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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30)화 (30/257)

30화

-너를 믿으니 이 명을 맡기겠다, 연아야.

화산파의 일대제자 이연은 스승의 말을 다시금 곱씹으며 검집이 매달린 요대를 단단히 조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도망칠 순 없었다. 스승님이 말씀하셨던 ‘최악의 상황’으로 일이 흘러간 이상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분이 나를 믿고 맡겨 주신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상상만 해도 가슴께가 저릿하게 아파 왔다. 스승님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걸고 있던 모든 기대를 거둘 터였고, 그러면 자신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꼭 해내야 한다, 연아야. 화산의 명운이 네 손에 달려 있다.

그러니 해내야 했다. 스승님의 소중한 화산을 지키기 위해.

1층의 식당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점점 작아졌다. 사람들이 자리를 파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연은 완전한 침묵이 찾아온 틈을 타 창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왔다. 몰래 챙겨 온 검은색 무복을 입고 있어 눈에 띌 일은 없었다.

이는 전부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일찍이 잠행술을 가르쳐 주신 스승의 혜안 덕분이었다.

이연의 발이 아무런 소음도 없이 바닥에 닿았다. 곧 그는 벽에 드리운 그림자와 동화되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척을 죽이는 데에는 타고난 바가 있었고, 거기에 절박함이 서려 사뭇 비장한 행보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이연은 맞은편 건물의 지붕 위에 숨어 들어갈 길을 모색했다. 이십에 달하는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다른 수는 없었다. 이 이상 사천과 가까워진다면 임무는 실패한다고 봐야 했다.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사들이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찍 교대를 하려는 것 같았다. 이연은 틈을 놓치지 않고 지붕을 넘어가선 문 위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물 흐르듯 들어갔다. 그리고 대들보를 잡은 뒤 소리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련의 행동에는 막힘이 없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던 탓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등과 겨드랑이까지 축축해진 느낌이었다.

이연은 마른침을 삼키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퀴퀴하게 쌓인 먼지와 밀가루, 오래 묵은 천의 냄새가 풍겨 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눈만 부릅뜨고 있는 백호철이 앉아 있었다.

이연은 함께 파견된 동문들은 모르는 백호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스승이 앞날을 보는 식견으로 이런 자가 나타날 것이라며 일러 준 덕분이었다.

또한 백호철은 사파의 녹림문도를 이끌며 민간인을 해치는 극악한 놈이니 손속에 자비를 두지 말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니 괜찮다. 도사 된 몸으로서 행하는 첫 살생으로 딱 맞는 놈이다.’

이연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조심스럽게 검을 빼 들었다. 검술의 유파를 알아낼 수 없도록 단번에 목을 찔러 죽일 생각이었다. 내공이 흩어지고 온몸을 점혈당한 채 움직일 수 없는 백호철의 이마와 목에 핏줄이 곤두섰다. 자신에게 닥칠 허무한 죽음을 예견한 모습이었다.

차갑게 식은 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쥐고 검을 내질렀다. 첫 살인에 대한 두려움에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검 끝이 와들와들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꼼짝도 못 하는 사람 하나 죽이기엔 충분히 예리하다고 자부했다.

빠르게 돌아가자. 옷에 피가 튀었을 테니 벗어서 돌돌 뭉치고 여관의 뒤뜰에 묻어 버리자. 아님 아궁이 안쪽에 보이지 않도록 밀어 넣고 내일 새벽 숙수가 불을 피우기만을 기다리자.

소심한 이연은 이후의 계획을 세우며 애써 마음을 다잡은 뒤 슬그머니 눈을 떴다. 목줄기가 잘려 피를 쏟으며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입술을 악물었다.

하지만 이연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었다.

“⎯허억!”

이연은 헛숨을 삼키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달빛에 비쳐 밀랍처럼 하얗게 뜬 얼굴이 백호철의 뒤에서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곧 그가 균열 같은 입술을 벌려 즐거운 목소리를 냈다.

“도사님, 이제 안강을 가로지르고 대파 산맥을 넘으면 사천입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이연은 화산을 위해 암살을 하다가 발각됐다. 이런 상황에서 다들 아는 행선지 얘기를 하는 난위정은 명백히 어딘가 비틀려 있었다.

이연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들어올 때만 해도 닫혀 있었던 광의 문은 활짝 열린 채 무복을 입은 사람들의 무리로 막혀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짐꾼들을 호위하며 함께 산을 넘은 상단 소속의 무사들이었다.

하지만…… 저 사람들이 이런 분위기를 풍겼었나?

이렇게, 검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고 두려운 이들이었던가?

