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늦어도 참 늦은 자각이었다. 결코 누군가를 좋아하리라 믿지도 않았고, 다른 이도 아닌 레사스를 이런 마음으로 품을 줄은 몰랐다.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를 싫어해야 한다고 되뇌던 암시 때문에도 그렇거니와, 어린 소년으로만 여기던 레사스를 ‘이런 식으로’ 좋아할 거라고 여기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아니.
너무나 분명하게도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원했다. 그를 보면 달려가 끌어안고 싶었고, 그의 부드러운 체온에 녹아들길 바랐다. 입을 맞추면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이 황홀해졌으며, 정화를 받는다는 자각은 의식 뒤로 사라져 레사스를 원하는 본능만이 남았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청년을 길들이고 있다고 믿었던 일이, 알고 보니 자신 또한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가리던 안개는 비단 숲에서만 거둬진 게 아니었다. 세이아드의 마음에서도 비로소 물안개가 걷히고 명백한 진실을 마주 볼 기회가 되었다.
무엇을 위한 아집인지 모르겠다. 온 영혼을 다해 레사스만을 생각하고 있던 주제에. 긴 시간 보지 못했던 누이보다도 더 그를 챙기고 있었으면서, 멍청하게도….
“…제가 그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깊게 잠겨 갈라진 목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해 좋아한다고 속삭이다가, 자책을 담은 중얼거림과 함께 끝났다. 너무나도 뒤늦게 깨달은 자신이 한심하고 괴로워, 음울하게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레사스가 워낙 본인을 향한 애정만큼은 잘 믿으려 들지 않는 걸 아니까, 그가 믿게끔 웃어 주고 싶었는데도 쉽지 않았다.
마음을 고백하는 일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심장 안에 묻힌 감정을, 온갖 힘줄을 뜯어 내고 겨우 그 속에서 꺼내는 감각과 비슷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에 반하여, 영혼을, 몸을, 모든 것을 내어주는 행위였다.
이렇게나 괴로운 짓을 레사스는 쉬지 않고 하고 있었다. 세이아드는 매 순간 그가 내뱉던 말이 얼마나 아팠던 것인지를 전신으로 느꼈다. 그와 동시에 레사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속삭여주는 걸 한 번 더 듣고 싶어졌다.
세이아드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레사스는 숨조차 쉬지 않고 자신을 담고 있었다. 까맣게 물들었던 보랏빛 눈은 무서울 정도로 세이아드를 주시했다. 눈을 깜빡이면 이 순간을 놓치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이 시간에 멈춰 있었다. 한참을.
저 높이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잘게 흔들리다 우수수 떨어지며 작은 돌풍이 그들을 덮쳤다. 솨아아 흘러오는 바람이 발목을 간질거리다 올라와 레사스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고운 실처럼 흩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떠오르자, 하얀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레사스의 얼굴에 천천히 변화가 생겼다. 짙은 검은 눈썹이 끝으로 슬픈 듯 늘어지고, 반대로 눈은 환희에 물들어 잘게 접혔다. 아주 조용한 웃음을 입가에 걸친 그는 지나치게 슬퍼하며 기뻐했다. 모순된 감정 두 개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내 생각보다 더….”
미약한 속삭임이 레사스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더….”
입술이 작게 벌어진채 달싹이더니 결국 거기서 끝났다. 이윽고 레사스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만들어냈다.
다행히도 울음은 멈췄으나 그의 미소는 세이아드가 바라던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제 행동 하나하나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기뻐하는 수줍은 설렘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작은 호의에도 온 힘을 다해 기뻐했으니, 이 순간이 오면 훨씬 더 행복해할 거라고 믿었는데 말이다.
그가 기뻐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다만 레사스는 환희에 물들어 빛나는 대신, 애환이 가득한 눈으로 감사해했다.
“고마워요, 이드. 내 소원을 들어줘서요.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세이아드는 답답한 마음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애당초 물러서는 것은 세이아드의 성격이 아니었고, 레사스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게 하려면 이 순간 그를 설득해야 했다.
“이드가 내 부탁을 따라… 말해 줬으니까요.”
레사스는 차마 ‘좋아한다’는 말도 입에 담지 못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가정을 하는 게 큰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
“세상에 어떤 얼간이가 좋아한다는 말을 남이 시킨다고 합니까.”
