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숲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기리라고 예상하진 못했습니다만, 제 요청으로 인해 위험에 노출되셨으니 책임을 지지요. 샬로트는 근신에 처해 앞으로 사교계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명을 달리한 이들의 가족에게는 마땅한 보상을 내리겠습니다.”
후작은 숲에서 생긴 일을 정확히 표현하지 않고 에둘러 말했다. 아스테르가 부정한 힘을 쓰고 있다는 점이나 샬로트가 그에 얽혔다는 건 밝히지 않을 듯해, 세이아드는 직접 그 화제를 꺼냈다.
“쉽게도 낮의 일을 무마하려 하는군. 고작 그 정도로 마무리될 사안이 아님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숲에서 목격한 것은 여태 본 적 없는 사이한 힘이었다. 후작의 여식은 니르아라고 볼 수 없는 괴물을 부리고 있었고, 그것에게 사람을 바치다 못해 날 협박하기 위해 사람을 조종했지. 그 같은 힘이 샬로트 사클라니에게 있다는 것은 그대의 집안이 악마와 연관이 있다고밖에는 볼 길이 없군.”
악마라는 말이 나온 순간, 후작의 눈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잠시간 문지르던 그가 평이한 어투로 시종들에게 명했다.
“이만하면 됐다. 너희는 나가서 대기하거라.”
전채를 나르던 시종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홀의 문이 닫히고, 사람 움직이는 소리로 부산스럽던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러자 스텔라가 그녀의 앞에 놓인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켠 후 세이아드의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여름 내내 악마로 인해 왕국이 소란스러웠어. 전설에서만 듣던 봉인된 악마가 왕궁까지 숨어 들었다는 흔적이 보여, 폐하께서도 굉장히 신경 쓰고 계신다지. 후작의 영지에서 이런 정황이 발견되었다는 걸 아시면 어떻게 나오실지 모르겠네.”
“샬로트가 불미스러운 일에 얽힌 것은 맞지만, 악마와 연관 짓는 것은 선을 넘으신 듯합니다.”
웃음을 지웠어도 평정을 잃진 않았는지, 후작은 스텔라의 말을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레사스를 다시 살피는 것이, 분명 그와 어떤 거래를 미리 한 것처럼 보였다. 레사스의 의중을 살피고자 그가 있는 반대편을 주시하자 눈이 마주쳤다.
레사스는 나설 기미가 없어 보였다. 입을 다문 채 절 뚫어져라 보고 있는 얼굴이 곱고 사랑스러워,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알고 싶었다. 지독한 욕망에 갈증이 끓어올라, 세이아드는 스텔라를 따라 포도주 잔을 집었다.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세이아드는 생각을 정리했다.
“증인이 많다, 사클라니.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 한들 수십 명이 넘는 영지민의 입과 귀까지 막을 수는 없지 않겠나. 소문은 이미 퍼지는 중이고, 우리는 오늘 일을 목격한 이들을 보호할 거다. 제아무리 부유하고 대단한 가문이더라도 악마와 얽힌다면 반드시 무언갈 잃게 된다는 건 실드라스의 일을 봐서 잘 알 테고.”
후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초록눈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걸 본 레사스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이 안에서 나눈 대화는 밖으로 새지 않게 할 테니, 이만 사실을 인정하고 약조했던 걸 말해. 그대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티테르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니, 쓸데없는 겉치레는 그만둬.”
덤덤히 명하는 레사스의 음성은 세이아드의 앞에서 보이던 것과 달리 우아하면서도 차가웠다.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하게 선득한 느낌이 들게 하는 명령에 후작이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러고는 낭패감과 짜증이 공존하는 어투로 설명했다.
“아스테르 전하께서 처음부터 저런 분이셨던 건 아닙니다. 언제부터 잠들어 있던 힘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부쩍 성정이 광포해지시더니 끝내 오늘 같은 일을 저지르신 거죠. 저는 그저 처음부터 모시던 저의 왕세자께 충성을 다했을 뿐입니다.”
“호칭이 잘못되었군.”
