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아셀라의 경쾌한 설명에 샬로트의 안색이 굳었다. 신중해져야 할 때임을 직감한 모양인지 샬로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신경질적인 눈으로 스텔라나 아셀라를 흘끗 쏘아보던 샬로트가 태도를 바꿨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그녀는 앞선 발작이 없던 일인 것처럼 거만하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악마가 떠돈다는 같잖은 소문에 너무 심취해, 증거조차 없는 옛날이야기를 들먹이는 게 정상인가요? 그건 누명이에요. 게다가 오라버니가 대체 어떻게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건가요? 참으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이성을 잃고 악을 쓰던 스스로를 뻔뻔하게 부정하는 모습이 사클라니 후작의 여식다웠다. 명예보다는 당장의 이득과 실속을 중요시하던 후작이기에 지금과 같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세이아드는 샬로트를 지그시 내려보며 허점을 짚었다.
“내가 너의 오라비를 죽였다고 지껄이던 걸 여기 있는 모두가 들었다.”
“대공께서 잘못 들으셨나 봐요. 전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어요.”
다수의 기억을 당당하게 거짓으로 몰아가는 배포는 꽤 당찼지만, 그뿐이었다.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겨웠다.
“아무래도 샬로트 양이 정신을 놓았나 보네요. 자신이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고, 오락가락 주장을 바꾸는 걸 보아하니 말이에요. 레사스 전하나 대공께서 아까 전의 망발을 인내해 주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나 봅니다. 원래 미친 사람은 건드는 게 아니거든요.”
스텔라가 웃으며 말을 받아쳤다. 어릴 적부터 스텔라는 그녀의 어머니를 닮아 거침없는 면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조용해진 후로는 이렇게 굴 수 있음을 잊고 살았다. 내내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나아지며 세이아드도 같이 응수했다.
“아스테르 전하께 누가 될 일이군. 왕족의 정혼자가 정신을 놓았다니, 파혼을 고려하고도 남을 사유야.”
안 그래도 스텔라의 말을 듣자마자 부르르 떨고 있던 샬로트는, 세이아드의 말을 듣자마자 애써 되찾은 평정을 잃었다.
“어디서 감히 네까짓 게 전하를 들먹여!”
샬로트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핏발 선 눈으로 세이아드에게 삿대질했다.
“전하께 모든 것을 바친 건 나야! 그분을 진정 사랑하는 것도 항상 나였어! 그런 날 두고 전하는 대체 왜 너 같은 걸…!”
긴 시간 쌓아 온 분노가 샬로트를 휩쓸었다. 무례하다 못해 위험하게 구는 그녀를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이 서린 외침을 듣자 일순 마음이 불편했다. 항시 자신이 아스테르의 티테르이기 때문에 샬로트가 그렇듯 군다고 여겼는데, 생각보다도 그 마음이 깊은 게 걸렸다.
그러나 따지고 본다면 샬로트는 아스테르의 힘을 알면서도 협력한 것이고, 세이아드는 그 같은 존재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건 단지 샬로트가 원해서 선택한 일일 뿐이니.
과거 세이아드 스스로가 끔찍하게 여겨지게끔 만들던 이는, 지금 보니 스스로가 형편없는 사람이었던 것뿐이었다.
그걸 목격하니 분노보다는 허무함이 일었다. 알아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는 샬로트를 굳이 여기서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바로 그때, 침묵하던 레사스가 입을 열었다.
“입 다물어.”
앞서 레사스에게도 결례를 범하던 샬로트였지만, 레사스의 목소리가 워낙 서슬퍼랬던 것인지 움찔 입술을 닫았다. 안개 속에서도 느꼈던 숨 막히는 기운이 잠시간 그에게서 뻗어 나오자 샬로트는 견디기 어려운 듯 허리를 잠시 수그렸다.
“어디까지 헛소리를 하는지 구경할 겸 내버려 뒀는데, 대공에게 그딴 식으로 구는 것까지 봐줄 생각은 없어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샬로트 사클라니. 작위도 없고, 능력도 없고, 왕세자비가 될 수 있던 미래조차도 사라져 버렸지.”
시녀들의 눈길이 흘끗 샬로트의 어깨에 닿았다. 자존심을 크게 건드린 말에 샬로트가 레사스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스텔라가 가볍게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힘 하나 주지 않고 가는 팔을 꺾은 스텔라는 무게가 실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쯤 해요.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예요. 당신은 지금 수십 명을 죽인 사람으로 지목되어 있고, 이 같은 상황은 대단하신 후작 나으리가 와도 해결해 줄 수 없어요.”