그는 언제나와 같이 레사스에게 무엄하게 굴기로 했다. 냉소적인 그의 반박에 레사스가 놀란 듯 눈을 깜빡거렸다. 놀란 초식 동물같은 귀여운 모습이었다. 세이아드의 마음에 여태까지와는 다른 열망이 피어올랐다. 제 가이드를 놀라게 해 주고 싶고, 자신이 주는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 걸 목격하고 싶었다.
남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잊어버린 지 오래지만,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그간 보인 태도를 믿었다. 그는 자신이 뭘 해도 좋아해 줄 것이다.
“제가 전하를 진심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셨나요.”
“알아요, 이드가 나를 이제 미워하지 않는 걸요.”
“아뇨, 그런 감정이 아닙니다.”
잠시 고민하던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도망가지 못하게끔, 다행히 아직 절 끌어안고 있는 손을 잡았다. 팔을 슬쩍 뒤로 돌려 손등을 감쌌다. 손가락을 사이사이 겹치며 세이아드가 속삭였다.
“저는 정화가 필요하지 않아도 전하를 만지고 싶습니다. 전하께서 제 옆에 있지 않는 것이 싫고, 전하의 눈길이 제가 아닌 다른 이에게 향하면 철들지 않은 소년처럼 화가 납니다.”
독점욕을 진득하게 드러내며 세이아드는 똑바로 레사스를 쏘아보았다. 언제나 무미건조하던 그의 회색 눈에 정열이 짙게 스며 있었다. 욕망과 갈망이 숨을 기색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농밀한 시선에 레사스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속눈썹을 높게 치뜬 그가 입술을 작게 벌렸다. 가느다랗게 새는 숨소리가 뜨거웠다.
“분명 오래간 전하께 못되게 굴었으니, 절 쉽게 믿으실 수 없다는 걸 압니다. 하면 믿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죽지 않고 살아서,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쥐여 드리겠습니다. 명예를 원하신다면 명예를, 행복을 원하신다면 행복을, 아니면….”
그리 말하며 세이아드는 겹쳐 쥔 손을 스르륵 움직였다. 레사스의 손을 쥐어 자신의 뺨을 만지게끔 하고는, 시선을 위로 올려 선명하게 의사를 내비쳤다. 잘게 떨며 제 뺨을 감싼 손바닥에 날카로운 코끝을 부드럽게 비빈 후, 그는 입술을 벌리며 손바닥과 손가락을 입술만으로 핥았다. 메마른 입술이 따듯한 손바닥에 비벼져 점점 뜨거워졌다.
“제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깜빡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아찔하게 얽히던 보라색 눈이 그 찰나 가까워졌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깃털을 감싸듯 조심스럽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이아드를 향해 고개 숙인 레사스가 그의 입술을 삼켰다.
여유라곤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그를 덮친 레사스는, 아직 허리에 얹힌 다른 팔에도 힘을 주며 세이아드를 아예 가둬 버렸다. 어떻게든 그를 자신의 품에 욱여넣고 싶은 것처럼 껴안으며 레사스가 입을 맞췄다.
내내 가르쳐온 것이 무색하게 레사스는 처음 입을 맞추던 때처럼 서툴고 정직하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본연의 레사스임을 알리듯이, 부드럽게만 보이던 남자는 의외로 거칠고 욕심이 많았다. 세이아드를 이미 가득 삼키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더 닿으려 그의 허리를 당겼다.
딱 맞는 홈에 맞물린 것처럼 서로의 입술이 겹쳤다. 부드럽고 말캉거리는 레사스의 아랫입술을 핥으며 빨자 레사스가 들끓는 숨소리를 냈다. 목 안에서 울리는 그의 낮은 신음을 듣자 등골이 오싹했다. 전율이 연달아 일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거의 잡아먹히는 듯한 입맞춤인데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윽고 입술 안으로 혀가 파고들었다. 제 자리를 찾듯이 입술을 헤집고 들어온 혀가 치열을 하나하나 맛보다가 입천장을 핥았다. 오톨도톨한 부위를 지나 판판한 위쪽을 혀끝으로 긁는 감각에 세이아드는 몸서리쳤다. 간지러움이 밀려들어 신음이 절로 샜다.
“하, 아…, 큭.”
