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눈보라가 불었다. 흰 결정이 섞인 거친 공기가 숲을 날카롭게 헤집고, 레사스는 그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숨을 거둔 사내가 있었다. 창백한 흰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반쯤 뜨인 회색 눈은 생기가 사라져 탁한 빛을 띠었다. 검에 찔린 가슴으로부터 흘러내린 핏물이 눈을 벌겋게 물들였다.
레사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눈이 물드는 것을 보았다. 동요라곤 보이지 않는 건조한 모습이 워낙 무덤덤해, 그 누구도 레사스의 손등에 터질 듯한 푸른 핏줄이 선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검을 쥔 손바닥이 짓이겨져 살갗이 터진 것도, 손잡이를 붙든 손가락에 핏기라곤 없는 것도, 레사스 본인 외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하, 이만 돌아가시죠. 검을 빼돌린 것을 왕세자 전하께서 알아차리실 겁니다.’
시온이 그의 어깨를 잡고 말을 거는 찰나,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소리 없이 땅 위로 떨어졌다. 죽어 가던 당사자조차 끝내 보지 못했던 눈물은 언제 고였냐는 듯 그렇게 사라졌다. 절 붙드는 시온의 힘을 따라 천천히 몸을 튼 레사스는, 눈조차 깜빡이질 못하고 시온을 보았다.
시온은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 보였지만, 대공의 죽음에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바나 스텔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씁쓸함과 착잡함이 떠올라 있었을 뿐, 그들이 누구를 잃었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눈이었다.
자신들이 그렇게나 따르고 사랑하던 동료였음을 기억조차 못한 채.
레사스 못지 않게 세이아드를 동경하고 헌신했던 어린 청년은, 그저 원수를 죽였다는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형님, 하고 뒤를 쫓던 그 모습이 겹쳐지자 속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세이아드를 찌르기 직전부터 만신창이가 된 영혼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금방 따라갈 테니, 다들 먼저 가. 시온, 너는 형님께서 찾기 전에 검을 돌려놔. 노바와 스텔라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사망자를 수습하고 모두 태워 줘. 고통스러운 전투였으니 오늘은 그 이후 해산한다. 나는 걱정 말고.’
표정에 조금이라도 금이 가는 순간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 레사스는 차분히 읊조렸다. 명령을 들은 그들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마지막으로 악시드 대공의 시체에 한번 눈길을 주곤 몸을 틀었다. 시온에게 검을 건네준 후, 흩어지는 이들이 기사를 모두 데리고 물러선 다음에야 레사스는 허리를 숙였다. 소리 없이 몸을 수그린 후 그의 입에서 피가 쿨럭 쏟아졌다.
진홍색 선혈이 눈 위에 퍼졌다. 세이아드를 찌른 그 순간부터 충격에 올라온 핏물을 내내 참고 있다 뱉어 내는 기침 소리가 깊고 처절했다. 게워 내듯 피를 쏟고 난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겨우 숨을 뱉어 낼 때마다 가슴팍이 거칠게 팽창하길 반복했다.
열이 들끓었다. 머리통은 수백 번 후려 맞은 기분이었고, 내장은 갈기갈기 찢긴 것 같았으며, 눈알은 터질 듯 뜨거웠다. 정신을 놓을 듯한 고통을 참으며 그는 뒤를 돌았다. 고요하게 누워 있는 세이아드가 눈에 스치는 찰나 레사스는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무너졌다.
피투성이가 된 눈 위에 무릎을 꿇고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몸 위를 덮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짐승처럼 흐느끼는 숨이 퍼졌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차갑게 식은 세이아드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뼈를 가르고 심장을 찔렀으니 진즉 죽었을 텐데, 뒤늦게라도 그를 살리려는 것처럼 간절한 동작이었다.
‘이드, 거짓말이에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제대로 발음조차 하지 못해 무너진 음성이 허공에 작게 울렸다.
‘그대에게,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대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데.’
자신이 내뱉은 역겹고 끔찍한 말에 흔들리던 회색 눈을 떠올리자 죽을 것 같았다. 죄책감과 아픔으로 죽을 수 있다면 레사스는 세이아드를 찌르던 찰나 죽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다정한 말만 들려주어도 모자랄 사람에게,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이 그같이 아픈 말을 했다는 사실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세이아드의 영혼을 통해 자신을 마주 보고 있을 그것에게, 자신이 그를 구해 낼 거라는 인식을 주는 순간 기회는 사라진다. 안 그래도 자신의 각성과 함께 태양의 개입을 의심하고 있던 그것에게 조금이라도 빌미를 주는 찰나, 세이아드의 영혼은 그것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존재답게 욕심을 내서 다행이었다. 가장 어둡고 깊은 어둠으로 세이아드를 끌어내리기 위해 그것이 오늘까지 욕심을 내서, 한 번의 기회를 얻었다. 그러니 필요한 일이었다. 영혼에 심어진 씨앗을 깨트리고, 그를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이 방법 외엔 없었다.
