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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45)화 (45/257)

45화

“그래, 그래야 마땅했다. 하지만 화산과 함께 해 먹기로 한 게 있으니 덜컥 손을 쓰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보내 주자니 괘씸하고……. 특별히 아량을 발휘해 그놈만 놓고 가라 했는데 그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쩔쩔매는 건지. 결국 다 죽일 뻔하지 않았느냐.”

“하하, 그렇지. 큰일 날 뻔했지! 그런 자식도 동문이라고 막아선 놈은 정말 웃겼다고!”

‘해 먹다.’

고아한 약선의 입에서 듣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속된 단어가 튀어나와 관중들에게 충격을 준 것도 잠시, 곳곳에서 소리 없는 경악이 터졌다.

그 어떤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백호철이 약선의 말에 멍청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백을 받아 낸다고 하기보단 동의를 구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증명으로는 충분했다.

이제 화산파가 녹림과 작당하여 사천으로 향하는 길을 틀어막고, 그사이 화산파에 도움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의 재물로 부차적인 수입을 올렸다는 것은 정말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 자리에 모인 당문도들이 전부 들었으니 무를 수도 없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장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경합에서 진 것은 둘째 치고, 전쟁이 정말 불가피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그것도 대척점에 서던 사파나 마교가 아니라 같은 진영인 명문 정파와의 진흙탕 싸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약선은 원하는 말을 받아 냈음에도 멈추지 않고 백호철을 조금씩 더 구슬렸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우려낸 낭탕근 차를 한 잔 더 따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영리한 수였다. 눈엣가시인 사천을 말라 죽게 하면서 동시에 괜찮은 수입이 되지 않았더냐.”

“그렇지, 그렇고말고. 말코도사들이 받은 돈도 나눠 먹었다고. 우리 애들 무기도 요 몇 년 사이에 싹 갈아 줬어. 철퇴 쓰는 웅비 놈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하지만 네가 직접 하기엔 영 수준이 맞지 않는 일이었지. 화산파가 없으면 잡아먹고, 있으면 보내 준다니. 녹림왕의 면이 서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지금 몸소 깃발을 걸어 올린 것이냐.”

이번 상행에 함께 따라 나섰다 돌아온 몇 명의 무사들이 약선의 의문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자아가 비대하고 자만심이 큰 녹림왕 백호철이 평범한 산적처럼 노략질을 하다니, 듣고 보니 그냥 넘어가기 힘들 정도로 이상했다. 손님을 맡느라 이 자리에 없는 난위정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교묘한 부분이었다.

경합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백호철의 대답에 집중했다. 백호철은 여전히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얼굴로 앉아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그분께서…… 당문에 그 소식이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당문처럼 보이는 놈은 반드시 붙잡으라고…….”

그분? 그 소식?

신물에 관한 것을 알고 있는 장로들의 얼굴이 다시없을 만큼 험악해졌다. 그러니까 저놈의 뒤에서 이 일을 사주한 놈은 사천을 신물 전쟁에서도 완전히 고립시키려 했다는 뜻이었다.

약선께서 더 자세히 심문해 주시겠지. 장로들은 분노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잘 말하나 싶었던 백호철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뒤로 세게 젖혔다.

“……크헉!”

백호철이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근육은 돌이 되어 가듯 딱딱해진 채 경련하고, 관절은 이상하게 비틀어졌다. 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검은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당염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이런, 금제다!”

금제(禁制)란 대상의 정신에 ‘하면 안 되는 것’을 단단히 박아 둔 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곧장 뇌나 단전이 망가져 죽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너무나도 잔인하고 비인도적이기에 주로 마교에서 사용했지만, 기밀을 완벽히 유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정파에서도 아주 가끔씩은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백호철은 지금 당염초가 몇십 년 전에 보았던 마교도의 최후와 비슷한 수순을 겪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분’의 존재는 절대 발설하지 말아야 할 금기 사항이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백호철의 죽음을 막을 순 없다. 당염초가 난처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경합장에 내려가기 위해 발을 내디뎠을 때.

