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명문 정파의 자제로 태어나 벌모세수를 받고 온갖 영약은 다 먹어 온 동년배의 아이들보다 네 내력이 너덧 배는 더 강대할 것이다. 아무렴 단전의 내공만 그럴까. 네 뼛속과 근육 한 올마다 영험한 기운이 들게 하도록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
“그런…….”
“이 스승이 부단히 먹이고 가르친 것은 다 잊었나 보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깎아내리는 것을 보면.”
“그…… 아, 아니에요. 아닙니다. 실언이었어요, 스승님.”
초윤의 뿌듯함과 자신감이 목소리에서 묻어 나와 확신을 주자, 아이는 안색이 새하얘진 채 서둘러 변명했다. 그 밑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희미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사현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대성하는 게 느리다면, 누…… 누나를 지켜 주는 건 더 어렵겠죠? 저, 저는 느린데…… 누나는 항상 빠, 빠르니까…… 제가 강해지면 누나는 이미 어, 엄청 더 강할 테니까요. 이제…… 치, 친왕 전하가 직접 가르쳐 주기도 할 테고.”
“쉿, 쉬잇. 네가 그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입 밖으로 내선 안 된다.”
“아, 헉!”
사현이 깜짝 놀라 양손으로 자기 입을 가렸다. 초윤은 서둘러 차음막을 펼치고, 이야기를 들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은 그제야 침울하게 손을 내리며 죄송해요, 한 마디를 했다.
이건 어떻게 납득시켜 줘야 하나. 초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사현, 지키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꼭 네 누이가 했던 것처럼 대신 맞아 주고, 대신 때려 주고, 자신의 좋은 것을 넘겨주는 것만이 지킨다는 행위는 아니다.”
“…….”
“어쩌면 그저 건강한 몸으로 네 갈 길을 가며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도리어 네 누이를 지키는 것일지도 모르지. 사영이 네게 바라는 것은 그뿐일 테니까.”
진정으로 아끼는 이가 자기 대신 상처를 입는데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느냐.
밤눈처럼 귓가에 소복소복 내려앉는 스승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현은 자신의 손을 맞잡고 생각에 잠겼다.
누나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과 자신이 누나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상충한다는 점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누나를 지키고 싶다’라는 마음에는 약간의 치기도 섞여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바람을 쉬이 놓을 순 없었다. 왜냐하면…….
“하지만 저도 누나를 아끼는걸요.”
사현은 결국 입을 열었다. 자신이 말을 더듬고 있지 않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속에만 묻어 두었던 것을 꺼내 보였다.
“저도 누나를 아껴요. 누나가 저 때문에 다치면 너무 싫고, 누나 대신 아파 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적어도…… 최소한 누나가 절 지켜 줄 필요는 없을 정도로 강해지고 싶어요.”
“……장담컨대 네 누나는 네가 천하제일인이 되어도 지켜 주겠다고 할 게다.”
“그건…… 그렇지만요.”
울적하게 수긍한 아이는 맞잡은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잠시 묵묵히 고민하다가 짤막한 질문을 툭 꺼냈다.
“스, 스승님이 가장 잘 쓰시는 무기는…… 검이 맞나요?”
“맞다. 뽑아 본 지는 오래되었지만 필요하다면 검을 쓰지.”
“저는…… 도가 몸에 맞는 건가요?”
“민첩성과 유연성보다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을 본능적으로 해낼 줄 아니 도를 잡는 게 낫다. 둔기를 써도 좋지만 이는 장점만큼 단점도 커서 기초를 쌓는 데엔 적합하지 않다.”
“그럼…… 저, 저도 도를 가장 잘 쓰는 분을 찾아가서, 가르쳐 달라고 부, 부탁드릴 순 없나요?”
초윤이 속으로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대화가 왜 이리로 튀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초윤은 허둥지둥 아이를 만류했다.
“사현, 내가 검을 주로 쓴다고 해서 도를 이 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애초에 모든 것은 만류귀종의 법칙을 따르니 하나의 실력이 극에 달하면 자연스레 다른 것도 꿰뚫을 수 있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누, 누나의 거짓말은 그 사람이 더 잘 가르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스, 스승님이 모르시는 분야에서는 또…… 또 다른 훌륭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도 말씀하셨고요.”
“……그랬다.”
“그, 그럼…… 제게 도법을 더…… 빨리 잘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다른 사람도 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
누가 사영이 동생 아니랄까 봐, 작정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니 은근히 입이 예리했다. 아이는 자신의 말에 어물어물 변명을 붙였다.
“저, 저는 빨리 강해지고 싶어서…… 누나가 다, 다른 가르쳐 주실 분을 찾아서 새,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처럼 저도…… 해 보고 싶어요. 어, 어쩌면 잘될지도 모르잖아요.”
