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다행히도 세이아드의 일행 중 사망자는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고 착각한 지크와 에니프는 다친 곳 없이 스텔라와 있었다. 바깥에 남았던 이들 또한 별다른 위험 없이 그들과 합류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확인하자 비로소 눈앞에 드리웠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정신을 아스테르가 잘도 헤집었다는 자각이 오싹하게 등을 적셨다.
그간 세이아드는 자신이 강해지면 어떤 것도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도 내면이 무너지면 아주 쉽게 스스로를 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참하게 깨달았다. 귓가에 속삭이는 악의에 찬 말이나 달콤하게 꾀는 제안 따위가 사람을 이렇게 쉽게 흔들 줄은 몰랐다. 목숨을 위협하는 공격이 아니기에 쉽게 떨쳐 낼 수 있다고 여긴 것이, 하나하나 독이 되어 영혼을 중독시켰다.
레사스가 없었더라면 정말로 자신은 아스테르의 손을 잡았을까?
아니라고 확신하고 싶지만 자신이 크게 흔들렸다는 걸 알기에 부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다른 것만큼은 이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앞으로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아까 같은 망설임은 없으리란 것이다.
레사스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의 행동이 그를 생각보다도 더 괴롭게 한다는 걸 알았다. 그같은 생각은 다른 곳으로도 뻗어 나가 세실리아를 비롯한 제 주변의 이들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를 불행하지 않게 하기 위해 선택한 일이 또 다른 불행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와 닿았다.
세이아드는 샬로트가 머물던 별장으로 오는 내내 그 같은 생각을 했다. 제 행동을 곱씹고 나자 레사스에게 다시금 확신을 주고 싶어졌다. 괜찮은 듯 웃어 버리며 등 돌리던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싶은 건 한없이 기쁘게 웃는 레사스였지, 괜찮은 척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세이아드, 들어가기 전에 물어볼 게 있어.”
하인들의 안내를 따라 별장에 도착하자 세이아드를 붙드는 손이 있었다. 숲의 중간에서 합류한 스텔라는 재회한 시점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심각한 어조에 세이아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자리를 피하기 전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살폈다. 그는 능숙하게 명령을 내리며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까 싶어 그를 유심히 보았으나 레사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분명 제 행동이 레사스를 건드렸다.
안개 속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서로의 마음이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에게 따 주려던 꽃을 대신 받았던 때만 해도 다 괜찮을 것 같았는데, 대체 어떤 연유로 레사스가 저리 구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것도 빠르게.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며 조바심이 일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시간은 길게 안 잡아먹을게. 이거만 답해 줘.”
스텔라는 세이아드의 시선이 저택 쪽으로 향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덧붙였다. 다시금 그녀를 내려다본 세이아드가 말해 보라는 듯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에게서 살짝 멀어지자 스텔라는 짧은 고민 후에 그에게 물었다.
“이런 질문 자체가 굉장히 불경하다는 걸 아니까, 미리 양해를 구할게. 내가 틀렸다면 틀렸다고 말해 줘.”
결심을 마친 청록색 눈이 확신을 담고 세이아드를 쏘아보았다.
“실드라스에서 헤어지기 전, 네가 그랬지. 티테르들만큼은 서로 분열되지 않아야 한다고. 그런 일을 하려는 자가 있다면 의심해 봐야 한다고도. 그때는 시르칸 실드라스에 대한 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른 말이라는 걸 알겠어.”
스텔라가 세이아드의 손을 맞잡았다. 두 손으로 그를 붙든 스텔라가 신뢰를 담은 눈으로 물었다.
“아스테르 전하께서는 그릇된 일을 하고 계셔. 맞지? 아니라고는 하지 마. 그분의 약혼자이신 샬로트 양이 지금처럼 끔찍한 상황에 엮인 것부터, 앞서 시온을 상대로 했던 일까지, 하나같이 그분이 있는 곳에서 생긴 비극이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예전의 상황까지 떠올랐어.”
