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선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회색빛 땅거미가 내려앉는 하늘을 등진 모습이 처음 만난 순간처럼 크고 단단했다. 모든 것이 결핍되어 죽어 가던 영혼에 숨을 불어넣어 준 소년이, 긴 시간을 거쳐 제 앞에 이렇게 서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미소를 은은히 띤 채.
예뻤다, 참.
절 보며 가늘게 휜 입꼬리와 부드럽게 누그러진 눈매가 숨을 앗아 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짙은 눈썹 아래의 회색 눈이 지금처럼 따듯한 색을 띠는 광경을 너무 오래 보지 못해서, 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얻는 감정이 얼마나 다채롭고 강렬한지 잊고 있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잊을 만큼 황홀함이 밀려들었다가, 곧 기쁨이 벅차올라 가슴을 빠듯하게 채웠다. 그러다 사람이 어떻게 이다지도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이 웃음을 제가 봐도 되는지, 두려움과 슬픔이 밀려들었다. 죽을 만큼 슬프고 기쁜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레사스는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당연히, 영혼을 바쳐서라도 저 손을 잡고 싶었다. 그저 소중하다는 말 따위로는 표현할 수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런 욕망이 치솟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대로 그를 안아 가두곤, 세상의 어떤 위험도 닿지 않는 곳에 숨겨놓고 평생을 지켜보고 싶었다. 장미 가시조차도 그의 손가락을 스쳐 상처 낼 수 없게끔, 그렇게 안전하게 가둬 두길 원했다.
슬픔에 짓눌린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의무와 죄책감에 억눌렀던 새카만 마음이 이때를 틈타 세이아드를 갈망했다. 작은 빗방울이 하나 떨어진 것만으로 싹은 무섭게 자라나 덩굴이 되어 레사스의 마음을 감았다. 보랏빛 눈에 일순 진득한 감정이 짙게 맺혔다. 손가락이 달싹거리며 당장에라도 세이아드를 잡으려 안달을 냈다.
그러나 양심이라는 것이, 최소한의 염치가 그것을 막았다. 자신은 자격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 주지 못할망정 제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놈은, 행복의 부스러기조차 주워 먹어선 안 된다. 그걸 알아서 마음이 되돌아오길 바란 적 없었다. 외롭게 죽어야 했던 세이아드에게 저 따위의 사랑으로라도 기쁨을 주려 했을 뿐, 감히 그가 자신을 좋아하길 바라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을 하시는 겁니까.”
움찔거리는 손을 안간힘을 다해 억누르는데, 세이아드가 물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성큼 가까워졌다. 물러선 거리만큼 단숨에 거리를 좁힌 그가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레사스의 손을 붙들었다.
“전하께서 모든 이를 바쳐서라도 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지금 손을 잡아 달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소년처럼 물기가 어린 보라색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 세이아드가 속삭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얼굴을 바짝 붙이며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강한 힘이 레사스를 움켜쥐었다.
“저를 외롭게 두지 마십시오. 제가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게 옆에 붙들어 두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기꺼이 욕심 내세요. 그래야 제가 더욱 살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레사스를 당긴 세이아드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온기가 닿자마자 레사스는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열망에 휩싸였다. 눈두덩이가 뜨겁게 녹을 정도로 아찔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몇 번을 입 맞췄어도 매번 처음같이 돌아 버릴 것 같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이드, 나는…, 정말로 끔찍하고…, 한심한 사람인걸요.”
염병할 개새끼이고 찢어 죽여도 모자랄 등신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혹여 세이아드가 놀랄까 참아냈다. 레사스는 양심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이대로 그에게 지난 삶에서 지은 죄를 고하며 용서해 달라는 말조차 할 수 없으니, 제대로 사죄하지 않고 용서받는 기분이었다.
제 입으로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지만, 지나간 시간의 일을 자신이 언급하는 찰나 현실은 무너진다. 말에는 힘이 있어, 세이아드가 살지 못했던 시간을 넘기기 전까지 그는 묻어 버린 과거를 들춰 낼 수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신경 쓰지 않으니, 전하께서도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레사스.”
죽을힘을 다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는 그를, 세이아드가 이름으로 불렀다.
“괜찮으니까, 이제 원하는 걸 하십시오.”
