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형형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동시에 세이아드는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레사스의 안에 감돌고 있는 저 힘은 절대로 나쁘지 않으나, 지나치게 강하여 존재 자체로 위협이 된다는 생각이 일었다. 소름이 쭈뼛 돋더니 속이 뉘엿거렸다. 이 자리에 있기가 힘들었다.
비단 세이아드만이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는지 막 암시에서 깨어난 하인들 중에 주저앉는 이가 나왔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레사스의 힘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바로 샬로트였다.
보이지 않는 파장이 사방을 휩쓴 순간 샬로트는 세이아드를 낚아채려던 손을 바르르 떨며, 코앞까지 온 먹이를 놓친 짐승같이 분노했다. 아까까지의 여유가 죄다 사라진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나를… 또…!”
높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분에 찬 비명이 그 뒤를 이었으나, 레사스가 저벅, 저벅, 다가가기 시작하자 점점 샬로트의 눈동자에 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초록색 눈이 얕게 일그러지다가 스르륵 감겼다. 아스테르가 사라졌다는 직감이 드는 동시에 그녀가 혼절했다.
피로 적셔진 풀 위로 샬로트의 몸이 쓰러지자마자 주변의 안개가 훨씬 옅어졌다. 쓰러진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잠시 살핀 레사스가 고개를 돌렸다. 인간 같지 않은 흰 얼굴과 마주치자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지독하게 그를 보고 싶어 했음에도 몸이 마음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 앞의 레사스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 같았다.
“다친 데는 없나요, 이드?”
그러나 다정하게 질문하며 천천히 웃는 눈을 보자 천천히 경계심이 풀렸다. 몸은 여전히 레사스의 기운이 버겁다는 듯이 거리를 두려 했지만, 세이아드는 레사스만큼은 제게 위험한 존재가 아님을 확신했다.
“저는….”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등지고 있는 기사들의 시체를 생각하면 그렇다고 할 수 없었다. 입가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문 그는 괴로운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거기엔 처음 세이아드가 보았던 괴물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뭐가 진실인 거지?’
안도감이 밀려들면서도 두려움이 일었다. 자신이 끝내 정신을 놓고 환상을 보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폭주하기 직전의 현상이 바로 이러했기에, 세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동요를 드러냈다.
“…제가 보고 있는 것이, 괴물이 맞습니까, 전하?”
불안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세이아드는 레사스에게 다급히 매달렸다. 지난 삶의 폭주가 아스테르의 정화 때문이라고 확신했는데, 결국 폭주는 막을 수 없는 운명인 건지,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문제인 건지 무서웠다.
어깨를 잡으며 무너지려는 세이아드의 허리를 레사스가 감쌌다. 단단하고 따듯한 팔이 세이아드를 꽉 붙잡고 지탱했다. 레사스는 그를 자신의 품에 숨기듯 안고서 귓가에 속삭였다.
“네. 제 눈에도 괴물이 보여요. 아까 전에 그대가 무엇을 보았든 그건 환상입니다. 안개는 사람의 눈을 가리곤 하니, 이드 또한 잠시 길을 잃었던 거예요.”
다정하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다. 세이아드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절 품고 있는 레사스를 보았다. 티테르답지 않은 꼴을 보였음에도 레사스는 그저 괜찮다는 듯 웃어 주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금빛이 여전히 일렁거리고 있었지만, 저 웃음만큼은 자신이 아는 레사스가 맞았다. 맥이 탁 풀리며 드디어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내심 불안했다. 레사스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고 아스테르가 했던 것처럼 절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기 때문에.
레사스는 각성한 이래 한 번도 세이아드를 밀어낸 적 없었지만, 그에게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항시 그를 휘두르려 하거나 정화를 먼저 요구했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부족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는데….
‘티테르는 남들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이드. 정화는 조금 뒤로 미루지. 북부의 대공이 이토록 형편없다는 걸 알면 누가 너를 두려워하겠나.’
아스테르는 자신이 죽기 전쯤 그런 말을 종종 했었다. 부작용의 강도가 심해지고 빈도도 늘어나는 시기였다. 그때는 항상 그의 말이 맞다고만 여기고 참아냈는데, 이제 와서 곱씹어 보면 그 또한 절 외롭게 하려는 아스테르의 술수였다.
소름이 돋았다. 숨 막히게 자신의 목을 조여 오던 뱀이 사라졌지만, 아스테르가 보인 집착은 거머리처럼 전신에 달라붙어 있었다. 가슴이 짓눌린 기분에 세이아드는 크게 숨을 들이켜곤 일부러 자신을 다잡았다. 그러다 뒤늦게 혼란스러워하는 하인들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샬로트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어 하면서도 괴물의 시체나 레사스가 두려운 모습이었다.
“일단은 이곳부터 수습하는 게 좋겠습니다. 스텔라나 다른 기사들과 같이 계셨습니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팔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를 안아 주고 있던 레사스는 흠칫 그런 세이아드를 내려다보았다. 세이아드의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레사스가 그를 한 번 더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으면 세이아드를 놓치기라도 할 것처럼.
“맞아요. 이드 혼자 안개 속에 삼켜졌어요. 안개가 걷히고 있고, 모두 무사하니 이따가 합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미련이 가득한 손길로 세이아드의 등을 한참 쓸어 주던 레사스는 천천히 몸을 뗐다. 그는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주변을 훑은 뒤, 샬로트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명했다.
“나는 레사스 솔리아스, 태양의 핏줄을 이은 자다. 너희 중 누군가는 샬로트 양을 부축하고, 나머지는 시체를 수습하고 우리에게 길을 안내해야겠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갑자기 나타난 왕자에, 앞서는 대공이라 말했던 존재까지, 일평생 볼일 없는 이들을 마주친 것도 모자라 받드는 아가씨는 기절했다. 사위를 둘러싼 무서운 광경까지 합쳐져 하인들은 두려워하며 얼른 움직였다.
