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거기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서 나와라!”
“…….”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튀어나오지 않으면 가까운 놈부터 베어 버릴 것이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구양선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맑은 금속음이 챙 하고 울리자 길 양옆으로 난 수풀이 부슬부슬 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 숨어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하나둘 튀어나와 길을 막아섰다. 짐꾼과 무사들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흔들림 없는 자세로 검을 빼 든 채 겨눈 구양선에게 맞서 어설픈 몸짓으로 무기를 꺼내 든 산적 중 한 사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단을 보다가 기겁을 했다.
“으, 어, 채, 채주님, 저거 화산파의 문양이요!”
“뭐? 화산? 화산파가 왜 여길 와?”
“미친! 망본 새끼 누구야!”
화산파의 위명에 겁을 먹은 산적들이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초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죽립 너머로 산적들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야위고 더러운 몸, 낡아서 해진 옷과 무두질도 제대로 하지 않은 짐승 가죽, 까맣게 썩어 가는 이와 녹슬고 깨진 무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에 반해 산적들의 소란을 쉽게 잠재우고 저벅저벅 걸어 나온 남자는 잘 먹고 잘 살았는지 꽤 때깔이 고왔다.
“고명하신 화산의 도사님들이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이런 산골 벽지까지 오셨나.”
“네가 이 패거리의 두목인가?”
“거 어린놈의 새끼가 말이 아주 짧네. 화산에서 어른 공경은 안 가르쳐 주나?”
우람진 풍채의 남자가 허허 웃으며 제멋대로 자라난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러자 뒷짐을 진 채 구양선의 뒤에서 관망하던 유명우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산적들이 화산파라는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떠는 것을 보고선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녹림은 공경할 어른이 아니지. 말마따나 산골 벽지에서 갈취나 저지르며 근근이 살아가는 것들을 대(大) 화산파가 헤아릴 필요가 있겠느냐. 이 이상 지저분한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 길을 비켜라.”
“어이구, 비켜 드려야지. 아무렴 위대한 화산파의 제자님들이신데.”
일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간다.
채주라는 남자가 나타났을 때부터 초윤은 죽립 안에서 작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짙은 눈썹과 성긴 머리카락, 산적답지 않게 고급스러운 중검에 어깨 한쪽에 두른 백호 가죽까지 전부 초윤의 기억에 있는 인물과 판박이였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당황스러워서 지켜만 보던 찰나, 아니나 다를까.
철썩!
찰진 소리와 함께 유명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볼에 빨갛게 달아오른 손자국이 남았다. 입술은 터졌고, 단정하게 묶어 화려한 장식을 했던 머리도 한 방에 산발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일격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본 사람은 이 무리 중 단 세 명밖에 없었다.
“……뭐, 뭐야?”
“이런……!”
유명우가 황망한 얼굴로 입가에 묻어난 피를 닦았다. 검을 들고 있던 구양선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저 남자의 짓이라는 것은 확실했는데, 삼 장 밖에서 날아온 공격을 알아채기는커녕 보지도 못했다.
단 한 수로 상대방과 자신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고수다!’
그것도 상당한 고수. 이류와 일류 사이에 있는 자신과는 결이 다른 절정 고수.
싸워도 이길 수 없는 것을 알았지만, 구양선은 이를 악물고 검을 쥔 채 자세를 잡았다. 남자는 느물느물하게 웃더니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거 조심하쇼. 요즘 새 떼들이 어찌나 독이 올랐던지 눈먼 날갯짓에 뺨따구를 맞는 일이 빈번하오. 화산파랑 싸울 수는 없으니 이 지저분한 무리는 이만 비켜 드리겠수다. 얘들아, 가자!”
“채, 채주님!”
남자가 등을 보이자 구양선은 참았던 숨을 파학 터트렸다. 기세를 정면으로 마주한 것도 아닌데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도 싸우지 않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생각했을 때.
“……이익! 보잘것없는 산적 놈이 감히!”
“안 돼, 유 형!”
모욕을 당한 유명우가 검을 빼 들고 달려가 남자의 등을 찔러 들어갔다. 명문 정파인으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낭패감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 어, 어떻게!”
“쯧, 화산도 한물갔군. 이딴 애새끼도 제자라고 키우고 있다니.”
유명우의 검날은 어느새 뒤로 돈 남자의 맨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그는 손에 힘을 주는 기색도 없이 잡은 패검을 부쉈고, 유명우는 그와 동시에 뒤로 벌러덩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 내 검이…… 내 검이.”
“유 형! 이리로 오십시오!”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유명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구양선이 달려 나가 유명우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 일련의 일이 벌어질 동안 남자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그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 예상이 간 초윤은 아이들을 데리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큰일 났다.
애들이 보면 안 될 장면이 나오게 생겼다.
“흠……. 죽이면 안 되는데, 죽여도 될 것 같고……. 죽일까, 살릴까?”