코앞에서 깜빡이는 회색 눈이 단호했다. 울고 있는 자신을 달래 주던 날들처럼 다정하고도 확신에 찬 눈동자를 똑바로 보자, 어떻게든 밀쳐 내려던 손에 힘이 빠졌다. 그가 스스로를 가둬 뒀던 성은 이미 녹슬고 낡아진 채여서, 세이아드가 건드는 것만으로도 모래처럼 허물어졌다.
긴 시간 참아 온 인내심이 끊어졌다. 어떻게든 주제를 파악하려 애쓰던 눈이 열기로 흐릿해지는 동시에, 레사스는 제 손을 잡은 세이아드의 손을 맞잡았다. 위험한 줄도 모르고 잘도 가까이 다가온 그를 품속으로 끌어안고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서늘한 체온과 어우러진 숲내음을 들이켜며 쿵쿵 뛰는 심장을 느꼈다.
이드가 살아있다. 내 옆에.
“후회해도….”
그 사실을 자각하는 찰나, 저 자신도 무서울 정도의 욕망이 들끓어 터졌다. 그가 자신에게 빈틈없이 맞닿게끔 상체를 껴안고, 레사스는 처음으로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대로 굴어 보기로 했다. 자신의 세상이 그렇게 해도 된다는 허락을 내렸고, 레사스는 단 한 번도 그의 달이 명령한 것을 어긴 적 없었다.
“후회해도, 이제 늦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저를 보며 세이아드의 회색 눈이 휘었다. 다 괜찮다는 듯 절 응시하는 시선을 보자마자 레사스는 그간 참아 온 것이 기적일 정도로 미쳐 버린 욕망에 정신을 놓았다. 몸을 옥죈 팔을 풀고 세이아드의 뺨을 감싸곤, 여태껏 세이아드의 취향에 맞춰 입을 맞추던 것과 달리 정말 하고 싶었던 대로 그를 탐했다.
핏줄 선 손등이 세이아드의 얼굴을 붙들었다. 기교라곤 하나도 없는 손짓으로 그는 세이아드의 입술을 빨아당기다, 삼키고, 핥았다.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빨려오는 살덩이는 세이아드가 좋아하는 사과보다 달았고, 그대로 씹어 삼키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핥고 핥아도 모자란 느낌에 눈앞이 벌겋게 물들었다. 죽을 것 같았다.
제대로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입맞춤에 놀랐는지 세이아드가 헐떡이는 것이 느껴졌다. 삶을 갈망하는 그의 몸짓을 느끼자 눈물이 나올 것처럼 애틋함이 올라왔다.
맞아요, 이렇게. 내 품에서 살아 움직여 줘요. 날 할퀴고 때려도 좋으니까.
더욱 그를 느끼고 싶어 레사스는 혀를 밀어넣어 입 안을 핥았다. 과격한 입맞춤으로 인해 읏, 숨소리를 흘리는 동작이 새의 날갯짓 같았다.
아, 당신의 숨을 마시고 싶어.
미친놈과 다름없는 생각이 그를 점령했다. 뜨겁게 흐르는 숨을 제 입술로 받아 마시며 레사스는 더욱더 세이아드를 몰아붙였다. 혀를 목구멍까지 밀어넣어 숨이 막힐 정도로 몰아붙이자 세이아드가 어깨를 세게 붙들었다.
밀어낼 듯 말 듯 고민하고 있는 것이 느껴져 레사스는 잘게 몸을 떨었다. 이 아름답게 강한 남자가 자신을 인내해 주고 있다는 게, 절 받아 주고 있다는 것이 미쳐 버릴 만큼 좋았다.
흡, 하고 새어 나온 세이아드의 신음이 귓바퀴를 오싹하게 간질였다. 전신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라 더한 욕망이 레사스를 밀어붙였다. 곱고 단정한 외양과 달리 짐승보다 못한 입맞춤을 퍼붓던 그가 목표를 바꿨다. 혀. 불긋하고 달콤한 혀를 맛봐야 했다.
잠시 물러서려는 것처럼 굴자 아무것도 모르는 제 티테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창백하던 얼굴은 열기로 인해 홍조를 띤 상태였는데, 그렇게 예쁜 모습을 하고선 달뜬 눈으로 절 올려다보자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기분이었다.
색색거리는 숨을 뱉으려는 그를 그대로 다시 낚아채곤,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혀를 게걸스레 삼켰다. 말캉하고 뜨거운 혀를 입술로 힘주어 흡입하자 그 감각이 이상했는지 세이아드가 앞서와 다른 소리를 흘렸다.
