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결국 초윤이 술자리를 벗어날 수 있게 된 건 깜깜한 밤이 다 된 뒤였다. 함께 술을 들이켠 위정은 탁자에 이마를 박고 잠들어 있었다. 초윤은 가벼운 내공의 일주천으로 미미한 술기운마저 날려 보낸 뒤 의관을 정리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무심코 열중했네. 사영이랑 천오가 어련히 잘하고 있겠지만.’
조금 다급한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데 중간쯤부터 온갖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싶어 올라가기 전 아이들의 몸에 호신강기(護身罡氣)를 씌워 두고 내내 기척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걱정스러운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식당이 있는 1층의 광경을 본 초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
“저기서 더 먹는다고? 저게 들어가?”
“어이, 꼬마. 더 먹을 수 있어? 더 줄까?”
“……그러면 아까 주셨던 기름 뿌린 면으로.”
“자, 자! 아직 한 분도 저를 못 이기셨잖아요! 팍팍 와서 따 가셔야죠. 이 돈 전부 저 주실 거예요?”
“이익! 아니, 분명 여기로 그 공이 들어가는 것을 내가 봤는데 금세 어디로 간 거야?”
“속임수 아냐, 속임수?”
“아, 그러니까 한 분이라도 맞추시면 전부 다 돌려 드린다니까요? 내가 누구야! 임사영이야!”
“이번엔 내가 가지! 내가!”
“괜찮겠어? 오늘 받은 일급도 다 썼다면서 이번엔 뭘 걸려구?”
“홀라당 벗더라도 내가 꼭 맞추고 만다!”
1층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믿었던 사영은 중년 한 무리를 데리고 성대한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객잔에서 너무 소란을 피운다며 제재를 가했어야 할 점소이까지 함께 도박에 눈이 멀어 있었다.
다음으로 객잔을 책임져야 할 주방의 숙수는 미친 듯이 먹어 대는 천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열한 살 아이 배 속에 들어간 게 얼마나 많은지, 천오가 앉아 있는 식탁에는 빈 그릇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애가 얼마나 먹는지 구경을 하는 인파도 만만찮게 많았다.
마지막으로 제일 걱정했던 사현은 오히려 비교적 얌전했다. 나무 컵 다섯 개를 엎어 놓고 야바위를 하는 누나 옆에서 돈을 걷고 배당을 관리하며 사람들의 흥을 더욱 돋우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니, 아무리 애들이 보호자 없는 곳에서 온갖 짓은 다 해 본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평소 보고 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아이들의 일면에 잠깐 아연해졌다.
우두커니 굳어 있는 스승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세숫대야만큼 커다란 그릇을 들고 음식을 흡입하고 있던 천오였다.
“……스승님, 오셨어요?”
초윤을 본 천오가 입가를 슥슥 닦고 말했다.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식당의 반대쪽에 있던 사영과 사현도 초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란스러웠던 식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 그, 스, 스승님! 이건 그게, 다름이 아니라 애들이랑 같이 했던 놀이를…… 야, 빨리 돈 내려놔!”
“어, 헉!”
계단 밑에 서 있는 스승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사영이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허둥지둥 변명을 했다. 옆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사현을 팔꿈치로 툭툭 치며 눈치를 주기도 했다.
초윤은 곧 내려질 불호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주눅이 든 아이들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어른들을 가만히 보다가 단정히 허리를 숙였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동안 아이들을 돌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 아이들도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듯합니다. 사영, 사현. 처음 딴 돈을 제하고 전부 돌려 드리렴.”
“엇…… 네, 스승님.”
아이들은 초윤의 말에 조금 놀란 듯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부산스레 돈을 나누기 시작했다. 쌓여 있던 돈과 밀가루가 본래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윤은 그동안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숙수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천오를 챙겨 남매의 곁으로 갔다.
