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혹한기가 코앞으로 닥친 밤이었다. 어떤 험난한 겨울이 다가와도 견고한 평온함을 유지하던 악시드 성 전체에 묘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세이아드는 굉장히 바빴다. 아침부터 시작해 내내 레사스의 옆을 지켜 주던 그가 이렇게 자리를 비운 것은 몇 년간 처음 있던 일이었다.
레사스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세이아드가 그를 북부로 데려온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던 검술 훈련을 마치고, 세이아드를 위해 숲의 경계를 정찰하다 만난 늑대를 죽이고, 그러고도 시간이 비어 세이아드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 사탕을 챙겨 놨다.
그렇지만 세이아드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의 방 복도 앞에 우두커니 선 채 창밖을 내려보던 레사스는, 다리를 건너 들어오는 티테르 무리를 보았다. 세실리아를 비롯해, 노바와 스텔라를 앞에 두고 그 뒤를 따라가는 세이아드가 보였다. 언제나 그러했듯 시온을 옆에 둔 채였다. 심각하다던 일 때문인지 악시드 영지로 티테르가 모두 모인 상황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서로를 축복하고 도와 온 티테르들은 가족처럼 유대감이 깊었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마찰하긴 했지만, 존중과 배려는 잊지 않았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후계자인 세이아드를 어린 티테르들은 항시 따랐다.
시온이 해맑게 웃으며 세이아드에게 장난을 치는 걸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시선을 알아챈 것인지 세이아드가 고개를 들었다. 차분한 낯을 하던 세이아드의 얼굴 위로 미소가 잔잔히 고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전신에 피가 돌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영혼이 전율하며 세이아드에게 반응했다. 죽은 사람처럼 혈색이 없던 하얀 얼굴 위로 발긋한 홍조가 피어오르고, 레사스는 단숨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그저 자신을 알아만 주어도 행복했다. 자신이 그의 옆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주는 걸로도 좋았다. 아무리 바빠도 간혹 이렇게 눈을 마주쳐 준다면, 레사스는 그 기억만으로도 평생 살아갈 수 있었다.
좋아해요, 이드. 당신을 너무 좋아해요.
그를 만난 순간부터 되뇌어 온 말이 마음을 물들였다. 진즉에 세이아드의 색을 따라 물든 영혼임에도, 레사스는 매일, 매일, 세이아드를 제 영혼에 새겼다. 벅차오르는 행복이 피어올라 레사스의 마음에 꽃을 피웠다. 감히 그를 독차지하러 내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레사스는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자 세이아드가 그에게 왔다.
다리를 건너 성으로 돌아온 세이아드는 티테르들을 데리고 복도로 올라왔다. 온종일 밖에 있었으니 식사부터 할 법도 한데, 그는 번거롭게도 레사스를 보기 위해 친히 움직였다. 세이아드의 방문 앞에 서 있는 레사스를 발견한 세실리아가 먼저 알은체했다.
‘전하, 또 거기서 기다렸어요?’
남매의 옆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 온 덕에, 어린 티테르 중 세실리아만큼은 레사스를 크게 어색해하지 않았다. 세실리아가 알은체를 하자 노바와 스텔라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허울뿐인 왕자임에도 예를 취하는 모습에 레사스의 몸이 굳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자각해 온 자괴감이 그의 발목을 묶었다.
아무 힘도 없는 쓸모없는 가이드. 가이드라고 부를 수도 없는 허울뿐인 왕족.
자격을 갖추지 않은 이가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만 같아서, 레사스는 본인의 지위를 항상 끔찍이 여겼다. 왕자라는 칭호를 들을 때면 십 년 전의 겨울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그를 등진 날부터 모두가 그를 버리더니, 방치된 궁을 오가던 유모조차 끝내 자신을 떠나고 만 날이.
살아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죄책감이 그를 목 졸랐다. 인사를 덤덤히 넘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그를 시온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슬쩍 고개를 튼 시온이 세이아드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형님, 전하께서 어색하신가 봐요. 티테르가 익숙하지 않을 테니 이만 자리를 피해드릴까요?’
‘그러는 게 좋겠다, 시온.’
용케 그를 배려해 말하는 시온이 기특한 듯 세이아드가 동의했다. 그러자 시온은 근심이라곤 없는 얼굴로 웃었다. 곱게 자란 티가 나는 갸름한 얼굴과 섬세한 금갈색 머리칼이 요정처럼 찰랑거렸다.
세이아드가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 주자, 시온이 듣기 좋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나이가 비슷한 또래 셋이 먼저 복도를 달려가고, 스텔라도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레사스는 멍하니 평온한 광경을 구경했다. 가이드가 아닌 자신은 영영 낄 수 없을 저 세계가 한없이 부러웠다. 만약 제가 가이드였다면 지금쯤 세이아드가 겪고 있는 일이 뭔지 알고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레사스, 다들 네가 어색해서 그런 거니 개의치 않아도 돼. 네가 부족하다거나 이상해서 그런 게 절대 아니라는 걸 알지?’