너무 좋아서 눈앞이 하얘지는 감각과 함께 세이아드는 본능을 따랐다. 레사스와 닿기 시작하면 항상 이성이 날아가 더한 걸 하고 싶다는 욕구만이 남았고, 지금도 별 다를 바는 없었다. 오히려 그 전보다 더했다. 마음을 자각하자 제 모든 것을 녹여 레사스와 섞이고 싶다는 갈망이 크게 일었다.
허리를 붙이고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넣자 레사스가 크게 가슴팍을 들썩였다.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이 세이아드의 옷을 억세게 구기더니, 이윽고 미치겠다는 숨소리를 내며 레사스가 몸을 물렸다. 그는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은 기뻐서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면서도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눈이었다.
“이드, 이런 말은… 쉽게 하면 안 돼요. 나는, 그대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자격이 없어요.”
그렇게 원하던 말을 들었음에도 오히려 물러서려는 레사스를 보고 있으려니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둘이서 밤을 지새우던 남부의 숲에서 레사스는 자신에게 사랑을 주고 싶을 뿐, 감히 자신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 말이 단지 제 태도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어질 수 없다고 선을 긋던 저를 위해서 언제나처럼 상냥하게 구는 거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레사스는 정말로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손끝이 차가워졌다. 세이아드는 제가 생각보다 더, 레사스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레사스가 능력을 각성한 이후로는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는데, 레사스는 여전히 본인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제게 좋아한다고 속삭여 달라 부탁하셨습니까? 막상 제가 그리 말하고 나니 흥미가 떨어지셨나요? 얻기 어려운 것을 취하면 마음이 식는 사내의 본능이 전하께도 자리 잡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드.”
세이아드는 더는 명백한 감정을 사이에 두고 거리를 벌리고 싶지 않았다. 물러가거나 물러서는 짓은 스스로도 지긋지긋했다. 겨우 깨달은 마음을 모른 척하기 싫었다. 이런 마음을 담아 일부러 강하게 나가자, 레사스의 얼굴이 순간 무서워졌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나의 마음은 그따위 욕망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할 거예요. 내가 그대를 이 세상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 뭘 할 수 있는지. 나는 그대를 살릴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이를 기꺼이 바칠 놈입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오싹했다. 그 누구보다 선량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앞장서던 레사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마음이 너무나 지독하고 강렬해, 세이아드는 두려운 동시에 묘한 전율을 느꼈다.
“나는 지금 그대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고 있는 거예요. 그대가 나의 추악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겁먹기 전에요. 기회는 한 번입니다, 이드. 내 손을 잡으면 다시는 나의 옆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세이아드는 언제나 레사스의 보라색이 북부의 얼음새꽃을 닮았다고 여겼다. 얼음을 녹이고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그 꽃은, 막상 그 아름다움에 홀려 손을 대면 꽃잎이 지닌 독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멀리서 보아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레사스는 분명, 남들과는 같지 않았다. 어딘가 비틀리고 결핍되어 세이아드조차도 그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것은 레사스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짓을 했든 간에 변하지 않는 사실로,
레사스가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고, 좋아하고 있다는 거였다.
“저는 티테르입니다, 전하.”
세이아드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점 하나였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절대로 도망가는 법이 없지요.”
상체를 반듯하게 편 세이아드는 동요 없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레사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성의 정원에 숨어 연회장을 훔쳐보던 아이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그날처럼, 세이아드는 희미하면서도 선명한 미소를 그의 입꼬리에 작게 매달았다.
“그러니 제 손을 잡고, 기꺼이 전하의 욕심대로 저를 그 옆에 매어 두십시오.”
달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에 뜬 달이 세이아드의 머리칼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태양처럼 강렬하지 않지만 어둠에 길을 잃은 누군가에게만큼은 가장 밝고 찬란할, 그런 웃음이 세이아드의 얼굴에 드리웠다.
달.
나의 달.
나의 목숨, 나의 사랑, 나의 영혼을 밝히는 단 하나의 빛.
세이아드가 제 이름을 처음 불러 준 그 찰나부터, 그는 레사스의 세계가 되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오래전, 레사스가 열 번째의 겨울을 맞던 시기였다.
그들에게는 두 번의 첫 만남이 있었다. 세이아드가 기억하는 여름, 그리고 레사스가 기억하는 겨울.
레사스 솔리아스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을 한 번 살았다. 아름다운 시기였다. 모두가 세이아드를 사랑했으며 티테르는 서로를 의지하며 니르아를 물리쳤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