“처음 걸어 주신 돈은 아이들에게 주신 용돈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늦은 시간이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만, 만약 단주님께서 일어나신 뒤 저를 찾으신다면 청풍객잔에 있다는 말을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영, 사현, 천오. 뭐 하니. 감사 인사를 하지 않고.”
“어……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요.”
“가, 감사합니다.”
“……맛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빠르게 정리되는 상황을 조금 멍하니 지켜보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호탕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배웅했다.
“아가씨 덕분에 다들 재미있었다고. 딴 돈으로 탕과라도 사 먹어!”
“그래, 그래. 용돈이라고 생각해!”
“저희도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봬요!”
“아니, 그건 좀. 또 하면 그때는 정말로 홀라당 벗고 집에 갈 것 같거든. 마누라한테 죽어!”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기쁜 얼굴로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챙겨 객잔을 나왔다. 날은 어두워진 지 오래였지만 인파는 그다지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초윤은 비교적 어린아이 둘의 손을 잡고 사영에게 앞서 걷게 했다.
“그런데 스승님, 저희 혼나지 않는 건가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던 사영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초윤은 새삼스럽게 열다섯 살, 한국식 나이로는 열일곱 살이 되어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된 사영이 참 많이 컸다 생각하며 말했다.
“혼난다니?”
“도박을 했잖아요. 보통은 그러면 엄청 혼나던데.”
물론…… 혼나지. 원래 세계였으면 혼났지.
하지만 이곳의 상식은 달랐다. 현대의 인간처럼 살다 보면 굶어 죽기 딱 좋은 세상이었다. 초윤이 곰곰이 생각하며 천오와 맞잡은 손을 조금 끌어당겼다. 일부러 부딪칠 요량으로 멀리서부터 걸어오던 사람이 조금 휘청거리다가 욕을 하며 지나갔다.
“주의를 줄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은 너무 크게 일을 벌였어.”
천오가 고개를 돌려 새까만 눈으로 지나간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초윤은 조금 무섬증이 일어 앞을 보라는 듯 잡은 손에 꼭 힘을 주었다.
“운이 따라 줬기에 망정이지 돈을 잃은 것으로 앙심을 품은 자가 있었다면 어찌하려고. 세상에는 너희들의 생각보다 마음 좁고 막무가내인 어른들이 많다. 아이 셋이라고 우습게 여기며 겁박할지 어떻게 알 것이냐.”
“그래서 돈을 돌려주라고 하신 건가요?”
“그래. 더군다나 태반이 상단의 짐꾼이었는데, 오래갈 수도 있는 사이에 앙금을 만들어 봤자 좋을 일은 없었다.”
아직 행선지를 정확히 정한 건 아니지만 원한은 적을수록 좋았다. 설령 일방적이고 억울한 원한이라도 애들 키우는 입장에선 피해야 했다. 세상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까.
사영은 동전이 들어 있는 품속의 주머니를 매만지며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럼 처음 딴 돈은 왜 가져도 된다고 하신 건가요?”
“아무리 속임수라 해도 네가 비범한 재주로 번 돈인데 몽땅 내놓으라 하면 수지가 안 맞지 않느냐.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돈은 남겨 둬야지.”
자고로 도박은 처음은 호기심, 두 번째는 자신감, 세 번째부터는 오기다. 첫 돈은 언제나 없어도 상관없는 만큼만 걸게 되어 있으니 아이들이 가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쁘다고 막지는 않겠다. 그저 무엇이든 스스로의 역량을 정확히 깨닫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하거라.”
아이들은 보호자가 이건 절대 안 돼! 하고 철저히 차단한 것에 오히려 더욱 큰 흥미와 집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보호자의 눈을 피해 어떻게든 더욱 몰두했다.
정말 기상천외한 온갖 방법을 이용해 하지 말란 것만 더 찾아 하는 습성,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꽁꽁 틀어막는 것보다 적당히 열어 주는 게 중요했다.
