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무심서로 돌아온 아이는 생각보다 순순히 초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속으로 무슨 결심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듯이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많이 나아졌다. 미친 듯이 무공에만 매진할 것 같던 예상과는 다르게 조급한 마음을 비치지도 않았고, 초윤을 상당히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만 가면 천오를 잘 키울 수 있겠다. 초윤은 희망을 품었다.
물론 이 희망은 며칠도 가지 않아 상상도 못 했던,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는 사실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
초윤은 무심서 근처에서 뛰어노는 아이 셋을 보며 내심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심’인 이유는 간단했다. 얼마 전 구리로 만든 면경을 찾아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 ‘초윤’이 절대 웃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어린아이를 대할 때 가장 좋은 표정은 미소였다. 언제나 밝고 긍정적으로 웃는 얼굴은 초등학교 교사의 덕목이었다. 하지만 ‘초윤’의 얼굴은 어찌 된 조화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웃을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괴상하게 찡그려지지도 않았다.
독초를 주워 먹어 안면 근육에 마비가 온 걸까 싶어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초윤’의 기억을 되짚어 보자, 그가 웃을 수 없는 이유도 아주 간결하게 떠올랐다. 그저 ‘초윤’이 태어나서 웃어 본 적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이 고리타분한 말투와 마찬가지로 ‘초윤’의 몸을 빌려 사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가능한 모든 시도를 해 본 정하윤은 이제 거의 포기한 채 현대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협지 스펙을 가진 ‘초윤’의 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애들한테는 꼬박꼬박 웃어 주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입맛이 좀 씁쓸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노력을 해 보든가, 무표정으로 굳어 버린 얼굴 대신 행동을 더 다정하게 해 줘야지. 초윤은 다시 다짐하며 약 맷돌을 굴려 마른 약초를 더욱 잘게 부쉈다. 환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초를 곱게 빻아 아예 가루를 내야 했다.
“이거 하나 못 올라오면서 뭘 같이 놀겠다고. 허약한 놈은 땅에서 놀아!”
“누, 누나…… 우리가 그냥 내려가자.”
“사저, 치사하십니다!”
어느새 사영과 사현이 다람쥐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가 아래에 있는 천오를 놀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영이 천오를 따돌리는 것을 놀이로 삼았고, 사현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며칠 지켜본 결과 사영과 사현은 활기차고 활발한 아이들이었다. 그중 동생인 사현은 소심하고 휘둘리는 면이 있었지만 온화하고 배려 깊은 성격이었으며 누나인 사영은 동생이 유한 만큼 날카롭고 예민했다.
그래도 동생을 천금보다 귀하게 여기고 아끼는 모습을 보면 애가 영 모진 애는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들어와 관심을 독차지하는 천오를 유난히 경계했다.
‘치료해 줄 때는 괜찮았어. 역시 객이 아니라 식구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런 건가?’
태어나서부터 둘만 함께했는데 새롭게 생긴 막내 사제한테 다정히 구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남매는 함께 어울려 잘 놀다가도 종종 천오를 골렸고, 그러다 심해질 것 같으면 귀를 기울이고 있던 초윤이 다가가 중간에 중재를 하는 수순의 반복이었다.
당장을 넘긴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 조만간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사영은 초윤의 앞에서까지 아이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듯했다.
일단 이것만 마저 빻고 적당히 멈추게 해야지. 초윤은 열심히 맷돌을 굴렸다.
그때, 나무 밑에서 토라진 표정으로 남매를 올려다보고 있던 천오가 몸을 휙 돌렸다.
그만 놀려고 그러나? 토라졌나? 초윤은 눈만 돌려 아이를 힐긋 보았다. 천오는 울타리 쪽으로 척척 걸어오고 있었다. 이리로 온다면 다독여 줘야지. 초윤이 생각했다. 그러나 곧 이어진 천오의 행동은 초윤의 상상을 초월했다.
천오는 장작을 쪼개는 곳에 세워져 있는 도끼를 번쩍 들었다. 날에 찍힌 장작은 발로 밀어 떼어 냈다. 그리고 무거운 머리 부분을 바닥에 질질 끌며 사영과 사현이 올라간 나무로 다가갔다. 초윤은 이게 무슨 일인지 순간 따라가지 못하고 아이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 천오는 일곱 살 아이의 힘답지 않게 양손으로 도끼를 들어 나무 옆에 콱 내리꽂았다. 나무의 가지가 떨리며 우수수 소리를 냈다. 당연하게도 남매는 질겁하며 나무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야! 뭐 하는 짓이야!”
“으아아!”