괴물의 시체를 힉, 힉, 무서워하며 빙 돌아간 장정이 샬로트를 업었다. 시녀로 보이는 이들이 그의 옆에 얼른 붙어 불안한 발걸음으로 따라갔다. 시체들이 있는 곳으로 간 하인들은 끔찍한 몰골에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죄다 서로 아는 얼굴인지 기겁하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렸다.
세이아드는 자리를 떠나기 전 한 번 더 괴물의 시체를 보았다. 니르아라기엔 지나치게 인간 같으면서도 결코 인간은 아닌 형상이 기괴했다. 그런 그의 옆으로 다가온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팔을 조심스레 잡았다.
“봐서 좋을 게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게 무엇인지 아시는 겁니까?”
“그에 대한 해답은 아셀라가 알 것 같군요. 그는 고대의 역사를 알아내는 데 심취한 이니까, 아는 것이 많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레사스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세이아드가 시간을 주고도 몇 분간 침묵하던 레사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세이아드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아까….”
금색이 많이 옅어진 눈동자 너머로 보라색이 보였다. 그는 걱정과 슬픔이 뒤섞인 눈빛으로 물었다.
“정말로 그대를 내어주려 했던 건가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세이아드는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굴복할 뻔했던 순간을 보인 것이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거짓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때문에 사람이 계속 죽어야 한다면,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맞습니다.”
“그건 그대의 잘못이 아니에요. 잘못은 오직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도 그렇게 말해 주셨지요. 하지만, 전하….”
세이아드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사람이 죽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아물어 가던 영혼의 상처가 벌건 속을 드러내며 벌어졌다. 세이아드는 자신이 누군가의 죽음을 정당화시키는 빌미가 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요?”
레사스가 그때 물었다. 순간 질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이아드가 멈칫하자, 레사스는 짙은 눈썹이 처연하게 휘었다.
“나는 그대가 이곳에 남을 이유가 되지 못하는 걸까요? 아직 내가 그대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나요, 이드? 여전히 외롭고 슬픈 건가요?”
아.
세이아드는 눈을 크게 떴다. 레사스가 이런 일로 인해 슬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제 선택을 이렇게 해석할 거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전까지는 누구도 세이아드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걸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그대가… 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어요.”
“전하, 저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자의 손을 잡기 직전까지 갔지만, 바로 그 순간 전하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외롭지도 않습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레사스의 얼굴에 드리운 슬픔을 걷어 내고 싶어서, 세이아드는 최대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레사스의 존재가 자신을 망설이게 했다고, 그런 순간에도 레사스가 떠올랐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서글프게 굳은 입술이 세이아드의 말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미소는 오래가지 않고 다시 먼지처럼 흩어졌다.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뺨을 작게 매만지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대는 따듯하고 상냥한 사람이라, 고맙게도 나를 걱정해 줬군요.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이드가 날 배려해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것도 알겠어요. 나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레사스의 속삭임을 듣고 있던 세이아드는 그의 말이 맞으면서도 묘하게 어긋났다고 생각했다. 세이아드의 행동은 레사스를 위한 배려가 아니었다. 그건 모두 스스로가 원했기에 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대의 생을 향한 집착이 될 수는 없겠죠. 아마도 아까 같은 상황이 또 닥치게 된다면….”
중얼거림이 점점 희미하게 잠겼다.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일어 세이아드가 그를 붙들었다.
“전하, 저는 악마에게 저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레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글픈 낯을 감춰 버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로 돌아와 웃었다.
“알아요. 그대는 강한 사람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사라져가던 금빛이 레사스의 눈동자 위로 다시금 맺혔다. 강렬한 불꽃처럼 크게 어른거린 금색은 잠시 후 감쪽같이 흔적을 감췄다.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서라도 악마를 죽이겠습니다. 방금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그로 인해 아까부터 도졌던 불안함이 크기를 키웠다. 안 그래도 레사스가 어떤 원리로 암시를 깨우고 아스테르를 쫓아냈는지가 의아한 상황에, 저런 말을 하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솔직히 수상했다. 레사스가 진즉 암시를 풀 수 있었다면 전에 있던 습격도 여유롭게 대응할 수 있었을텐데, 어제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세이아드는 그를 쥔 팔을 놓아주지 않고 눈썹을 찡그렸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전하. 모든 것을 내어주시겠다는 것은 전하께서 하실 말이 아닙니다. 전하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아시지 않나요.”
“걱정 말아요. 그저 나의 마음이 그렇다는 비유일 뿐이에요.”
죽어 가는 순간일수록 오히려 화려한 꽃을 피우는 식물같이, 레사스는 화사하게 웃으며 그의 걱정을 부정했다.
“다 괜찮을 겁니다.”
레사스의 미소는 잔상이 되어 세이아드의 눈가에 아른거렸다. 그를 붙들고 자꾸만 뭔갈 물어보고 싶었지만 레사스는 대화를 이어갈 기색이 아니었다. 이대로 레사스를 놓아줄 수 없어 팔을 놔주지 않자, 레사스가 부드럽게 그의 손을 떼어 냈다. 손등을 한번 토닥여 준 레사스가 발길을 틀었다.
“가요, 이드. 이제부터는 할 일이 많거든요.”
붙잡기 어려운 바람처럼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손을 빠져나갔다. 언제나 쥘 수 있는 나무처럼 여겨졌던 그가 이렇듯 느껴지는 것이 이상했다.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처럼 레사스가 떠난 곳을 보는 마음이 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