‘소설책을 읽지 못하게 하면 커서 장르 소설에 빠져 있고, 만화책을 읽지 못하게 하면 오타쿠로 자라는 거나 마찬가지지. 애들이 정말 하고 싶어 하면 결국 못 막아.’
문득 느껴지는 집요한 시선에 잠시 밑을 보자, 천오가 빤히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초윤은 그 조그만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너희 전부에게 하는 말이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뭐, 너는 자신의 역량을 재고 말고를 떠나 할 수 없는 게 없어질 테니까. 세계관 최고 보스한테 못 할 게 어디 있어.
초윤은 가볍게 생각하며 다시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때, 반대쪽 손을 잡고 있던 사현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멈춰 섰다.
“누, 누나, 저기 간식…….”
“어? 스승님! 현아랑 잠시 다녀올게요!”
“여기 있을 테니 넉넉히 사 오렴.”
불이 환한 한 객잔 앞에서 늦게까지 간식을 팔고 있었다. 사영과 사현은 희희낙락하며 점포로 달려갔지만 천오는 초윤의 손을 꼭 잡은 채 옆에 서 있었다.
얘가 간식을 싫어하는 애는 아닌데. 초윤은 부드럽게 물었다.
“사저를 따라 다녀오렴. 저들 것만 살 아이들은 아니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배부릅니다.”
……하긴. 그만큼이나 먹었는데 배가 안 부를 리 없지. 천오의 탁자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그릇을 떠올리고 쉽게 납득했다.
“전에 없이 많이 먹더구나. 속이 아프거나 더부룩하진 않더냐.”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는 느낌이 들지 않아 그랬습니다. 폐가 되었을까요?”
……아. 그건 좀 예상이 간다. 매일같이 밥에 온갖 영약이란 영약은 다 다져 넣었으니 먹을 때마다 원기가 충만해지고 내력이 증진되는 느낌을 받았겠지. 일반적인 식사로는 기대할 수 없는 효능이니 허전할 만도 했다. 초윤은 잡은 손을 엄지로 가만히 쓸어 주었다.
“네가 사람을 구한 몫이니 폐는 당치도 않다. 하지만 배앓이를 하지 않도록 다음부터는 세 그릇 이내로 먹는 게 좋겠구나.”
“예, 스승님.”
아구, 귀여워라. 이런 애가 어떻게 그 살인과 고문과 배신과 암투의 군주가 되겠어. 전부 교육이 잘못된 거지. 어렸을 때부터 애들 잠도 잘 안 재우고 죽어라 싸우는 법만 가르치니 제대로 클 리가 있겠어?
천오는 잘 웃거나 마냥 밝지는 않아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아이가 동그란 머리통을 주억거리며 대답을 하면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속은 껌뻑 죽었다. 공감 능력을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무언가 말하기 전에는 몇 번이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고, 모르는 것은 공손하게 물어보면서 납득하면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게 기특했다. 아직 한참 조그마한데도 조숙해서 예쁘고 안쓰러웠다.
배우는 속도는 괴물 같지만.
정말 몇 년 안에 쪽쪽 빨리고 더는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아서 초윤은 자신의 방대한 약학 지식도 함께 쏟아 주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공부하는 양이 너무 많은가 싶어 꼬박꼬박 쉬고 놀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오는 하루가 다르도록 발전하고 있었다.
나이 차와 서열이 있는 아이들 사이에 경쟁을 시키는 건 좋을 것 같지 않아 대련은 하지 못하게 했지만, 사현이는 이미 뛰어넘은 것 같았다. 그나마 사영이는 천오와 나이 차가 꽤 컸고 평소에도 독한 면이 있어 아직은 쉬이 져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사영이와 사현이가 아직도 천오에게 벽을 남겨 둔 것 같긴 해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스승과 막냇동생 먹을 것까지 바리바리 사 오는 아이들 아닌가. 초윤은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머무는 객잔에 향했다.
아이들이 정말 잘 커 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