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저, 저거…… 저거 너무한 것 아니오! 경합을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나란히 앉아서 찻잔이나 기울이고 있다니!”
“쉿. 목소리를 줄여라, 상초야.”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지 않소! 약선의 저의가 의심되오. 경합을 무승부로 만들어 대업을 망치려는 작정이 아니라면 뭔 의도로 저런단 말이오!”
진행을 맡은 장로, 당상초가 펄펄 뛰었다. 당명초는 곤란함에 인상을 쓰면서도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도 지금 상황은 약선의 치졸한 보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문의 문주가 자백을 받아 내는 데에 실패한 것을 조롱하고, 화산파가 녹림과 담합해 당문을 모욕했단 사실을 영영 증명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당문의 앞길에 가시덩굴을 깔 생각이 아니라면 어째서 저러는 것인가.
한없이 나쁜 쪽으로 담론이 쏠리고 있을 때, 가만히 앉아 있던 당염초가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하거라. 너희들이 하고 있는 것은 억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주님!”
“조용히 하래도!”
당염초가 언성을 높이자 장로들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만이 가시지 않았는지 약선을 지켜보는 눈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당염초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약선 어른께서는 우리를 질책하셨지만 그 전에 말씀하신 것이 있다. 정녕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 전에 말씀하신 것이라면…….”
-가당찮은 수작에 나를 이용하는 것도, 미천한 열등감을 꺾지 못해 모욕을 일삼는 것도 이번만은 용납해 주겠다.
약선의 평온한 목소리가 모두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당상초는 그럼에도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볼멘소리를 했다.
“어디까지나 용납해 주겠다는 거지 어울려 주겠다는 말은 아니지 않소. 약선 대협은 경합을 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오!”
“쯧, 어리석긴. 네가 돼먹잖은 입을 놀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아직도 모르겠느냐.”
당염초가 혀를 차며 당상초를 노려보았다. 당문을 아끼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크지만 엄할 때 역시 누구보다도 무서운 문주의 시선이 날아와 꽂히자 당상초는 헙 입을 다물었다. 뭣보다 스스로도 찔리는 것이 있어 더욱 그랬다.
당염초는 아주 오래전, 동생들을 혼내던 맏형의 모습 그대로 일갈했다.
“어찌 그리도 생각이 짧더냐. 약선 어른께서 저치와 정말 차만 나누실 요량이셨다면 굳이 낭탕근을 들고 오셨겠느냐! 낭탕근이 무엇이냐. 잘 쓰면 약재지만, 잘못 쓰면 그저 독초가 아니더냐!”
“그, 그야…… 진통 효과가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오?”
“어허, 이놈이 아직도!”
호랑이 같은 노성에 당상초가 몸을 움츠렸다. 화를 내던 당염초는 곧 심란한 한숨을 푹 쉬고 관자놀이를 누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 모습이 처음으로 평범하게 근심 가득한 노인처럼 보여, 아랫줄의 장로들은 입을 뻐끔거리다 꾹 다물었다.
“그저 통증을 다스리려는 의도였다면 낭탕근을 쓰지 않으셨겠지. 눈엽각에 널린 게 방풍이고 천궁이며 만다라화에 청명류다. 아니 그러더냐.”
“……맞습니다.”
독과 약은 한 끗 차이였다. 독으로 쓰이는 것도 적절히 조절하면 약이 되고, 약으로 쓰이는 것도 양과 조합을 달리하면 극독이 됐다. 그렇기에 독으로 대성한 사천당문은 약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눈엽각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은 독뿐만이 아니라 온갖 약재들도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어쩌면 약학을 아는 이들이기에 약선과 자신의 차이를 절실히 느끼고 이리 배척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쓰게 웃은 당염초는 말을 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것,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까지 통달하신 분이다. 함부로 재단하지 말고 네 분수를 지키거라. 그래야 당문에게도 다시금 기회가 올 것 아니냐.”
“…….”
나이가 들며 아집과 자긍심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장로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노인들의 허탈한 눈이 경합장을 향했다. 이 세상의 사람 같지 않게 하얗고 깨끗한 약선과 속세에 물들어 추한 열등감만 내세우고 있는 자신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그때, 곧은 자세로 앉아 묵묵히 차만 마시던 약선에게 백호철이 팔을 뻗었다. 약선은 내밀어지는 흉터투성이의 손을 조심스레 겹쳐 잡고 자신의 쪽으로 당겨 왔다. 약선을 잔뜩 경계하던 백호철은 따뜻한 차 몇 잔에 마음이 풀렸는지 순순히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이제 무언가 일어난다. 직감한 사람들이 약선과 백호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이기려 하면서도 그 손끝에서 펼쳐질 신기(神技)는 눈에 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
백호철은 긴장이 풀리는 느낌에 코를 훌쩍였다.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끔찍한 고생을 한 뒤에 차 몇 잔으로 몸을 녹인 덕분인가, 살짝 졸리기도 했다.