훌쩍 큰 나무를 베기엔 턱도 없었지만 충격은 조금씩 전달되는 것 같았다. 천오의 도끼질이 두 번을 더 이어지고 아이들의 비명이 높아졌을 때, 초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천오에게 다가갔다.
“서문천오, 그만.”
천오가 움직임을 뚝 멈추고 도끼머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아한 듯 초윤을 올려다보았다.
“사영, 사현. 내려오거라.”
초윤이 위를 올려다보며 양팔을 벌렸다. 아이 둘이 울먹울먹한 얼굴을 하다가 하나씩 떨어져 초윤의 품에 안겼다. 초윤의 팔이 남매를 차례로 받아 들고 바닥에 내려놓자, 놀란 아이들이 곧 와앙 울음을 터트렸다. 초윤은 둘을 어르며 천오를 힐긋 보았다.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사저와 사형이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천오는 여기 있거라.”
잠깐만…… 잠깐만 있어 봐. 일단 우는 애부터 달래야지.
초윤은 천오를 두고 몸을 휙 돌려 무심서로 향했다.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양옆의 아이들처럼 자신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큰일 났다.
서문천오는 사회화가 덜됐다.
◇
초윤이 사영과 사현을 달래고 바깥에 나온 것은 어림잡아 한 시진이 지난 뒤였다.
천오에게 악감정을 가지지 않게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도 달래느라 정말 온갖 진을 다 뺐다. 해가 쨍하던 때는 언제고, 벌써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산의 해는 짧은 법이었다.
천오는 초윤이 아까 있으라고 한 자리에 그대로 오도카니 선 채 양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졸지에 두 시간 동안 산속에 애를 세워 둔 격이 된 초윤은 기겁을 하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미쳤어! 내가 여기 있으라고 한 건 말 그대로 잠깐만 기다리라는 거였지 집 안으로 들어오지도 말고 앉지도 말라고 한 게 아니라고!’
“천오야, 여태 서 있었느냐.”
심정과는 다르게 입 밖으로 나가는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다. 천오는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를 상하게 해 드린 것 같아서.”
“잘 들리지 않는다.”
“심기를…… 상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초윤은 침묵이 길어질수록 안절부절못하는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담쏙 안아 들었다. 아이는 갑자기 안길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 몸을 뻣뻣이 굳혔다.
‘겨우 달래 놓은 사영과 사현이 보면 토라질 수 있겠지.’
무심서 쪽을 힐긋 돌아본 초윤이 산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걸음마다 내력을 운용하자 주위의 풍경이 지하철 창문으로 내다보는 풍경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현대 한국인이 이런 울창한 자연 속을 제 몸 하나로(아이도 딸려 있긴 했지만) 자유롭게 누빌 기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초윤은 와중에도 내심 신이 나서 속도를 높였다.
그때, 초윤은 제 옷깃을 그러쥐는 조그만 손의 감촉을 느꼈다. 혹시 너무 빨라서 무서웠나 싶어 내려다본 아이는 이번에도 초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초윤은 급정거를 하고 허둥지둥 아이를 챙겼다.
“왜…… 큼, 왜 눈물을 보이느냐. 무서웠더냐?”
초윤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가 잠깐 음정을 이탈했다. 그렁그렁한 눈물만 뚝뚝 흘리던 아이는 이제 아예 펑펑 울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자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버, 버리지 마세요.”
“쉬이, 눈물을 그쳐라. 너를 타박하려는 게…… 뭐?”
아니, 버리긴 뭘 버려?
순간 아연해진 초윤이 되묻자 천오는 양손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사, 산속에 버리러 가시려는 거 아닙니까.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고대 시대!’
초윤의 손이 비어 있었다면 분명 이마를 짚었을 것이다. 초윤은 대신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차분히 설명했다.
“이제부터 네 심중을 꼬치꼬치 캐물으러 갈 것이다. 네 다람쥐 같은 사저와 사형이 혹시라도 듣는다면 스스러워할까 저어되어 조용하고 깊숙한 곳으로 가는 것뿐이다.”
“……정말입니까?”
“내게 구배지례를 올린 아이를 내다 버려서야 되겠느냐.”
“…….”
“그러니 눈물을 그쳐라. 이런 곳에 흘릴 눈물이 아니지 않느냐.”
열심히 달래자 아이가 천천히 울음을 멈추고 조금씩 훌쩍였다. 초윤은 한 팔로 아이를 고쳐 안고 나머지 한 손의 소맷자락으로 아이의 반들반들한 볼을 꼭꼭 눌러 닦아 주었다.
거의 다 왔으니 일이 이렇게 된 김에 미리 운을 떼야겠다. 초윤은 아까보단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