남자가 검 조각을 털어 버린 손을 쥐었다 펴며 중얼거리자, 유명우가 ‘히이익!’ 하고 놀라며 의뢰인인 난위정의 뒤에 숨었다. 위정은 일개 상단주답지 않게 평온한 모습이었다.
“……유 형이 사과를 건넬 여유가 없는 것 같으니 대신 사과하겠소. 미안하오. 돌아가면 문책을 받을 테니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시오.”
결국 이번에도 말을 꺼낸 건 구양선이었다. 그는 꺼냈던 검을 다시 집어넣고 고개를 숙여 남자에게 묵례를 했다. 누가 보아도 정중히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초윤은 좀 떨어진 곳에서 몰래 속으로 구양선을 응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일이 수습되고 피를 보는 일 없이 원만히 넘어갔으면 했다. 애초에 초윤이 예상한 그림에 이러한 사건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초윤이 바라지 않는 방향대로만 나아갔다.
“그 오줌 지리고 있는 애새끼 하나만 건네. 그러면 내 깔끔히 비켜 드릴게.”
“흐억!”
“……유 형도 엄연한 화산파의 일원이오. 건드렸다가는 당신에게도 좋을 일이 없을 텐데.”
“그놈이 멀쩡히 갈 길 가려던 사람 등에 대고 칼질한 장면을 몇 명이 봤는데. 이게 알려지면 화산파의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파문을 하시겠지. 안 그러냐?”
“그, 그럴 리가! 화산파는 날 버릴 수 없어!”
“그럼 너네는 여기서 다 죽는 거고.”
남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낄낄 웃었다. 진퇴양난의 처지에 몰린 구양선의 머리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난위정이 구양선에게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승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
구양선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회의 정도는 관대하게 기다려 주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낮게 내리깐 난위정의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제 옆에 계신 조 무사님은 거금을 들여 모셔 온 일류 무사입니다. 이분과 화산파의 세 분이 합공을 하신다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
“짐꾼들은 상단의 무사들이 지켜 줄 테니 채주 이외의 녹림도를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여기서 화산파의 도사님을 희생한다면 저희도 앞으로 섬서성에서 장사를 할 수 없고, 그럴 바엔 죽어도 같이 죽는 편이 낫습니다.”
“…….”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일류 고수 열 명이 달려들어도 이길 수 있을지 점칠 수 없는 게 절정 고수와의 차이다.
하지만 마냥 못 들은 것으로 치기도 어려운 제안이었다. 난위정의 말마따나 여기서 유명우를 넘기고 살아 나간다면 오히려 화산파에 동문을 팔아먹었다는 오명을 씌우는 셈이었다.
구양선의 진중한 눈에 치열한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곧 손을 내밀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유명우를 일으켜 세우고 뒤에 숨어 있던 이연을 불렀다.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초윤으로선 속이 터지는 일이었다.
‘아니, 난위정 쟤는 또 갑자기 왜!!!’
고함을 참고 있자니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옆에 서 있던 천오가 의아한 듯 죽립 안쪽을 올려다보았다. 초윤은 아이의 손을 잡고 남매를 이끌어 짐꾼들의 가운데로 최대한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셋에게 같은 전음을 보냈다.
[일이 터지면…….]
진짜 어떻게 하지?
싸우라고 해? 눈을 감으라고 해?
이 아이들이 변변찮은 산적을 당해 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열다섯, 열셋, 열한 살의 애기들한테 칼질을 하고 싸우라고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물론 무림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였지만 초윤은 일반적인 무림인이 아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가운 정신으로 있어라. 함부로 나서지 말고 내 곁에만 있어야 한다.]
결국 선택한 건 차선이었다. 무기를 든 산적들이 천천히 산개해 상단을 에워쌌다. 아무래도 채주가 회의의 내용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초윤은 불안감에 숨이 거칠어진 짐꾼들을 똘똘 모으며 구양선이 있는 쪽을 힐긋 보았다.
행동할 시기만 재고 있을 때, 전음 한 가닥이 날아왔다.
[스승님, 스승님이 나서서 해치우시면 안 됩니까?]
“…….”
천오의 순진한 물음이었다. 초윤은 대답을 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아니, 되긴 하지. 되긴 하는데 그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이십 년 전에 자신이 한 문파의 자존심을 똑 분질러 놓았고, 그로 인해 바로 이 상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재기를 위해 겨우 나온 곳에서 얽힌 대상이 하필이면 또 자신이고, 거기다 하필이면 캐릭터 외관 특징에 눈에 띄는 백발이 있어서 죽립만 벗어도 들통날 가능성이 높다고 어떻게 말할까.
거기다가 저기서 대치하고 있는 채주라는 남자는 녹림왕 백호철이고, 백협맹의 썩은 부분과 내통하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중원에 하산한 약선과 세 제자에 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질 거라고, 그럼 일이 사사건건 아주 귀찮아진다고 어떻게 말할까!
그렇게 아이의 의문도 해소해 주지 못하고 복잡한 심경을 애써 억누르기만 하던 찰나.
채앵⎯!
멀지 않은 곳에서 본격적인 교전의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