 뒤 사라진 줄 알았던 황동 독침이 공중을 두둥실 날아 설린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저것에 스치기만 해도 자신은 죽으리란 것과, 이 기이한 광경이 상대방의 막대한 내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제갈설린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얌전히 있으라는 말이 협박처럼 들리진 않았기에 제갈설린은 떨지 않을 수 있었다. 일반인의 눈에도 훤히 보일 정도로 느긋하게 날아온 독침은 곧 설린이 손에서 놓은 기물 속으로 쏙 들어갔다.
찰칵, 독침이 장전되는 소리가 작게 들리자 불청객은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제갈설린 역시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제갈설린은 인정해야 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감히 재단할 수 없는 강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