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애초에 무공이 고강한 경지를 이룩하면 웬만한 독은 통하지 않았다. 만독불침이나 천독불침은 아니더라도 즉사성이 없는 독 몇 가지 정도는 능히 견딜 수 있었다.
더군다나 백호철은 중검을 주무기로 한 패도적인 무공과 외공을 단련한 건강체였으니 기껏해야 마비산에 당해 쓰러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만다라화 말고 다른 것도 여럿 섞은 것 같은데…… 누가 어떻게 중독시켰는지가 관건이군요. 아니, 아무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자, 다들 정신 차리세요!”
위정이 짝짝 손바닥을 마주치며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는 진령 산맥 아닙니까. 아무래도 지나가던 신수(神獸)나 기인께서 도움을 주셨나 봅니다. 마음 깊이 감사하게 여기며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합시다! 기껏 생긴 기회인데 멀거니 있다가 다들 다시 깨어나면 안 되니 말입니다.”
그 말에 무사들은 퍼뜩 정신을 차린 뒤 들고 있던 검을 갈무리했고, 짐꾼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정의 깔끔한 말이 이어졌다.
“혹시 모르니 무사님들은 반으로 나뉘어서 한쪽은 주변을 경계해 주시고, 다른 쪽은 이들을 단단히 구속해 주세요. 인부 분들은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가능한 만큼 챙겨 주시고요. 안강에 도착하면 무기를 판 돈으로 여독을 푸셔도 됩니다!”
볼품없는 산적들이 엉망으로 쓰던 무기였지만 그래도 철이다. 녹여서 쓸 곳이 무궁무진하게 많은 철 6근이라면 전 단위로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런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말이 들려오자 짐꾼들의 얼굴에 금세 기쁨이 번졌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덕분에 현장 수습은 수월하게 이뤄졌다. 남다른 수완으로 상황을 정리한 난위정은 다음으로 구양선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구양 대협,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대협께서 용맹하게 맞서 싸워 주신 덕분에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어…… 예? 아니, 아닙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쏟아지는 감사 세례에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구양선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우유부단하게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휘둘리기만 했을 뿐.
하지만 위정은 꿋꿋이 구양선에게 머리를 숙였다.
“사천의 일개 상단에 불과하지만, 화산의 ‘도움’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 사람들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그것 참…….”
멋쩍은 듯 안절부절못하던 구양선이 화제를 돌렸다.
“저, 채주라는 사람도 같이 구속해서 압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신이 들면 웬만한 건 풀어 버릴 텐데,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마침 구매한 물품 중에 철사를 꼬아 만든 조승(粗绳)과 효과 좋은 산공독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할 수 있으니 대협께 다리를 제외한 상체의 점혈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자를 업고 산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비단을 취급하는 상단이 철조승과 산공독을 구매했다고?
한 줄기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당문의 직속 상단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구양선은 그런 걸 일일이 파고들어 생각할 성격이 아니었다.
철로 된 밧줄과 작은 병을 건네받은 구양선이 털레털레 놓친 검을 줍고 백호철에게 가는 모습을 본 위정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백호철과 대치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어디를 향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관망하던 위정은 보았다.
절정에 이른 고수가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누구인지.
◇
[스승님, 스승님께서 하신 일이 맞습니까?]
혹여 곤란할까 봐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전음으로 물어보는 목소리.
죽립 밑으로 힐끗 시선을 옮기자 올려다보는 천오의 새까만 눈이 동경인지 자부심인지 모를 광채로 일렁이고 있었다.
“…….”
초윤은 그 기대 가득한 질문에 차마 대답할 수가 없어 아이의 머리만 가볍게 쓰다듬어 준 뒤 등 뒤에 있던 남매를 살폈다.
“사영, 사현. 다친 곳은?”
“없습니다, 스승님.”
“어…… 없어요.”
차분하게 대답한 아이들이 정리를 도우러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초윤은 아무 생각 없이 아이들을 보내다가 문득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근데 어떻게…… 저렇게 침착하지? 그냥 멘탈이 강한 건가?’
사망자도 없고, 크게 부상을 입은 자도 없었다지만 그래도 날것의 칼싸움이었다. 깊게 베인 사람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살기 어린 시선도 쏟아졌다.
그런 상황을 겪은 것은 분명 처음일 텐데 이상하게도 애들 눈에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천오야 타고난 게 있으니 그렇다 쳐도 사영과 사현까지 태연한 것은 좀 이상했다.
‘무협지 애들이라서 다른 건가, 아니면 이전에 본 적이 있는 건가……. 초윤과 여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 무림인들의 싸움에 휘말렸던 것 같아서 무서워할까 봐 걱정했는데. 뭐, 괜찮은 것 같다면 다행이지만.’
어느 쪽이든 애들에게는 보호자가 모르는 사연이 한둘쯤은 있는 편이다. 귀엽고 궁금하기는 해도 아주 이상한 게 아닌 이상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 좋다.
