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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55)화 (55/257)

55화

“가셨구나, 가셨어.”

당염초는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트리고 저도 모르게 한탄했다. 그보다 늦게 고개를 든 위정이 조부를 위로하듯 말했다.

“들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훌쩍 나타나실 겁니다. 그런 분 아니십니까.”

“그래, 약선 어른께선 그런 분이시지. 있는 듯 없는 듯 찾아볼 때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다가 정녕 필요할 때 홀연히 돕고 가시는 분이시지.”

초라하게 주름지고 우둘투둘한 사마귀가 매달린 당염초의 눈이 아무것도 없는 당문의 담벼락을 한참 응시했다. 가슴 한구석을 동그랗게 도려낸 듯한 공허함을 채울 길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에도 어리석었다. 20년의 시간이 있었는데도 이렇다 할 발전을 보여 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번이라고 잘 해내겠느냐. 나는 그것이 두렵다. 이토록 장담을 했는데 또 실망을 안겨 드릴 것이 무섭구나.”

포부는 당차게 잡았지만 이미 너무 늙은 몸이다. 무림인이라는 명패가 목숨을 잡아 두고 있긴 하지만 이제 정신이 혼미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당염초는 그렇게 한참 맨바닥에 앉아 넋두리를 했다. 항상 까다롭고 고집 센 당문의 문주만을 알고 있던 난위정은 처음 목도하는 조부의 약한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그의 곁을 지켰다.

괜찮을 것입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잘 해내실 겁니다. 다들 마음을 고쳐먹고 알아줄 겁니다. 배움이 있고도 충분한 큰일을 겪지 않았습니까.

난위정이 조부를 조곤조곤 위무하는 소리는 그 후로도 한참 이어졌다. 사천당문이 ‘난위정’을 제대로 갖게 된 날이었다.

왜 걸핏하면 무릎을 꿇는 거야…….

너무 당황해서 대답도 못 하고 나와 버렸다. 이미 담을 넘어 버렸으니 아무리 후회한들 돌아갈 순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몰래 나와도 이런데 낮에 나왔으면 예우를 갖춘다고 또 얼마나 성대하고 부담스러운 행사를 벌였을 것인가. 그리고 대답을 했다면 또 당염초에게 한참 붙잡혀서 넋두리를 다 들어 줘야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차라리 잘한 거다. 초윤은 애써 합리화하며 발을 놀렸다. 숲을 벗어나 도시로 들어갈 때까지는 경공을 써서 시간을 단축할 생각이었다. 아이들도 제법 잘 따라오고 있었다.

아직 기척이나 소리를 완전히 감추진 못했지만 캄캄한 밤에 정돈되지 않은 길을 달리는데도 넘어지지 않을 기본을 갖추었고, 일각에 가까운 시간을 계속 뛰어도 숨찬 호흡을 하지 않았다.

정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구나. 초윤은 흐뭇한 마음으로 달리다 민가가 보이기 시작하자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오던 아이들이 하나둘 도착해 초윤의 곁에 섰다. 초윤은 혹여 듣는 귀가 있을까 봐 당문 안에서는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청두를 벗어나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어디인지 짐작이 가느냐.”

“아니요, 전혀요.”

초윤의 눈길을 받은 사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천오에게만 전음을 보냈고, 붉은 자작나무 숲을 아는 것 역시 천오밖에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차음막을 펼치고 인적이 드문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초윤의 얼굴은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로 싸늘하게 얼어 있었다. 죽립을 쓰지 않았다면 스승의 이런 표정을 처음 보는 아이들이 긴장했을 게 분명했다.

초윤은 이전에 한 번 걸어 봤던 길을 되짚으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통보했다.

“네 팔에 상처를 남긴 사람을 만나러 가는 중이다. 친절하게도 약속 장소를 잡아 줬더구나.”

“네?”

화들짝 놀란 사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사영은 오히려 약간 인상을 쓰고 있어도 놀라진 않은 눈치였다.

“그, 그런…… 그런…… 위, 위험할 거예요, 스승님. 그, 그 사람들은…….”

“위험하지. 아마 그들에 비하면 당문은 귀여운 축에 속할 것이다.”

초윤은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 굳어 버린 사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초윤의 추론대로라면, 그리고 원작의 묘사대로라면 지금 초윤은 어린 살쾡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천 년 묵은 여우 요괴의 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름의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초윤과 아이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고, 설령 그렇게 나온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어 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초윤은 지금 선생님이 아니라 학부모의 입장이었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 어느 날 뜬금없이 맞고 들어와서 평생 흉터를 달고 살게 됐는데 가해자 측이 먼저 만나자며 연락을 해 왔다?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현대였으면 교육청 소재의 학교 폭력 위원회로도 모자라 형사 고소까지 갔을 일이었다.