그러자 샬로트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꺾인 팔을 비틀어 고개를 젖힌 그녀가 스텔라를 노려보았다.
“그깟 것들이야 다 죽이면 그만이에요.”
“목격자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데, 지금 공작을 비롯한 왕자까지 죽이겠다는 말인가요? 그거, 위험한 발언이네요. 이대로 내버려 두기 어려울 만큼.”
청록색 눈에 일순 살기가 어렸다. 삽시간에 흉흉해진 분위기에 시녀들이 겁을 먹었고, 샬로트도 당황했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까지 자신을 데려와 놓고 이렇게 말하리라 여기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지금 이 방에 증인이, 몇 이나 있는 줄 알고…!”
“영애의 논리대로라면 누가 뭘 봤든 다 죽여 버리면 그만 아니에요?”
일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스텔라를 말리지 않을 듯한 분위기에 샬로트의 초록색 눈에 공포가 어렸다. 위험을 감지한 샬로트가 도망가기 위해 마구잡이로 몸을 틀었으나 평범한 사람이 티테르를 이길 리 없었다. 그것도 훈련조차 받지 않은 귀족의 여식이.
세이아드는 그녀의 협박에 동조하는 척 서늘하게 샬로트와 눈을 마주쳤다. 시녀들조차 자신의 주인을 위해 나서지 않자, 샬로트가 이내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날 죽이면 무사할 줄 알고? 전하께서 너희 모두 죽일 거다. 우리를 제외한 지상의 모든 쓰레기를 청소하기로 하셨으니까!”
기다렸던 말이었던 것처럼 레사스가 웃었다. 보라색 눈은 얼어붙은 밤처럼 싸늘하나 입꼬리만 올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세이아드는 움찔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 약속을 믿는다니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가벼운 웃음을 터트린 레사스는 천천히 걸어왔다. 스텔라가 붙들고 있는 샬로트의 앞에 온 레사스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마주쳤다.
“어디 보자. 형님께서, 사클라니 소후작을 그렇게 바꿔 놓을 때 했던 약속을 지켰던가?”
그것은 샬로트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샬로트만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내내 독기에 차 있던 초록 눈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샬로트, 형님께서 너의 가문을 살려 둘 이유를 하나라도 말해 보거라. 그분의 말대로 세상이 무너진다면 그곳에서 제일 강한 이는 오직 한 명일 텐데, 사클라니 가문의 무엇이 필요하겠어? 챙겨 줄 필요 없이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세이아드는 종종 느끼던 이질감을 간만에 느꼈다. 자신이 아닌 사람을 상대할 때의 레사스는 간혹 지금 같은 서늘한 면모를 보이곤 했다. 모든 이를 좋아하고 다정한 성정이라고 여겼던 자신의 판단과 달리, 이번 삶에서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생각보다 무언가 결핍된 존재임을 느끼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레사스는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입에 담았다. 본인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던 때처럼.
“세상 어디에 약속을 지키는 악마가 있다고.”
세이아드가 불안하게 레사스를 살피는 사이, 외면하기 어려운 진실이 샬로트에게 도달했다. 악을 쓰고 반박해 오던 그녀는 저것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운지 입술을 벙긋댔다.
“너를 지켜 주는 아버지도, 네 명예를 받쳐 주는 가문도, 지금 네가 돕고 있는 사람을 따른다면 사라질 허상에 불과해. 그러니 살고 싶다면 형님의 위치를 말하거라.”
그리 말한 레사스는 스텔라에게 눈짓했다. 포박을 풀라는 지시에 스텔라는 마지못해 샬로트를 놓아주었다. 자유로워진 샬로트는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꼈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무덤덤한 눈으로 살펴본 레사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바닥까지 떨어지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어. 그게 네 고귀한 사랑이라면 말이야.”
헐떡거리며 위태로운 숨을 내뱉는 샬로트의 손은 보는 이가 불편할 정도로 덜덜 떨렸다. 험한 일이라곤 겪어 본 적 없을 후작의 막내 자식은 처음 겪는 압박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얼굴을 가려 버렸다.
잠시간 방 안에서는 샬로트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손 틈으로 살짝 드러난 입술이 뭔갈 말하고 싶은 듯 달싹거리더니 닫히기를 반복하다가, 이어서 샬로트가 손가락을 세워 눈두덩이를 후벼팔 듯이 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에 세이아드가 나서려는데, 레사스가 툭 말했다.