검을 찾아오는 즉시 왕세자의 지위가 레사스에게 양도될 일만 남은 상황에, 후작이 왕세자란 호칭을 아스테르에게 쓰는 것이 거슬렸다. 그것을 지적하자 후작이 잠시 세이아드를 살폈다.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깃든 눈으로 그가 한 마디를 툭 뱉었다.
“대공께서는 많이 변하셨군요. 그렇게나 아스테르 전하를 따르시던 분께서 말입니다.”
“나를 제대로 취급하는 주군을 만났을 뿐이다.”
단순한 주군이 아니라 제 가이드이고, 연인이 될 사람이기도 했다. 냉랭했던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스텔라가 살피곤 슬쩍 웃었다.
“…어쨌든, 저 또한 잃은 것이 많습니다. 자식을 생각해 그분에 대한 충정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다른 자식을 잃게 된 상황이니, 저는 레사스 전하께 이번 일에 한해 협력하기로 약조드렸습니다. 그러니 이걸로 오늘 있던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셨으면 합니다.”
다른 자식을 잃었다는 것은 곧 샬로트가 했던 말처럼 그녀의 오빠인 세드릭 소후작이 그 괴물이란 뜻이었다. 정말로 니르아가 아닌 사람이었나. 악마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찝찝해, 세이아드가 그에 대해 물었다.
“숲에 있던 것이 소후작인가?”
사클라니 후작은 입매를 굳혔다. 괴로운 낯빛을 한 그가 눈을 꾹 감은 뒤 세이아드에게 물었다.
“고통 없이 죽여 주셨습니까?”
“…그렇다.”
“그러면 됐습니다. 네, 제 아들입니다. 아스테르 전하께 깃든 그것은 사람을 악마의 수족으로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지요.”
“왜 그런 일에 소후작을 내몬 것이지?”
“…원래대로라면 제 아들은 몇 년 전 사냥을 하다 죽었을 몸이고, 그걸 전하께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도 치유력을 쓸 수 있는 것이 그때는 기적이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몸에 기이한 힘을 심는 행위였더군요.”
짐작할 수 없었던 사실에 세이아드가 멈칫했다. 레사스만이 이것을 알고 있었는지 동요가 없었고, 스텔라 또한 놀란 눈이었다. 후작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죽은 자의 이야기만큼 덧없는 게 없지요. 이쯤해서 전하께서 알고자 하시는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아스테르 전하는 서쪽의 브레드히트 령과 수도 사이에 자리를 잡고 계십니다. 머잖아 왕궁을 무너트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니, 하루라도 빨리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길어야 열흘 내로 벌어질 일입니다.”
이제 보니 레사스가 요구했던 것은 아스테르의 소재였다. 최측근인 사클라니 후작이라면 분명 이 같은 정보를 알고 있을 법 할터, 이걸 상대로 협상을 한 건가.
좋은 정보였다.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하더라도 조만간 그가 무엇을 할지가 확실해졌으니, 그에 대비해 한발 앞서나갈 수 있었다. 왕궁을 습격한다는 말을 곱씹은 세이아드의 머릿속으로 과거에 보았던 그 장면이 스쳤다.
무너진 성에서 홀로 검을 들고 있던 레사스를 떠올리자 속이 섬찟해졌다. 과거에도 이 장면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불편했는데, 감정을 깨달은 지금 와서는 두려움이 일 정도로 걱정이 치솟았다. 아무도 없이 홀로 거대한 뱀을 상대하던 그 광경이 어쩐지 현실로 일어날 것만 같아, 세이아드는 미간을 굳히고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레사스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그런 걸 알면서도 여태까지 아스테르 전하를 돕고 있었던 건가?”
세이아드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스텔라가 끔찍하다는 듯 후작을 질책했다. 후작은 상당히 많은 것을 체념한 얼굴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그것이 제 입장에서는 해가 될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역을 저지르려 한 거고?”
“원래대로라면 아스테르 전하께서는 왕위를 이으셨을 몸. 정당한 권리를 되찾는 행위니 반역이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그렇다면 왜 마음을 바꾼 거지?”
스텔라와 질답을 이어 가던 후작은 레사스를 살피곤 지극히 그다운 대답을 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상인의 덕목이니까요. 우위를 차지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파악할 정도의 머리는 있습니다. 더군다나….”