스텔라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랫동안 네 옆에는 아스테르 전하뿐이었잖아. 너는 혼자서 악시드 영지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나를 비롯한 모두 널 도와주지 않고 네 어머니에게 생긴 비극을 정당화하려 했지. 만약 이번에 네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고 눈 뜨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 네게도 어떤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세이아드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의지가 깃든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되살아난 이후 그가 처음으로 사과를 들었던 사람이 셀피니 베트리아라는 것이 떠올랐다. 응어리졌던 한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시점도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미안해, 세이아드. 실드라스 영지에서 너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못했어.”
“아니. 잘못은 나에게도 있다. 네 말처럼 나는 고립되고 있었고, 스스로 그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어. 레사스 전하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다.”
레사스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이지 않고, 남들과 함께 등을 돌렸다면, 아마 세이아드는 전과 같이 고립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세이아드가 변하려는 결심은 모두 레사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에 칼을 찔러넣던 그 찰나부터 말이다.
한때는 자신을 누구보다 맹목적으로 따랐던 아이가 그렇게나 저를 경멸하게 되었다는 것이 세이아드의 마음을 건드렸다.
휩쓸리다시피 여기까지 오면서 세이아드는 자신의 행적에 레사스가 이렇게 많이 얽혀 있었다는 걸 크게 체감하지 못했다. 알고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자신을 바꿨는지 정확히 되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레사스는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있었다. 자신이 그를 증오하려고 마음먹었던 과거에도.
세이아드는 스텔라가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살짝 쥐었다. 레사스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자신은 아직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나 많았다. 어서 그에게 돌아가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치솟았다.
“너의 말처럼 아스테르 전하는 삿된 힘을 지니고 계신다. 나 역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당장 드러낼 증거가 없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조만간 모두가 알 것 같으니 부정하지 않겠다.”
샬로트를 추궁하면 어떻게든 그와의 연결고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금세 알려질 일이니 세이아드는 이제 그걸 숨기지 않기로 했다. 헛된 추측으로 사람의 삶을 망칠 수 없어 신중하게 굴었지만, 아스테르 본인이 거침없이 굴고 있으니 더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럴 것 같았어. 그렇다면 사클라니 후작이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건 함정이겠네. 숲에는 니르아가 아닌 이상한 괴물만 있었고, 우리 모두 이상한 일을 겪었잖아. 더군다나 너는 위험했었다며.”
아스테르와 있던 일을 그녀에게 딱히 설명한 적 없었기에, 세이아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누가 그랬지?”
“원래 전하께서는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었어. 앞서가던 내가 누군가의 습격을 받았고, 뒤이어 사람들이 떼로 튀어나와 우릴 죽이려 했거든. 확인해 보니 모두 사클라니 후작의 기사들이었어. 그런데 하나같이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말이 안 통해서 전투가 길어졌고.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쯤에 전하께서 네가 위험하다는 말을 하더니 홀로 사라지셨어.”
거기까지 말한 스텔라가 안심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서 정말 너를 아끼시나 봐, 세이아드. 언제나 네가 위험할 때면 그분이 네 뒤를 지켜주시잖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는 스텔라의 말을 듣자, 세이아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당장 레사스를 보고 싶다는 조바심이 그녀에게도 느껴졌는지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장섰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도 샬로트 양과 할 이야기가 많거든. 나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가씨는 노바 외에는 모두 질색이라서.”
아까까지의 다정함을 지워 버린 스텔라는 어느새 영주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과거, 셀피니를 혹한제에서 잃고 홀로 서야 했던 그때보다도 더 단단한 등이 세이아드를 이끌었다.
저택 안은 불안에 떠는 사람들로 인해 긴장감이 가득했다. 강 너머에 대기하던 기사들이 건너와 저택을 에워싼 상태였고, 그들이 모시는 아가씨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게 정황상 확실했다. 앞서 암시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던 무리 중에 살아남은 이들이 샬로트의 만행을 읊고 다니기까지 하자 하인들은 공황에 빠졌다.
저택으로 들어서자 복도 너머로 샬로트가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딱히 위치를 물어보지 않고도 스텔라와 세이아드는 그녀의 위치를 쉽게 알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기사들이 지키는 방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각하.”
세이아드와 스텔라에게 키릴이 깍듯이 인사했다. 세이아드는 닫힌 방에서 들리는 샬로트의 비명을 들으며 물었다.