세이아드는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천천히 다가와 속삭였다. 자상하게 달래 주는 저음에 레사스는 금세 얼굴 위로 웃음을 피웠다.
‘네, 알아요.’
‘좋은 아이들이니 금세 친해질 거야. 너와는 달리 철이 덜 들어서, 네가 챙기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레사스는 가만히 세이아드가 하는 말을 새겨들었다. 그는 언제나 세이아드가 하는 말을 잊는 법이 없었다. 스치듯 지나간 중얼거림조차도 레사스에게는 한없이 중요한 명령이 되었다.
내가 챙겨야 하는구나.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그런 시기가 올 것 같지도 않지만, 레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아드가 동생처럼 아끼는 티테르들이니 그들이 행복한 쪽이 제게도 좋았다. 그러면 세이아드도 행복해질 테니까.
세이아드는 언제나 티테르들은 함께 있어야 서로의 힘을 완전히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사방을 수호하는 그들 중 누군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결국 죽음은 그 틈을 타고 파고든다고도 했다. 그것은 악시드 대공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그녀는 달의 조각인 티테르들이 함께 있어야만 솔리아스를 진정으로 수호할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허기가 많이 졌을 텐데,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하러 가세요. 이드의 얼굴을 봤으니 난 이제 괜찮아요.’
세이아드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더 알게 된 것이 행복해, 레사스는 진심으로 웃었다. 남들의 앞에서 보이는 웃음과 달리 눈꼬리까지 휘며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미소였다. 그것을 본 세이아드가 손을 뻗었다. 칭찬해 줄 때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기다리며 레사스가 얼른 고개를 숙여 주었다. 그러자 뻗어오던 손이 멈칫, 그 자리에 굳었다.
창백한 손가락이 레사스의 머리카락 주위를 배회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머리칼을 차마 헤집지 못하고 물러서는 손끝을 레사스가 눈길로 쫓았다. 사탕을 뺏긴 아이처럼 순식간에 서글퍼하는 눈을 세이아드가 마주했다.
‘…키가 많이 컸구나.’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목소리가 묘했다. 낯설어하는 회색 눈동자를 빤히 내려다보며, 레사스도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어쩐지 최근 들어 밤마다 무릎이 아프다 싶었다. 한창 자라다 멈춘 이후로 세이아드와 같은 키가 되었다고 여겼는데, 하루 사이 조금씩 더 자라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러게요.’
스스로도 몰랐던 변화라 레사스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세이아드의 앞에 있을 때면 항상 기쁨으로 반짝이는 뺨이 수줍은 듯 물들었다. 긴 속눈썹이 깜빡거릴 때마다 별이 부서지는 것처럼 눈동자가 빛났다. 언제나 세이아드가 지켜야만 하는 사람이었던 제가, 드디어 그를 지킬 수 있는 남자가 된 것 같았다.
‘이드가 나보다 작아요.’
레사스는 상기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세이아드의 앞에 바짝 붙었다. 말을 듣고 보니 그제야 다른 점이 온통 보였다. 늘 올려다보던 커다란 몸은 이제 보니 저보다 부분부분 작았다. 너른 어깨는 얼추 비슷해 보였지만 자세히 비교하자 제가 더 컸고, 너른 흉통에서 이어지는 허리는 제 두 팔에 안기고도 남을 정도였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떨림이 속을 채웠다. 너무 작고 예쁜 걸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손도 작을까? 이드의 희고 예쁜 발도 저보다 작으려나? 이드가 제게 해 줬던 것처럼 그를 이제 아무렇지 않게 들 수 있을까?
자꾸만 전율이 일어 떨리는 손으로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손을 잡았다. 뻗어지다 멈춘 손을, 조심히, 아주 조심히 잡았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겹치며 서로의 손을 재보았다. 하얗고 단정한 손이 가지런히 펴져 세이아드를 담았다.
맞붙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숨이 막혔다. 떨리는 눈길로 레사스는 서로의 손을 살폈다. 세이아드의 손끝이 제 손끝 아래에 있었다. 누가 봐도 크고 넓은 손이 저와 맞붙자 작게 느껴졌다.
‘귀여워요.’
진심을 담아 레사스가 그리 속삭이는 순간, 세이아드가 손을 휙 물렸다. 어딘지 당혹스러운 표정이 짧게 세이아드의 얼굴을 스치고, 짙은 눈썹이 곤혹스러운 듯 휘었다. 진회색 눈썹 아래의 눈동자가 떨리며 시선을 피하자 레사스도 놀라서 물러섰다.
‘미안해요, 이드. 기분 나빴어요?’
‘…레사스, 귀엽다는 표현은 내게 할 법한 말이 아니야.’
