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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54)화 (54/257)

54화

초윤은 고개를 휘휘 젓고 몸을 일으키며 운금의 어깨를 도닥였다.

“아니다. 심심할 테니 어쩔 수 없지. 격하지만 않으면 함께 놀아도 괜찮다. 한데…… 물가에 자주 들어가는 것이냐.”

“네? 네에……. 할아버님께서 여기는 얕은 물이니 들어가도 괜찮다 하셨습니다. 가끔 개구리 알이나 피라미가 보일 때만 들어가서 놉니다.”

“아무도 말리는 이가 없더냐. 지켜보는 어른이 없을 땐 홀로 들어가면 안 된다. 얕은 물일수록 오히려 빠져 죽기 십상인 법이야.”

무릎 높이의 물이 얼마나 위험한데. 미끄러지면 당황해서 몸도 일으키기 힘든 수위가 딱 그만큼이다. 초윤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운금을 조심스레 타일렀다. 아이는 고분고분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할 말은 했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른…… 구양 도사님이 있었는데.”

운금이 연못 앞에 멀뚱히 서 있던 구양선을 보았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꽂히자, 구양선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포권을 취했다.

“하핫……. 다시 뵙습니다, 약선 대협. 아침에는 손수 치료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있었지, 참…….

가만히 누워서 요양을 해야 할 사람이 어쩌다 애들 사이에 끼어서 이곳에 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손님 처지라서 그러려니 했다. 아침에 상처를 치료해 줄 때만 해도 초윤을 약사님이라 불렀는데, 난위정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니면 따로 언질을 받은 게 있는 건지 이젠 약선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애들에게 정신이 팔려 인사하는 것도 잊어버린 초윤은 조금 겸연쩍은 마음으로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사흘은 얌전히 누워 있어야 흉이 지지 않고 잘 아문다고 얘기했을 텐데 너는 또 어찌 나와 있느냐.”

“그것이…… 적당히 걸을 만은 한 것 같아서 도울 게 없나 싶어 나와 본 참에 홀로 돌아다니는 당 소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그렇게 말하며 허허 웃는 구양선은 꽤 처참한 몰골이었다. 옷 밖으로 보이는 몸뚱이는 무명천을 감지 않은 곳이 없었고, 약 냄새가 전신에서 풀풀 풍겼다. 우직해 보이는 얼굴에는 시퍼렇게 부어오른 멍까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원체 뼈대가 튼튼하고 건장한 몸이라서 저렇게 검을 차고 돌아다니지 일반인 같았으면 석 달을 넘게 앓을 중상이었다. 당문의 사람들보다도 많이 다친 것 같았다.

구양선이 이렇게 다친 건 초윤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초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정체 모를 사람들이 당문을 덮쳤는데, 구양선은 초윤의 아이들을 습격에서 지켜 주기 위해 분전하다가 부상을 입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을 확인하고 놀란 가슴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앉아 있는데 여기저기 너덜너덜하게 썰린 구양선이 나타나 얼마나 놀랐던지…….

비척비척 걸어와선 일신의 실력이 미천해 흉수의 발목을 잡는 것밖에 못했다고,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피투성이 구양선을 앞에 두고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 다음으로 열심히 뚝딱뚝딱 고쳐다가 눕혀 놨는데 그거 하나를 못 기다리고 이렇게 팔랑팔랑 돌아다니다니.

초윤은 말 안 듣는 환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의사의 심정에 공감하며 조금 타박하듯 말했다.

“손상된 근육이 몇 개고 뭉친 울혈이 몇 곳인데 그 사흘을 기다리지 못하겠더냐. 인내심이 그 모양이니 실력도 알조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약선 대협. 돌아가서 제대로 정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심한 말을 해 버렸지만 구양선은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의기소침하게 반성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가 매번 제 입에 된통 당하는 초윤은 변명하듯 말했다.

“물놀이를 보아 준 것은 잘했다. 보탬이 되려는 마음도, 아이를 아끼는 심성도 기특하다. 하지만 제 살을 깎아 먹는 짓은 그만두어야 네 인생을 온전히 네 것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예!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만 들어가 쉬어라. 너희도 가자꾸나. 운금이는 의복을 갈아입어야겠다.”

초윤은 우렁차게 대답하는 구양선을 두고 오른팔로 당운금을 안아 들었다. 몇 겹을 껴입는 옷의 아랫단이 젖었으니 이대로 걸으면 애가 넘어질 것 같았다. 내력으로 그냥 말려 줄 수도 있었지만 연못의 물이 그리 깨끗하진 않아서 마음에 걸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천오가 슬그머니 붙어 초윤의 왼손을 잡았다. 함께 움직일 때는 당연히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굉장히 귀여웠다. 그 경계심 많던 아이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다가오는 것을 보니 만감이 교차하며 흐뭇하기도 했다.