“안에 누가 있지?”
“레사스 전하와 아셀라 경이 들어가 계십니다. 아, 당연히 시녀들도 함께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스테르 전하의 약혼자이시니 불미스러운 말이 도는 것은 배제했습니다.”
“우리도 들어가겠다. 키릴, 너는 후작에게 전령을 보내 이곳으로 소환하거라.”
“알겠습니다.”
키릴이 몸을 돌리는 걸 확인한 세이아드는 거침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우물쭈물하는 시녀들과 몸을 마구 비틀고 있는 샬로트였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오빠를 돌려내! 오빠를 돌려내라고요! 아아아악!”
영문 모를 말을 하는 샬로트는 흡사 정신을 놓은 사람 같았다. 무엄하게도 왕자를 향해 미친 짓거리를 하는데도 레사스는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아스테르의 약혼자인 것과 여자인 점이 마음에 걸리는지, 아셀라 또한 옆에서 샬로트의 팔을 붙들면서도 강압적으로는 굴지 못하고 있었다.
악을 쓰던 샬로트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더니 고개를 휙 돌려 세이아드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눈에 불을 켜더니, 자신을 붙들고 있는 아셀라의 팔을 깨물었다. 난데없는 미친 짓에 아셀라가 팔을 뒤로 빼자, 샬로트는 그 틈을 타 침대에서 기어 나오듯 빠져나왔다. 세이아드에게로 달려온 샬로트가 넘어지다시피 하며 그의 옷깃을 쥐곤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악마! 보기만 해도 역겨운 놈이…! 네가 오라버니를 죽였어!”
세이아드는 눈을 찡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처럼 샬로트의 미친 짓을 내버려 둘 용의가 없었다. 팔을 꺾어 제압하기 전 한 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해 그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난 네 오라비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똑바로 말해.”
“아까 숲에서 봤잖아! 잘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샬로트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려는 그 찰나, 세이아드가 나서기도 전 스텔라가 움직였다. 그녀는 우악스러운 힘으로 샬로트의 어깨를 낚아채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샬로트의 뺨을 올려붙였다.
짜악!
크게 울려 퍼진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몰렸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고개가 휙 돌아간 샬로트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감쌌다. 방금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초록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 맺혔다.
“정신 차려요, 이 멍청한 여자야. 지금 상황이 어떤지 감이 오지 않는 거예요? 당신이 멀쩡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걸 본 목격자가 수십 명이에요. 똑바로 처신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스텔라는 차분하고도 신랄하게 그녀의 처지를 짚어 주었다. 충격이 워낙 컸는지 샬로트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깨물린 팔을 주무르며 레사스의 옆에 선 아셀라가 경쾌하게 말했다.
“아마도 아가씨께서는 숲에 있던 괴물을 칭하고 계시는 것 같네요. 그곳에서 대공이 죽인 존재는 오직 괴물뿐이니까요.”
시녀들은 그 말에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숲에 있던 괴물을 봤던 이들인지 그들의 얼굴 위로 두려움이 일었다.
“그렇다는 건 정말 큰일인데요. 제가 알기로, 숲에 있던 괴물은 악마가 직접 씨앗을 심어 만드는 존재라고 읽었거든요. 고대의 서적에 의하면 태양이 삼켜졌던 때 악마가 부리던 하수인들이 꼭 그 같은 모습을 했다고 하지요.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삼아 부리던 괴물. 그걸 ‘니르아’라고 불렀다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레사스의 말처럼 괴물에 대해 아셀라가 알 거라고 하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는 신이 난 듯 말을 이었다.
“원래 니르아는 ‘부스러기’라는 뜻을 가진, 악마의 하수인을 칭하는 단어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니르아는 악마가 봉인된 이후에 새로이 생긴 것들이지요.”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샬로트가 겨우 입을 열었다. 표독스럽게 눈을 치뜬 그녀가 욕을 지껄이자, 아셀라가 아차, 하더니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아가씨는 지금 악마의 하수인을 오빠라고 칭하시고 있다는 거지요. 그 말은 즉, 왕국에서 난리가 난 악마와 사클라니 가문이 연관되어 있다고 직접 말씀하시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