눈길을 피하며 나직하게 꾸짖는 말에 레사스의 심장도 잠시 멎었다. 자신이 세이아드를 불쾌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공포가 밀려들었다. 의식할 새도 없이 눈가가 발긋해지며 레사스가 다급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형편없이 손이 떨렸다.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주위를 맴도는 레사스를 살핀 세이아드가 잠시 입을 꾹 닫았다.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얼어있는 레사스를 머리부터 찬찬히 훑던 그는, 레사스가 다른 쪽 손에 쥐고 있는 천 주머니에서 시선을 멈췄다. 사과 사탕을 챙겨 놓은 주머니였다.
‘날 위해 챙겨 놨구나.’
‘…네, 이드.’
레사스는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고 형편없다고 여기면서도, 보잘것없는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당장은 이뿐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드릴 테니, 이드를 속상하게 한 걸 용서해 주세요.’
‘아니, 내 잘못이야. 별것도 아닌 일로 널 놀라게 했어.’
조심스레 내미는 주머니를 받아든 세이아드가 나긋하게 그를 달랬다. 깊은 저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이 세이아드를 놀라게 한 것 같다는 죄책감에 떨고 있자, 그를 안심시키듯 세이아드가 일부러 눈을 마주쳤다.
갑자기 마주친 회색 눈이 너무 예뻤다. 견고한 의지가 깃든 눈동자는 남자답고 날카로웠음에도, 회색 눈을 감싸는 눈꺼풀과 속눈썹은 아름다운 숲 같았다.
그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세이아드와 시선을 섞는 걸 제일 좋아하던 자신답지 않게, 레사스는 순간 눈을 돌렸다. 세이아드의 눈길이 장난스레 따라오더니, 이윽고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반투명한 노란 사탕을 꺼내든 세이아드가 자상하게 속삭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준 것이니, 지금 당장 먹어 봐야겠다.’
그 말에 내내 도망 다니던 눈길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피식 웃은 세이아드가 사탕을 삼켰다. 창백한 분홍기가 도는 손끝이 부드러운 입술 안으로 사탕을 밀어넣었고, 색이 옅은 입술과 달리 불긋한 혀 위에 노란 사탕이 닿는 게 보였다. 살짝 벌어진 입 속이 지나치게, 너무나, 외설적이었다.
가슴 안에서 불길이 일었다. 뜨겁게 타오른 감각은 열흘이 넘게 굶주리던 그때의 허기보다도 더 강렬하게 레사스를 삼켰다. 숨을 쉬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우뚝 굳어 버린 레사스를 세이아드가 빤히 보았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로 물러선 것은 그로부터 몇 초 뒤였다. 긴 시간 멈췄던 호흡을 들이켜며 레사스는 주먹을 꽉 쥐었고, 세이아드는 몸을 살짝 틀었다. 황급히 얼굴을 돌리는 세이아드의 귓불이 미묘하게 붉어진 게 얼핏 보였다.
그걸 보는 찰나 이상한 충동이 일었다. 단 한 번만, 세이아드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욕망이 레사스의 가슴에 싹을 피웠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작고 가녀려, 싹을 틔운 주인조차 감히 꽃피우고자 생각지 않는 어떤 소원에 가까웠다.
그 정도로 하찮은 소원이었기에, 레사스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온 탓이기도 했다.
다음 날, 왕국에 어둠이 내렸다. 때 이른 혹한기가 전국을 덮쳤고 수도에 뱀의 형상을 한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다. 무수한 니르아를 대동한 그것은 성 앞에 진을 쳤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지만, 생각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분명 그랬다.
티테르들은 악마를 죽이기 직전까지 몰아갔다. 어느 때보다 단단해진 결속으로 수도를 점령한 니르아들을 소멸시켰고, 끝내 악마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해답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뱀이 성 앞을 점령한 이유이기도 했다.
성안에는 ‘거룩한 죽음’이 있었다. 그것은 달이 스스로의 생을 바쳐 악마를 봉인한 뒤 마지막으로 숨결을 불어넣어 만든 성물이었다. 달의 희생을 받든 태양이 대대로 그의 자손을 시켜 수호해 온 성물은, 달이 눈물인 은하수와 그의 육신으로 만들어졌다.
달은 태양을 삼킨 악마의 육신을 네 개로 찢어 그것을 각각 사방에 봉인했다. 당장 그의 힘으로는 악마를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마라는 이름으로 정의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그것은, 태고에 가장 먼저 탄생한 어둠이었다.
하여, 달은 긴 시간 봉인되며 약해진 악마를 죽일 방법을 안배해 두었다. 언젠가 그의 조각이 깃든 후손이 자격을 갖추면, 성물의 주인이 되어 어둠을 밝히게끔 말이다.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지닌 이만이 검의 주인이 되어 악마를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달의 조각을 지닌 이들을, 고대에는 프로시어스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