“하, 윽…!”
깊게 깔리는 낮은 저음을 가진 사람이 냈다고는 믿기 어려운 비음이 샜다. 척추를 타고 오싹하게 소름이 돋으며 곧장 아래에 반응이 왔다. 사냥에 나선 짐승처럼 레사스는 더욱 그를 몰아붙였다. 혀를 세게 빨수록 뒤로 물러서려는 세이아드에게, 앞서 경고했듯 이미 늦었다는 걸 알려 주기로 했다.
그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레사스는 세이아드를 한껏 느꼈다. 아무리 핥고 맛보아도 부족해서 허기가 졌다. 그를 만난 순간에 굶주려 죽어 가던 놈이어서 그런가,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모든 것에 갈증이 일었다.
“레, 사스, 그만, 그… 만.”
정신을 제대로 놓고 미친놈처럼 군 것이 세이아드를 놀라게 했는지, 내내 자신을 봐주던 세이아드가 결국 그를 잠시 떼어놓았다. 안고 있는 부위 하나하나가 평소보다 뜨끈했고, 창백하던 피부엔 혈색이 돌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회색 속눈썹이 쉬지 않고 깜빡거리고 있었다.
“숨을…, 쉬, 기가, 힘듭니다. 잠시만, 숨을….”
“응, 네, 그럴게요.”
제 달이 명하는 것에 고분고분 답해 놓고, 가슴팍을 들썩이며 시선을 흘끗 피하는 얼굴을 보자마자 레사스의 동공이 풀렸다. 여태껏 그와 입 맞추며 참아 왔던 욕망을 발산해도 된다는 허락을 얻어서인지 스스로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숨을 쉬게 내버려 두면서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뺨, 코, 눈썹, 가리지 않고 입술을 비비다가 이내 귀를 맛보기로 했다. 탐스럽게 불긋해진 귓불을 깨물고 씹고 싶었다.
“전에는, 이런 식으로… 입을 맞추시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세이아드가 그리 중얼거리는 것에 답해 줘야 하는 걸 아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얼굴을 지분거리던 입술을 옮겨 귓바퀴를 물고 놓길 반복하자 세이아드가 제 허리를 꽉 안았다.
“못 보던 새 취향이 바뀌시기라도 한 겁니까?”
“아뇨, 이드. 나는 그냥….”
그동안은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속삭이며 세이아드의 귓불을 깨물었다. 아, 살 것 같았다. 내내 죽어 있었던 마음에 생이 깃들며 레사스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겨우 일부를 맛보았을 뿐인데도 이렇다니 무서울 정도였다.
머릿속으로 자제할 수 없는 욕망이 꽃을 피웠다. 이대로 그를 들고 어딘가로 가 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레사스를 미치게 하려는 차, 사클라니 후작의 귀환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흐릿했던 눈에 겨우 초점이 잡혔다. 맞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욕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이아드를 지키는 것이라, 짐승만도 못하게 달려들던 방금 전의 모습이 거짓인 양 레사스는 자신을 다잡았다. 산산조각 났던 정신이 순식간에 이어붙어 제자리를 찾았다.
달뜬 숨소리가 차차 가라앉았다. 이성이 돌아오자 아까까지 제가 한 짓이 스스로도 염치가 없어, 레사스는 긴 속눈썹을 깜빡이다 부끄러움에 뺨을 붉혔다. 제법 긴 시간 동안 그를 핥고 빨아 댄 레사스로 인해 잔뜩 흐트러진 세이아드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리 거침없이 핥아 대시더니, 정신이 좀 드셨나 봅니다.”
무례하고 이상한 짓을 한 자신이 역겹지도 않은지 세이아드는 예쁘게도 웃었다. 절 다정하게 살펴 보는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그가 정말 자신을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여태까지와는 더욱 비교되지 않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나의 달을 지켜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살아서 행복하게끔.
이같은 마음은 세 번의 생 내내 언제나 간절했지만, 여기서 더는 커질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의지가 그 전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게 신기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절망보다는 기쁨이 훨씬 컸다.
레사스는 천천히 눈을 휘어 웃었다. 자신의 삶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목표가 생겼음을 기뻐하면서.
걱정 마요, 이드. 그대를 살려낼 테니까. 나를 녹여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그것을 처참하게 죽일 겁니다. 세상에 흔적조차 남지 못하게 말이에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대를 기쁘게 할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