생각을 마무리하고 초윤도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행렬의 앞에 있던 난위정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초선 형님, 괜찮으십니까? 아이들은요?”
“전부 무사합니다. 상단의 무사 분들 실력이 대단한 것 같았습니다.”
“20년간 직접 키워 낸 인재들입니다. 이런 곳에서 잃어버릴 인력이 아니지요.”
묘한 말이다. 초윤은 능숙한 손길로 산적들을 묶는 무사들에게 시선을 던지다가 넌지시 말했다.
“채주라는 사람은 어떻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잘 포박해서 데리고 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질 좋은 산공독과 철조승이 있어서요.”
“안강에 넘기실 겁니까?”
“아니요.”
위정의 귀공자 같은 얼굴이 해사하게 일그러졌다. 웃음보다 균열처럼 보이는 것은 분명 속내가 깨끗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초윤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말끔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사천의 사람에게 해를 입혔으니 사천에서 벌을 받게 할 겁니다.”
“……이만한 인원을 데리고 산맥을 두 개나 넘긴 힘들 것 같습니다만.”
“우두머리만 데려가야죠. 저들은 따라오지 못하게 포박만 한 뒤 풀어 줄 생각입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에 한나절이 걸렸으니 열심히 산을 내려가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겁니다.”
효율적인 판단이다. 팔이 뒤로 묶인 채 산길을 내려갈 한 무리의 산적들을 생각하면 웃지 못할 일이지만.
위정은 곧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대형을 정비하기 위해 행렬의 앞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단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채 질질 끌려가던 백호철이 눈을 떴다.
◇
사파의 한 축을 담당하는 녹림왕 백호철은 외공(外功)으로 유명했다. 영물에 속하는 벽력호(霹靂虎)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소문도 있었으며, 웬만한 도검은 그의 피부에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설사 내력이 전부 흩어졌다 한들 근육 한 올 한 올에 실린 노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외공의 절정 고수는 근력만으로도 거뜬히 장정 십수 명을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호철은 지금 팔과 손목이 꽁꽁 묶인 채 얌전히 두 발로 걷고 있었다.
앞뒤로 걷는 다섯 명의 무사가 위협이 된 것은 아니었다. 백호철을 순한 양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귓가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전음이었다.
[쓸데없이 뒤를 돌아보지 말거라. 허튼소리를 하지도 말거라.]
자신에게만 들리는 이 목소리는 살벌한 권고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고 잔잔했다. 백호철은 묶인 손을 꾹 주먹 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괜한 저항을 해서도 안 된다. 얌전히 걷도록.]
그저 독공의 고수라면 이렇게 벌벌 떨지 않았을 것이다. 백호철은 자신의 단단하고 강인한 육체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
어떻게 하독(下毒)을 했는지, 무슨 독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외공의 절정을 이룬 자신을 버러지처럼 쓰러트린 독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고, 그 독이 어떠한 경로로 자신의 몸에 들어온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어렴풋이나마 바람을 탄 가루나 독초를 태운 연기가 아닐까 싶지만, 이조차도 백호철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코가 간지럽지 않은 가루나 냄새 없는 연기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모르는 이상 원거리에서 자신을 중독시킬 수 있는 고수에게 무턱대고 반항할 순 없었다.
자신을 경계하는 화산파의 애송이가 뒤에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에 날뛰고도 남았을 백호철이 왜 가만히 있는 건지 의아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독을 쓰는 저 비겁한 놈만 아니라면 이따위 상단쯤이야 진즉 뒤엎고 나갔을 텐데.
72채의 녹림을 호령하는 녹림왕 백호철이 일개 상단 무사들의 손에 묶여 맥없이 걷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의 검에 목숨이 달려 있던 애송이가 거드름을 피우며 감시한답시고 설치는 것도, 말이나 마차를 타고 있는 게 아니라 제 발로 걷고 있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하물며 이대로 안강에 들어간다면 사람들의 시선이 어떨 것인가. 게다가 사천이라니! 사천으로 들어가기 위해 넘을 대파 산맥에는 또……!
생각을 하면 할수록 한 걸음, 한 걸음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드높은 자존심을 지닌 백호철에게 이러한 수치를 안겨 주는 것은 혀를 깨물고 죽으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짓도 곧 끝이다.’
백호철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흉포하게 웃었다. 모두가 앞을 향해 걷는 와중에 그의 웃음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오히려 다행이지. 그리고 나를 이대로 넘겨주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견디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신을 빼내지 못해 안달 난 이들이 어떻게든 할 테니까.
중천에 걸렸던 해가 점차 기울며 땅거미가 깔렸다. 험했던 길은 조금씩 완만하게 트이고 있었다.
저 멀리 내려가는 길 끝에 사람이 사는 도시와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안강 시의 초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