뭣보다 조금 전까지 백호철을 괴롭히던 고민이 싹 가신 기분이었다. 뇌리에 남아 끈질기게 울려 퍼지던 동료들의 비명 소리, 무공을 잃은 채 철사로 만든 밧줄에 묶여 도심을 걸어야 했던 수치심, 실패한 일에 대해 추궁을 당하고 벌을 받을 미래 등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들이 아예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평온했다. 마치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진 것 같았다.
그래, 머릿속이 깨끗했다.
대신 입과 코 속이 좀 건조했다. 목도 탔다. 백호철은 손에 쥐여진 아담한 찻잔을 훌떡 들이켰다. 목을 뒤로 꺾어 가기까지 하며 남은 차를 마시려 했지만 바싹 마른 혀를 적시는 건 몇 방울의 식은 액체뿐이었다.
백호철은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으로 탁자에 잔을 탁 내려놓았다. 찻주전자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들고 있었다.
“더 주쇼.”
짤막하게 말했다. 산적 나부랭이밖에 되지 않는 몸이라 명문 정파라는 것들처럼 온갖 수식어를 사용해 꾸밀 여력은 없었다.
하지만 앞에 앉은 남자는 백호철에게 시선도 한 점 주지 않은 채 단아한 자세로 손에 든 찻잔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호철의 지저분한 손톱이 탁자를 톡톡톡 두드렸다. 마음이 급한 건 백호철뿐이었다.
“더…… 더 주쇼.”
혹여 못 들은 걸까 싶어 한 번 더 말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목소리를 좀 더 명료하게 내보았지만 남자의 연갈색 눈은 여전히 고요했다. 백호철의 눈이 부산스럽게 남자의 눈과 앞에 있는 찻주전자를 오고 갔다.
어떻게 해야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까. 백호철은 어느새 그의 비위를 맞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 더…….”
어떻게 해야 저 손에 들린 것을 받아 낼 수 있을까.
“더 주십시오.”
고민 끝에 백호철의 입에서 한결 공손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남자는 찻주전자의 손잡이를 들어 백호철의 잔에 기울였다. 백호철은 양손으로 예의 바르게 잔을 들고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허겁지겁 목을 축였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백호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축 늘어졌을 때, 마시라는 권유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손을 이쪽으로 내밀어라.”
그의 목소리는 뭍 가까이서 물결치는 얕고 잔잔한 파도 같기도 했고, 반대로 넓고 깊은 대양(大洋)이기에 고즈넉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괜찮겠지. 자신은 지금 이 남자 덕분에 고통이 가시고 고민도 잊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놓인 찻주전자가 아직도 탐이 났다. 다시금 갈증이 재발했을 때 저 물을 마시지 못한다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백호철은 멍한 기분으로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채 울퉁불퉁하고 지저분한 백호철의 손 위에 그의 손이 살포시 올라왔다. 분명 아담한 매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손인데 어째서 하얗고 곱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상황 판단 능력을 실시간으로 상실하고 있는 백호철이 얼떨떨하게 생각했다.
남자의 손과 닿은 곳에서 어느 순간 따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는 피부에 그치지 않고 백호철의 막힌 혈도를 타고 올라와 뇌까지 번졌다. 멈춰 있던 기맥과 얼어 있던 핏줄이 그의 인도를 따라 천천히 흐르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머리가 깨끗해지다 못해 저릿저릿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뇌 깊은 곳에서 무언가 퍽!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백호철의 입이 저절로 헤벌어졌다. 눈은 풀리고, 정신은 몽롱해졌다. 뭣보다 다시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백호철이 입맛을 쩝 다시자 차분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진령 산맥에서 너는 화산파의 제자들을 죽일까 말까 고민했지. 네 평소 성정과 기개를 보면 그런 것을 걱정할 사람이 아니지 않더냐.”
“어…….”
진령 산맥? 화산파의 제자?
백호철의 뇌리에 가소로웠던 검술을 펼치던 애송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금방 흐려져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를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표현을 바꾸어 다시 말했다.
“네 등에 칼을 꽂으려던 놈 말이다. 그런 은혜도 모르는 행실이라면 아예 전부 죽이고도 남지 않았겠느냐.”
“어…… 그렇지. 본주가 특별히 살려서 보내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명문 정파랍시고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 놈이……. 평소 같았으면 다 죽였지.”
백호철은 조금씩 떠오르는 장면에 고개를 끄덕였다. 흐리멍덩한 눈은 과거를 헤매고 있었고, 주위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잊어버렸다. 심지어는 마주 앉은 이가 누구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약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평온한 목소리로 백호철의 틈을 비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