순간, 이연의 뇌리에 한 줄기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리꽂혔다.

이들은 처음부터 속이고 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실력자라는 것을 능히 감출 수 있는 고수들을 지닌 조직이 화산을 농락한 것이다.

그리고 사천에서 그것이 가능한 조직은 단 하나.

당문밖에 없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백호철을 뒤로 끌어당긴 난위정이 자박자박 앞으로 걸어갔다. 당혹감과 낭패감으로 변명을 할 주변머리도 남지 않은 이연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니 이제…… 다망하신 도사님들께 과분한 도움을 받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너희 산으로 돌아가서 처박혀 있어라.

“구양 대협께선 저와 대작을 하신 뒤 깊게 잠드셨습니다. 몸에 지장이 있진 않을 테지만, 아마 모레 낮은 되어야 깨어나실 듯합니다. 향류검객께서도 지금쯤은 푹 주무시고 계실 테고.”

⎯⎯순진하고 무능한 것들은 알아서 설득해라.

“도착해서 드리겠다 약속드렸던 은자 열 냥보다 훨씬 넉넉히 넣어 두었습니다. 이 정도면 며칠은 이곳에서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간만에 나오신 외유 아닙니까.”

⎯⎯벌써 까발릴 생각은 없다. 사천까지 동행한 것으로 해 줄 테니 얌전히 입 다물어라.

다 잡은 사냥감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심처럼 상냥한 말이 이어질 때마다 이연의 숨소리는 오열하듯 거칠어졌다.

위정은 부들부들 떨리는 이연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 그 위에 묵직한 비단 주머니를 올려 주었다. 은자가 서로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당장은 가진 것이 없으니 사천에 가서 마저 지불하겠다고 절박하게 말하던 것과는 효연하게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광의 문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은 단주의 고갯짓 한 번에 일사불란하게 길을 텄고, 위정은 이연의 등을 부드럽게 밀어 주며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가십시오, 어서.”

⎯⎯알아들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연은 정신없이 광을 달려 나갔다. 문가에 서 있던 무사와 어깨가 부딪혔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밀명을 실패했다는 불안감, 화산과 스승에게 폐를 끼쳤다는 죄책감이 미성숙한 인격을 막연히 짓눌렀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건 이 일로 인해 스승에게 버림받는 것이었다.

이유 모를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인생이 이미 빼앗긴 지 오래라는 것을 모르는 불쌍한 이의 몰락이었다.

위정은 그의 안타까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폭 쉬었다.

“은밀히 처리하고는 싶은데 도사 된 이름으로 암살단을 키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살문에 맡기자니 치부를 틀어잡히는 격이고. 그렇게 해서 나온 절충안이 결국 저거군요. 긍지 높은 화산의 제자라면서 어설픈 잠행술이나 가르치다니.”

“살생을 하기에는 정신력도 꽤 나약한 것 같았습니다. 이자에게 사적인 원한이 있어 개인적으로 감행한 일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어둠 속에 있던 조우일이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위정은 픽 웃으며 한 손으로 가볍게 백호철의 멱살을 잡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았다.

“세뇌라는 게 그런 법입니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시야가 편협해지도록 만들죠.”

“……세뇌를 당한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금제를 가하거나 충성심을 심는 것만이 세뇌의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세뇌가 더욱 악질적인 편이랄까요.”

자신도 이연과 마찬가지로 속아 넘어갔고, 심지어 미끼로 쓰이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된 백호철은 이제 위정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점혈을 당한 데에 더불어 중요한 혈도 24곳에 세침이 박힌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 도사가 화산파로 곧장 돌아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면 어떻게 하실 요량입니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야단맞을 일을 눈앞에 둔 아이들은 언젠가는 들킬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숨기고 덮으려 하니까요. 설령 대쪽 같은 구양 도사가 있는 그대로 얘기한다 해도 이자를 손에 넣은 이상 화산의 약점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위정은 백호철의 어깨를 살갑게 도닥이고 돌아섰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절도 있게 나열해 있던 무사들이 단숨에 자세를 풀고 타박타박 숙소를 향해 흩어졌다.

“이제 화산을 데리고 사천에 들어갈 필요는 없어졌지만…… 그보다 더 큰 폭렬탄을 떠안게 생겼으니 가주님께 단단히 혼이 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약선께서 함께해 주셔서 그런지 마음이 든든하네요. 무슨 일이든 벌여도 될 것 같아요.

위정이 광에서 나와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완벽하게 유쾌한 밤이었다.

그리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을 숨긴 채 이 모든 해프닝을 듣게 된 초윤은 입을 떡 벌렸다.

뜬금없이 뒤통수를 후려 맞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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