“나를 믿어라. 나는 대책 없이 너희들을 위험한 곳으로 밀어 넣지 않는다.”

내가 오늘 저것들 머리를 죄다 쥐어뜯는 한이 있어도 애들 앞에서 사과시킨다. 초윤은 살기등등하게 다짐하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집의 대문을 노려보았다. 담 너머로 빽빽하게 조성된 붉은 자작나무가 보였다.

얼마 전, 초윤과 천오가 매독에 걸린 기녀들을 만났던 바로 그 장소였다.

대문으로 다가가자, 이번에도 두드리기 전에 빠끔히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건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갈색 머리의 호위 무사였다. 동시에 사천당문이 습격을 당한 날 백호철을 납치해 간 그 사람이 맞는지, 사현이 겁에 질린 숨을 들이마셨다.

무사는 초윤의 일행을 안쪽으로 들이고 대문을 다시 꼭꼭 걸어 닫자마자 초윤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포권을 취했다.

“인사 올립니다, 약선 대협.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안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초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아이들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째려보고 있는데도 무사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듯 등을 돌려 본채를 향해 걸어가는 그를 따라가던 초윤이 불쑥 물었다.

“안색이 나아진 것을 보니 약은 잘 들은 것 같구나.”

부하 관리 잘못해서 애 팔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 넌 잘 잤나 보다? 잠이 왔냐?

“약선 대협의 위명대로였습니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푹 수면을 취할 수 있었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빈정거리려던 의도와는 다르게 나가는 말은 차분했다. 그렇다 보니 대답도 예의 바르게 돌아와 살짝 무안해졌다.

무사는 초윤의 일행을 데리고 본채로 들어갔다. 등불이 훤히 비쳐 보이는 바깥쪽 방을 사용했던 저번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촛불이 점점이 켜진 복도를 한참 걸어야 했다. 아이들은 긴장했는지 말도 한 마디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침만 삼켰다. 초윤은 아이들을 조용히 다독이며 기감을 펼쳤다.

‘무사까지 포함해서 세 명인가. 함정은…… 딱히 없는 것 같다.’

여차하면 전부 쓰러트리면 될 일이다. 초윤은 사람을 해치는 데에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스스로를 조금 신기하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 마룻바닥을 딛는 발자국 소리는 세 사람분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도착한 복도 끝의 방은 들어가기 전부터 호화로움의 격이 달랐다. 손으로 깎아 낸 육각형의 문살은 하나하나 가운데에 모란을 조각해 붉게 칠했고, 문에 바른 종이에는 고풍스러운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무사는 그 화려한 미닫이문을 양쪽으로 연 뒤 들어가라는 듯 물러났다. 초윤은 문턱을 넘어 방의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금박을 입힌 초를 군데군데 환하게 밝혀 놓은 방은 생각보다 넓지 않은 대신 고급스러운 소품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벽에는 수묵화 족자와 금은실로 자수를 놓은 비단을 아낌없이 늘어트렸으며 반인반사(半人半蛇)의 사람을 새긴 향로가 은은한 꽃향기를 흘렸다. 오래되어 낡은 것이 도리어 가치가 된 나전 칠기 서랍은 촛불에 비쳐 영롱하게 반짝거렸고 그 위엔 은거울이 달린 경대와 핏빛 산호가 놓여 있었다.

과하다. 과하게 화려하다. 하지만 너무나 잘 어우러져서 천박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쩐지 이 방을 꾸며 놓은 주인의 성향을 벌써부터 알 것 같다.

바닥을 보자 금술 달린 비단 방석 네 개와 붉은 비단의 끝자락이 보였다. 시선이 자연스레 옷자락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고, 초윤은 그제야 방 끝에 마련된 보료에 앉아 있는 사람을 눈에 담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약선 대협. 이리 앉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은반을 굴러가는 동그란 월장석처럼 맑은 목소리. 밤사이 톡톡 꽃망울을 터트리는 봉오리처럼 피어나는 웃음.

예상은 이번에도 나쁜 쪽으로 맞아떨어졌다. 초윤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기루’와 관련된 세력은 원작에서도 딱 두 곳밖에 나오지 않아서 설마설마했는데.

“변변찮은 문파를 하나 이끌고 있는 ‘희’라고 합니다.”

불길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 진실이 가려진 모든 일의 주동자. 변덕스러운 의지를 가진 은총. 세상 모든 무용한 것들의 군주.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한 조각의 패.

치렁치렁한 비단옷을 겹겹이 입고 자리에 앉아 새파란 눈으로 웃으며 올려다보는 사람은 바로 하오문의 문주, 희(羲)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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