약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그락,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다반과 다구가 서로 부딪혀 소리를 냈다. 하지만 곧 탁자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쭈욱 옆으로 밀려나 약선의 앞에서 비켜섰다. 빙판 위에 있는 것처럼 매끄러운 움직임이 약선의 고강한 내공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아 그 와중에도 탄성이 터졌다.

약선은 순식간에 백호철의 앞으로 다가섰다.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였다. 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장막처럼 드리웠고, 무명옷의 넓은 소매는 백호철의 몸을 덮었다. 때맞추어 산에서 내려온 산바람까지 그를 등지고 불었다. 나부끼는 하얀 머리칼과 옷자락에 가려, 약선이 무엇을 하는지 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관중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로지 백호철의 양손과 무릎뿐이었다. 쩍 벌리고 앉은 백호철의 다리와 팔이 약선의 신형 양옆으로 튀어나온 채 덜덜 경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호철의 양팔이 동시에 추욱 늘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져 희미하게 흔들리는 백호철의 손을 본 사람들이 헛숨을 삼켰다.

약선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의자에 개구리처럼 늘어진 백호철을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떼고 조제 단상으로 걸어갔다. 지저분하던 백호철에게 닿은 것이 불쾌했던 건지, 아니면 약사로서 깨끗한 몸가짐을 유지하고 싶었던 건지 구비된 물 대야에 손을 씻었다.

얼빠진 얼굴로 멈춰 있던 당염초가 약선의 자약한 모습을 보고 삐걱삐걱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갔다. 혼절한 백호철을 한 번, 수건으로 손을 닦는 약선을 한 번 본 뒤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죽은…… 겁니까?”

“아니, 재워 두었다.”

그걸 살렸다고?

당염초를 비롯한 장로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금제에 걸려 즉사하기 직전의 사람을 살렸다는 이야기는 화타의 전기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이고 경악을 거듭하는 이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약선은 무심한 눈으로 백호철을 돌아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고독(蠱毒)을 썼더구나. 저자의 뇌에 심어진 벌레는 진즉 죽여 두었다. 다만 정신적인 충격은 꽤 받았을 터이니 당장은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꾸준히 기를 보하고 요양을 시켜라.”

“그럼…… 멀쩡히 일어나는 겁니까?”

“적어도 몸만은 튼튼한 자가 아니더냐.”

약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당염초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당문도들의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패배, 그것도 이렇게 처참한 패배가 또 있을 리 없다. 그가 이기리라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경합이 되지도 않았다. 실력을 겨루기는커녕 자신의 모자람만을 내비치게 되었다.

당염초가 오로지 고통에만 초점을 두어 불완전한 독을 만들었을 때 약선은 차 한 잔으로 굳게 닫힌 입을 열고도 모자라 고독을 죽이고, 죽을 게 당연한 사람도 살렸다.

그러나 압도적인 패배는 또한 사람을 바꾼다. 당장 넘볼 수도 없을 정도로 훨씬 위에 있는 경지를 엿본 이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절차탁마하게 된다. 그러지 못하는 자는 일찍이 버리고 가야 할 짐이며, 그럴 수 있는 자는 끝까지 키워 내야 할 될성부른 새싹이다.

그래, 이런 걸 바랐다. 좁은 땅에 고여 초심을 잃은 자들만 바글바글한 당문에 새로운 바람이 불길 원했다.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시기를 일삼는 장로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주어진 20년의 시간이 답답해 일탈만을 꿈꾸는 제자들은 원대한 꿈을 꾸길 원했다.

그리고 약선께선 정말 당염초의 원을 들어주셨다. 한 자락 실바람에 불과해도 감지덕지했을 텐데 폭풍을 일으켜 주셨다.

내실을 강하게 다지고 심성을 올곧게 세운 당문은 앞으로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가.

노인의 전신이 격한 감동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핀 손과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당염초는 바닥에 엎드린 그대로 머리를 조아렸다. 목이 메어 말 한 마디를 하는 것도 온 힘을 쥐어짜야 했다.

“당문에……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승리를…… 앙축 드립니다.”

문주가 절을 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문도는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당문의 사람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엎드렸다. 앙축 드립니다, 앙축 드립니다. 되풀이하는 목소리에선 처음의 비웃음이나 적대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천당문은 이날로 크게 도약할 발판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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