아는데,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한 짓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세이아드의 몸 위로 눈이 쌓이는 것이 두려워, 레사스는 그를 자신의 몸으로 덮었다. 흰옷이 피로 같이 물들고 눈에 젖어 무거워졌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몸을 감싸 주던 레사스는 처참하게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계속 누르다가, 흐릿하게 탁해진 눈으로 세이아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와 같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회색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반듯하게 감긴 눈과 색이 없는 입술. 고요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볼 것 같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세이아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증오하고 때려 죽여도 좋으니, 나는 당신이 살아서 이 세상에 있는 걸 보고 싶은데.
기억을 찾은 순간부터 레사스가 빌어 왔던 것은 이것 하나였다. 세이아드와 마주친 모든 순간이 마음을 찢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어도, 살아있는 그가 주는 고통에 아픈 것이 좋았다. 그가 보여 주는 경멸과 증오조차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미안해요….’
차마 그 말을 할 염치가 없어서 꾹꾹 참고 있던 사죄가 끝내 흘러나왔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은 채 레사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팠죠. 엄청, 아프죠. 너무 아플 텐데… 말도 못하게 아플 텐데….’
감히 그를 찌른 자신의 손목을 자르고, 그에게 나쁜 말을 한 제 혀를 뽑고, 그렇게 해서도 용서가 되지 않아 사지를 잘게 잘라 버리고 싶었다. 자신을 그렇게 죽일 수 있다면 당장 그리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할 일이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잘못했어요….’
죽은 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레사스는 그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미친 사람과 다름없이 넋을 놓고 그리 굴다가, 저 멀리서 인기척이 들리자 헐떡거리며 몸을 물렸다. 그것의 눈은 언제 누군가에게 어떻게 닿을지 몰라, 레사스는 남들이 보는 곳에선 슬퍼해선 안 된다. 자신이 이드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는 천천히 슬픔을 얼굴에서 지워 냈다. 피가 묻은 입술을 닦아 내고, 전신에 묻은 비애를 뜯어 낸 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표정을 없앴다. 울컥 솟구치는 자괴감을 삼키고 레사스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발자국도 채 내딛지 못하곤 멈춰 섰다.
도저히, 당신을 두고 가기가….
발밑이 무너져 하염없이 떨어지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이 추운 곳에 저 예쁜 사람을 잠시나마 두고 가야 한다는 것이, 그가 혼자 이렇게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이 미칠 것 같았다. 미련이 발목을 잡아 결국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는 세이아드가 있었다.
어떡해.
어떻게 그대를 두고 가요, 내가. 이렇게 추운 곳에서 외로워할 당신을 아는데. 마주치던 순간마다 공허하게 비어 있던 회색 눈이 온기를 바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그런 내가 어떻게 그대를 두고….
숨이 막혔다. 그대로 꺾일 듯한 몸을 어떻게든 지탱한 후, 레사스는 죽을 듯한 고통을 또다시 참아 내며 악시드 성으로 향했다.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반드시 흔적이 남듯이, 치열했던 지난 삶은 영혼에 자취를 남겼다. 시간을 되돌리는 행위는 일어난 일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한 번 실재했던 것들은 이미 시간에 흔적을 남겼고, 신은 단지 그 위를 새로 칠해 줄 뿐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폐허를 하얗게 덮어도 그 자리에 생긴 비극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영혼은 잊힌 삶의 흔적을 따랐다. 때로 어떤 죽음은 당사자보다도 그를 사랑했던 이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다. 레사스가 마주한 두 번째 삶은 바로 그런 흔적으로 인해 비틀려 있었다.
어둠은 자신의 세상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예리한 본능을 따라 그것은 자신이 전과는 다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예로부터 악마는 상처 입은 영혼을 유혹하는 재주가 남달랐으므로, 이번 생에는 사람을 움직이기로 했다.
몸속을 녹이는 듯한 열병과 함께 각성을 할 시기가 닥쳐 오자, 신은 그의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육체가 신을 받을 준비가 되는 동시에 레사스 또한 지나간 기억을 되찾았다. 분리되어 있던 삶이 하나로 합쳐지는 고통과 함께 그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그러고는 자신의 바람과 달리, 가장 다정했던 사람에게 생긴 비극에 절망했다. 모두에게 사랑받던 다정한 사람이 모두가 증오하는 악마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레사스를 미치게 했다.
당장 세이아드에게로 달려가려던 레사스를 막은 것은 신이었다. 그는 악마 또한 원래는 저 높은 하늘에 있던 신적인 존재였으므로, 자신이 개입한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이아드를 살릴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 신은 막 깨어난 레사스에게 절망을 선고했다.
‘이미 늦었다. 그것이 달의 마음에 절망을 심었어. 죽음으로밖에는 정화할 수 없는 절망이니, 너는 이제부터 성물을 손에 넣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달에게는 다가가지 말거라. 너에게서 나의 힘을 느끼는 즉시 그를 앗아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