“……아주 고될지도 모르고, 사영과 오랫동안 헤어질지도 모르는데? 다른 곳에는 천오보다도 강한 경쟁자가 있을지도 모르고, 지금처럼 편히 놀 시간도 없어질 수 있다.”
“괘, 괜찮아요. 누, 누나가 하는 거면, 저도 해내고 싶어요.”
“…….”
육아에 대한 자신감이 일시적으로 하락한 초윤은 결국 아이의 말발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구구절절 구슬리면 구슬릴수록 왠지 사현의 발목을 잡는 기분이 들어 말을 더 꺼내기가 힘들었다.
결국 초윤은 허탈한 마음으로 희에게 말해 보겠다는 약속을 해 버렸다. 물론, 돈을 주고 고용하는 게 아닌 이상 스승을 여러 번 바꾸겠다 말하는 건 큰 실례가 될 수 있으니 한 번 결정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단단히 일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도법을 배울 것을 상정하고 기초를 다져 두긴 했으나, 문주님께서 보시기에 다른 곳에 재능이 있을 것 같다면 그리로 방향을 틀어도 괜찮습니다. 끈기가 모자란 아이는 아니니 길을 찾은 뒤엔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약선 대협께서 임 소협의 길이 도법이라고 보셨다면 마땅히 그리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렴 고강하신 스승님의 말씀인데…….”
“저는 오로지 제가 배운 것에서만 약간의 재주를 부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바라는 것이 제 범주 이외의 것이라면 가르칠 수 없게 됩니다.”
영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희를 앞에 두고, 초윤은 묵묵히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사현이도 이제 열세 살. 슬슬 졸업할 나이였다.
“많은 인재들을 보고, 찾고, 키워 내신 문주님이라면 제 아이에게도 다양한 경험과 고뇌를 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꼭 유능하고 특출한 사람으로 키워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아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담담하게 말을 끝마친 초윤은 시선을 올려 희를 보았다. 며칠 전에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화려한 차림을 하고 있는 희는 고민하듯 손끝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금으로 만든 한 치 길이의 손톱 덮개에 알알이 박힌 부용석과 녹주석이 자잘하게 빛났다.
이윽고 고민을 마친 희가 초윤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사실 약선 대협처럼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 낼 자신은 없지만, 모쪼록 가진 것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노력해 볼게요. 임 소저도 동생이 가까운 곳에 있다면 정말 좋아하겠네요. 애착의 대상이 가족이나 연인인 사람이라면 상대가 자신의 영역에 있을 때 가장 건강해지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게다가 임 소협도 누이에게 부채감을 가진 것 같으니 동기는 충분할 테지요. 음, 좋아요. 저만 잘하면 되겠어요.”
……어째 정말로 천 년 묵은 여우 굴에 애들을 맡기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초윤에겐 ‘약선 초윤’이라는 사기적인 명성과 희에 대해 낱낱이 서술한 원작의 기억이 있으니 이런 담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현경의 강자를 정면으로 상대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이들에게 괜한 해코지를 하진 않겠지, 싶은 믿음이었다.
‘식료품을 사러 내려올 때마다 들러서…… 아니, 광동성이면 그건 힘들겠지. 표국을 하나 터놓고 편지라도 자주 해야겠어.’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언제 바뀔지 모르니 꾸준히 연락해야겠다. 초윤은 다짐하며 엄지로 나무 함의 잠금을 찰칵 열었다. 동시에 희의 방 주변으로 얇은 차음막을 펼쳤다.
“……아무래도 그 안에 있는 게 웬만큼 심상찮은 건 아닌가 보네요.”
대외적으로는 아무것도 익히지 못한 일반인의 몸이지만 사실 비밀리에 무공을 단련하고 있었고, 그 수준 또한 꽤 높은 희가 무형으로 전개되는 기운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작게 감탄했다. 초윤이 이만큼 주의를 기울이는 물건이라니, 적어도 공청석유나 만년화리 같은 전설 속 영약쯤은 될 것 같았다.
초윤은 그 반짝반짝하고 기대 가득한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천천히 나무 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주먹보다 작은 갈색 도자기 병이 다섯 개씩 네 줄, 총 스무 개 놓여 있었다.
“……?”
무릇 우수한 영약이라면 뚜껑을 여는 순간부터 상서로운 향이 방을 가득 채워야 하며, 반대로 우수한 독은 일 장 반경에만 있어도 독기가 몸을 침투해야 한다. 그럼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 이것은 이도 저도 아니라는 뜻인데…… 병에 별다른 진법이나 기술이 가미된 흔적도 없고.
하지만 약선이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지.
섣부른 판단을 자제한 희가 새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물끄러미 초윤을 보았다. 초윤은 빨간색 매듭 끈을 묶어 둔 가장 왼쪽 줄의 병을 짚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