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초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원작을 읽은 정하윤이 알고 있었다.
정파의 세가들이 더욱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각종 인력과 황금을 마교에 조공한다는 것은 〈귀환영웅〉의 첫 번째 반전이었으며, 무협 소설의 클리셰였다.
누구보다도 완강하게 마교의 절대 척살을 내세우는 남궁세가와 같은 편에 속한 백협맹의 세력들은 사실 마교와 암중의 거래로 묶여 있었다. 마교를 배척한답시고 죄 없는 가문들에게 누명을 씌워 쥐 잡듯이 잡아 댄 것은 그저 내세우기 식의 눈속임에 불과했다.
주인공은 구양선과 함께 화산파를 다시 세운 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렸고, 남궁세가는 순식간에 무림 공적으로 몰려 전쟁이 벌어졌다.
중원의 서쪽 끝에 있는 마교에서 동쪽 끝에 있는 안휘성으로 지원이 오기 전에 재빠르게 남궁세가를 무너트려야 했지만 수십 년 동안 부정한 방법으로 쌓아 온 남궁의 힘은 만만치 않았다.
남궁세가는 사람의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사용해 일시적으로 내공의 양을 다섯 배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극약부터 혈강시, 철강시와 악독한 주술까지 써 가며 온 무림의 공격에서 기어코 살아남았다. 그리고 구석에 몰린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마교와 함께 중원을 양쪽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여기까지가 〈귀환영웅〉 5부에 이르는 위기였고, 주인공은 여기저기서 열심히 구르며 절망적이던 전황을 차츰차츰 바꿨다. 당운금도 이 전쟁 통에 중독되어 초윤에게 실려 오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남궁세가와 화산파 등의 백협맹 세력이 사실은 마교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소설의 반전인 만큼 누구도 모르던 비밀이었다. 주인공이 처음 이 사실을 공표했을 땐 미친 소리라고 도리어 비난을 받았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희는 지금 초윤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를 언급했다. 마치 초윤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잠깐만…… 그러면 희가 초반에는 악역으로 나오다가 갑자기 주인공 편으로 돌아서는 것도 변덕스러운 흥미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인공을 성장시키기 위해 사자식 교육 법을 사용한 건가? 전황을 바꿀 영웅이 나타나길 기다리다가 주인공을 선택했다는 건가?’
소름이 쫙 돋았다. ‘초윤’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지만 계략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통찰력이 좋고 학구적인 면모가 뛰어난 천재형의 인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희의 지성은 초윤과 결이 달랐다. 희는…….
‘이런 인간이 정치하면 장난 아니게 무섭겠다.’
모사 쪽으로 지능이 발달한 책사형의 인간이었다.
이곳이 현대가 아니라 무협지 속인 게 처음으로 다행인 것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원작에 대한 신뢰도도 쭉 내려갔다. 이런 캐릭터를 겨우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다니, 하마터면 희를 과한 설정의 이상한 인간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뻔했다. 이제는 원작에 나온 캐릭터가 온전히 원작 그대로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게 되었다.
“백호철은 이미 한 번 말문이 트였고, 머릿속에 넣어 둔 고독도 죽어 버렸으니 그곳에 가만히 둔다면 마교의 존재가 새어 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겁니다. 약선 대협께서 친절하게도 당염초를 데리고 멀리까지 나가 주신 덕에 그를 회수할 순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임 소저에게 상처를 입혀 버렸으니…… 정말 면목이 없을 따름이에요.”
‘아니야……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속으로 아무리 외쳐 본들 소용이 없었다.
초윤은 작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설명은 들을 만큼 들었으니, 이제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룰 차례였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그저 중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의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아이들에게 위협을 가한 점, 평생 안고 갈 흉터를 남긴 점에 대해 본인에게 사과를 해 주십시오.”
“예, 물론이에요.”
원래는 네가 감히 내 애를 이랬네 저랬네 하며 따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희는 약삭빠르게 사영이에게 ‘선물’을 주었고, 그 청년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초윤도 그것이 사영이에게 엄청난 의미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이미 당사자 간에 합의가 끝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러니 초윤은 이제 그만 충격의 연속인 대화를 끝내고 집에 가고 싶었다.
흔쾌히 대답한 희는 폭신한 방석에서 옆으로 내려왔다. 묵묵히 구석에 서 있던 여와가 그의 불편한 운신을 도와주려 했지만 가벼운 손짓으로 거절했다. 그리고 사영의 정면에 마주 앉아 맨바닥에 무릎을 꿇은 뒤 양손을 겹쳐 포권을 취했다.
‘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초윤이 식겁할 정도로 깍듯한 자세였다.
‘여기 쉽게 무릎 꿇지 않는 문화권 아니었어? 거기다가 희는…… 아니, 왜 다들 이렇게 무릎 꿇는 걸 좋아해?’
“사과드립니다, 임 소저. 이 희 아무개의 불찰로 큰일을 겪으셨으니, 지탄하셔야 마땅합니다. 염치없으나 용서를 구합니다.”
“아…….”
사영이 당황한 듯 곱다랗게 고개를 숙이는 희와 초윤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초윤이 차분하게 사영을 지켜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얼굴을 굳히고 대답했다.
“괜…… 괘념치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오히려…… 친우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 오랜 숙원이…… 풀린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금세 평소의 말투로 돌아온 희는 손끝으로 입을 가리고 후후 웃으며 다시 방석 위에 올라와 앉았다. 그리고 다반의 아래에 괴어 놓았던 한 장의 서신을 꺼내 초윤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또, 이것은 약선 대협께 드리는 제 사과와 감사의 표시예요. 어떤 것을 좋아하실지 몰라 고민 끝에 고른 선물이니 부디 받아 주셨으면 해요.”
뭐야? 뭐지?
초윤은 한 손으로 서신을 받았다. 희가 고민 끝에 골랐다고 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열면 사영이를 공격한 살수의 머리카락이 후드득 떨어질 것 같았다.
그때, 초윤의 속을 훤히 보기라도 한 것처럼 희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 실수한 살수의 목을 베어 직접 건네 드리고 싶었어요. 그 살수도 기꺼이 스스로 목을 자르려 했고요. 하지만 이득이 될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호철을 살려 내신 것을 보면 제자 분들께 아직 죽음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하시는 것 같아서…… 다른 것을 준비했답니다.”
약재로 하자니 약선 대협의 마음에 들 만한 독특하고 새로운 것을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부드럽게 덧붙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초윤은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