내가 정말 너희들 덕분에 산다, 살아. 초윤은 내심 평온한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돌렸다. 남매도 초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녹주각으로 돌아가다가, 초윤은 문득 구양선을 돌아보았다. 누가 보지 않아도 꿋꿋하고 고지식한 구양선은 여전히 포권을 취한 채 숙인 허리를 펴지 않고 예를 유지하고 있었다. 초윤이 아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저러고 있을 것 같았다.

“…….”

한 마디만…….

한 마디만 더 해 줄까. 조금만 오지랖을 부릴까.

구양선의 삶도 이미 비틀어진 것 같은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못 지킨 아이들을 돕겠다고 저렇게나 다쳤는데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초윤은 구양선에게 몇 마디의 전음을 날리고 다시 앞을 보았다. 사뿐사뿐 갈 길을 가자 뒤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약선 대협!! 감사합니다!!”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는데도 연신 외쳐 대는 것을 보아 초윤이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자랑하려는 것 같았다.

아직 마음의 빚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기회만 있다면 몇 번 더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그때마다 저렇게 전력으로 고마워하면 좀 부담스러울 듯했다.

어쨌든 다음에 말하자, 다음에.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 또 만나겠지.

초윤은 걸음을 빨리했다. 떠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무엇보다, 은밀히 들를 곳이 있었다.

-그믐날 밤에 붉은 자작나무 숲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초윤은 천오가 전해 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죽립을 고쳐 썼다. 어두컴컴한 밤인 데다 저쪽에선 이미 자신의 신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천당문을 나가면 민간인의 구역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백발 남자 요괴’ 같은 소문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한결 가벼워진 약함도 등에 지고 아이들을 챙겼다. 각자의 배낭은 물론이고 상처와 식수, 주전부리도 살폈다. 모든 걸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초윤은 전각의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손톱만 하던 하현달조차 자취를 감춘 그믐밤이었다.

초윤은 정문이나 뒷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전각과 가장 가까운 담으로 향했다. 수십의 무사들이 교대로 당번을 돌고 있을 테지만 세가 내의 기척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초윤은 능숙히 그들을 피해 나아갔다. 어느 정도 실력 있는 무림인들이고, 이틀 전에 있었던 화재 사건 때문에 다들 잔뜩 독이 올라 바짝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초윤과 아이들을 감지하는 이는 없었다.

아이들은 미리 얘기하지 않았어도 약속이라도 한 듯 찍소리 하나 내지 않고 초윤의 뒤를 따랐다. 오밤중에 나갈 채비를 했을 때부터 스승이 비밀스럽게 이곳을 떠나려 한다는 사실을 잘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뒤따르는 이가 있었다.

초윤은 자신의 키보다 높은 담장을 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며칠 사이 폭삭 늙어 버린 얼굴을 한 당염초가 난위정과 함께 자박자박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당염초는 나직하게 물었다.

“가시는 겁니까?”

“더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초윤의 용건은 진즉 끝났지만 이틀이나 더 머무른 것도 격하게 움직이면 사영이의 상처가 터질까 싶어 연장한 것이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가며 노력한 끝에 얼추 아물었으니 이만 떠날 때가 된 것 같았다. 덕분에 초윤은 밥값을 한다고 당문의 환자들을 마저 봐 주랴, 애들 돌보랴, 이래저래 바빴다.

“위정이가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배웅조차 못 할 뻔했습니다. 가시는 길에 예우를 갖추고 싶었는데…….”

“필요 없다.”

“허허, 허례허식을 싫어하시는 성정은 여전하십니다.”

칼칼한 목소리로 잠시 웃던 당염초는 곧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짙은 색의 비단옷에 흙이 묻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난위정 역시 단정히 꿇어앉았다.

당염초는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약선 어른께서 사천당문에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죽은 뒤 제 다음 대의 문주가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삼가며 보답하겠습니다. 이미 수많은 심려를 끼쳐 드린 끝에, 염치없으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약선 어른을 다시 한번 만나 뵙는 것입니다.”

“…….”

“이곳에 본적을 둔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며 스스로도 정진하겠습니다. 약선 어른께서 주신 기회를 허투루 쓰지 않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몇 번이고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우뚝한 섟을 열렬히 토해 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염초는 천천히 조아렸던 고개를 들었다. 예상한 대로, 초윤과 아이들의 신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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