후작은 창밖, 숲이 있던 방향으로 잠시 눈길을 준 뒤 씁쓸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자식을 둘이나 잃은 아비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후작은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입을 흰 천으로 닦았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다들 빠르게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는 레사스 전하와 합의한 대로 먼저 수도로 향해, 폐하께 아스테르 전하의 일을 보고드릴 예정입니다.”
그저 소문이 아스테르를 겨냥하는 것과, 그의 오른팔인 사클라니 후작이 직접 아스테르를 등지고 증언하는 건 무게가 달랐다. 어떻게 해야 아스테르를 문제없이 공격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던 차에 레사스가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준다면 앞으로의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
잠깐 사이에 후작과 이런 협상을 한 것이 기특하고도 대견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쓰다듬고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쳐, 세이아드는 앞서 했던 것처럼 포도주를 한 번 더 머금었다.
그러자 레사스의 보라색 눈이 묘하게 걱정된다는 듯 그를 살폈다.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말을 걸고 싶어 세이아드가 입술을 달싹거리려던 그때, 레사스가 작은 한숨을 삼키곤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후작에게 말했다.
“오늘 밤, 준비를 마쳐 놓거라. 아침이 밝자마자 나와 함께 수도로 향할 거니까.”
“네, 전하. 그렇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세 분께서도 제가 없는 쪽이 편하실 테니, 시종을 들여보내 마저 음식을 내오겠습니다. 그럼.”
후작이 저지른 짓에 대해 마땅히 죄를 물고 싶긴 했지만, 일단은 그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라 세이아드도 스텔라도 후작을 잡지 않았다. 이해관계를 가지고 협상하는 것이 정치임은 아나, 그렇게 움직이지 않던 세이아드로서는 이 상황이 묘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당장 거슬리는 것은 내일 아침 수도로 향하겠다고 한 레사스의 발언이었다. 세이아드는 이걸 먼저 짚고 가기로 했다.
“전하, 내일 아침 떠나신다는 겁니까?”
“맞아요. 후작이 그를 배신했음을 악마 또한 짐작할 가능성이 크니, 증언을 할 후작을 보호하고 그가 약속을 지키는지를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저희도 아침에 떠나게끔 채비하겠습니다.”
“아뇨, 동행은 베트리아 공작이면 충분해요. 그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요. 북부로 돌아가 숲을 확인해 보세요. 정황을 보건대, 지금 ‘거룩한 죽음’이 있을 만한 장소는 밤의 숲뿐입니다. 그대의 힘이라면 혼자서도 숲에 들어가 검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레사스는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세이아드를 따로 떨어트렸다. 검을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분명 필요한 일이라곤 생각했지만, 이 같은 상황에 갑작스럽게 명이 내려진 점이 당혹스러웠다.
세이아드는 진심이냐는 듯한 물음을 담아 레사스를 주시했다. 짙은 눈썹에 의심이 어린 것을 본 레사스가 다시금 확인해주었다.
“베트리아 공작이 그녀의 숲에는 더 이상 니르아가 보이지 않는다고 확인했었죠. 그것은 서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름 동안 나는 브레드히트 공작과 함께 서부의 숲을 확인했어요. 베트리아 공작이 본 것과 같이 숲은 비어 있었고, 그 말은 북부만이 제일 안전히 검을 숨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이아드는 그런 설명을 듣고도 여전히 레사스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무엄한 행위에도 레사스는 화를 내는 대신 빠르게 흰 얼굴을 허물어트리며 당황한 눈을 했다. 사이에 낀 스텔라가 포도주를 마시며 그들을 관전했다.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세이아드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살얼음같은 침묵을 깨고, 그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이곳에서 북부까지는 쉬지 않고 달려 이틀이 걸리고, 미리엄 백작을 궁에서 보내준다면 북부에서 수도까지는 반나절 안에 이동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거리를 이야기하는 세이아드가 의아했는지, 스텔라와 레사스 둘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산을 마친 세이아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러니 전하께서 저와 함께 북부에 가셨다 돌아가도 늦지 않습니다. 후작의 안위도 중요하나 검을 찾는 것이 현재 가장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저는 전하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