“할 말이 있다면 종이에 쓰거라.”
영문 모를 명령이었다. 하지만 샬로트는 그 말을 곧장 따랐다. 황급히 손을 내린 그녀가 정신없이 탁자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깃펜에 잉크를 찍은 뒤 놓여 있는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로 글을 쓰는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보는 건 레사스가 유일했다.
이윽고 깃펜을 내려놓은 샬로트가 몸을 웅크렸다. 두려움이 깃든 얼굴로 그녀는 레사스를 향해 애원했다.
“난 모르는 일이에요. 이제 알아서 하세요.”
입술만을 휘어 웃은 레사스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아셀라에게 종이를 챙기라고 명했다. 모든 일을 흥미롭게 구경하던 그가 얼른 명을 따랐고, 레사스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나오기 전 시녀들에게 샬로트를 감시하라고 이른 레사스는 복도 밖으로 나와 한참 거리를 벌린 후 스텔라에게 말했다.
“동부의 일은 베트리아 공작께 권한이 있으니, 원하는 대로 해결하시면 됩니다. 사클라니 후작과 협상하기 위해서는 증인들의 안전과 괴물의 사체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 보이네요. 후작께서 오기 전에 일을 처리하세요.”
“네, 전하.”
“후작이 오면 그때 나를 찾아요.”
명령을 전달한 레사스는 습관처럼 세이아드를 한번 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허물어트리곤 몸을 돌렸다. 숲에서 그를 추궁한 이후 자꾸만 피하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그대로 레사스를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일었다. 아까 전 자신이 한 말이 레사스의 속에 깃든 무언가를 충분히 덜어낼 만큼 위안이 되지 않은 것 같아, 그를 당장 따라가 다시 대화를 나눠야 했다. 결정을 내린 세이아드가 막 레사스를 따라가려는 차, 아셀라가 그를 잠시 붙들었다.
“각하, 잠시만!”
황급히 세이아드를 부른 아셀라가 종이를 세이아드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전하께 이걸 전달해 주실 분은 대공인 듯해서요.”
“…고맙군.”
감사를 표하고 자리를 피하기 전, 세이아드는 아까 그의 설명을 들으며 의아했던 점 하나를 물었다.
“너는 지금의 니르아가 새로 생긴 것들이라고 했지. 왜 그것들이 바뀌었는지를 알고 있나?”
“아아, 각하께서 그런 걸 궁금해하시니 무척이나 기쁘네요! 자고로 학구열이란 인간을 이 같은 자리에 오게 만든 귀한 힘이지요. 아무렴요. 자, 설화에 얽힌 모든 것은 건국 전과 후를 기점으로 나뉩니다. 그사이에는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지요.”
신이 나서 또다시 떠들려는 그를 세이아드가 얼른 제지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말해라.”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는 확실하게 믿고 있는 이론이 있습니다. 각 지역의 건국 설화에서는 항상 달은 별과 함께 내려와 태양을 구했다고 하지만, 솔리아스가 건국된 이후 달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별과 태양만이 존재했을 뿐이지요. 저는 악마를 봉인하던 때 달이 자신을 희생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니르아에 대한 묘사도 숲이 생긴 이후로 바뀌었어요.”
그러더니 정말로 즐겁다는 듯, 아셀라가 그에게 물었다.
“각하께서는 니르아가 숲에 갇힌 무언가로부터 인간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무슨 헛소리를.
아셀라의 말은 수백 년에 걸쳐 니르아를 죽이며 살아온 티테르의 의무를 부정하는 말이었다. 저렇게 가벼이 내뱉을 말이 아님을 알아, 세이아드가 경고의 의미로 미간을 찡그렸다. 짙은 눈썹이 매섭게 굳어지며 한기가 서렸다. 살벌한 반응에 아셀라는 슬쩍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힐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잘 생각해 보세요, 대공. 제 평생을 걸쳐 연구해 온 거니까요.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사람의 머릿속을 뒤죽박죽 헤집어 놓은 주제에 아셀라는 평온하게 몸을 돌렸다. 스텔라를 따라 냉큼 사라지는 그를 붙들어 화를 내기도 애매해, 세이아드는 눈을 찡그리곤 제 손에 쥐어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급히 휘갈긴 필체로 적혀진 내용이 있었다.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전하께서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에 심어진 씨앗이 그분의 눈과 귀가 되거든요. 나의 영혼은 죽어서도 그 분에게 귀속될 거예요. 그러니 협상은 아버지와 하세요. 아버지께 이걸 보여 주시면, 분명 응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