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절망이 선명히 그들의 귀에 들렸지만 보이는 게 없었다. 높게 솟은 나무 사이를 빼곡하게 채운 안개 때문에 빛도 그림자도 들지 않아 사방이 흐릿했던 탓이다. 방향을 찾는 사이에도 비명은 연이어 울렸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듣는 이가 다 선득해질 소리였다.
“각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키릴이 나서길 자처했으나 세이아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스텔라와 시선을 교환한 뒤 레사스에게 의견을 구했다.
“사실이 어떻든, 니르아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숲에는 티테르가 들어가야 합니다. 저와 스텔라가 들어가고, 전하께서는 이곳에서 기사들과 함께 계시지요. 길을 잃어 모두 흩어질 수도 있으니 적어도 몇은 이곳에 남아 출구를 알릴 횃불을 들고 있어야 합니다.”
“아뇨, 나도 같이 들어갑니다. 얼마나 강한 니르아와 싸우게 될지 모르니 나는 반드시 필요해요. 아셀라, 너는 이곳에서 키릴 경과 함께 있어. 베트리아 공작의 기사들을 대동해 들어가 상황을 확인한 뒤, 손이 더 필요하면 나와서 합류할 테니.”
레사스는 반박을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레사스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으나, 차라리 자신이 있는 곳에 두는 게 나을 듯해 세이아드는 결국 동의했다.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키릴과 아셀라가 항시 챙겨다니는 횃대에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본 스텔라가 심호흡을 하고 앞장섰고,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먼저 가게끔 했다. 후방은 세이아드와 기사들이 담당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숲으로 들어가기 전,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손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이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대의 잘못은 없다는 걸 반드시 기억해요.”
레사스가 하는 말에는 항상 의미가 있으니까, 세이아드는 가만히 그가 말하는 것을 새겨들었다. 무엇이 그를 불안하게 하는지 몰라도 자신의 대답이 그를 안심시킬 수 있었으면 하여, 세이아드는 조용히 긍정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얼굴을 굳힌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손을 고쳐잡으며 간절히 당부했다.
“내 손을 절대 놓지 말아요.”
레사스는 마치 세이아드를 놓칠까 봐 불안한 사람같았다. 세이아드는 그런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깍지를 마주 껴 주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걱정되는 눈으로 세이아드의 손을 가만히 눈에 담은 레사스가 이윽고 미련을 떨치듯 천천히 뒤돌아 숲으로 들어섰다.
지금만큼은 기사들의 시선은 아랑곳않은 채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손을 꽉 붙들고 뒤를 따랐다. 안개에 젖은 풀을 밟고 몇 번을 걷다 보니 어느새 그들은 안개 속에 삼켜졌다. 숲 안으로 들어갔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점점 안개가 짙어지더니, 바로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밀도가 높아졌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공기가 뒷덜미를 감쌌다. 기감을 잔뜩 끌어올린 덕에 인기척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확실히 긴장감이 남달랐다. 그림자조차 숨겨 버리는 안개로 인해 자신의 힘 또한 평소보다 제약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비명이 들렸던 방향으로 어림잡아 쭉 걸었다. 종종 스텔라를 선두로 서로가 따라오고 있음을 말하여 확인하는 식으로 십여 분 정도를 걷다보니, 숨이 막힐 정도로 안개가 짙어졌다. 이러다간 나가는 길조차 찾지 못하겠다 싶어 곤혹스러워지던 차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뒤에 있던 기척이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발걸음이 멈췄다. 뒤를 돌아본 세이아드는 눈썹을 찡그리며 아까 소개받은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지크? 에니프? 따라오고들 있나?”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텅 빈 허공을 채운 안개만이 고요히 그의 주변에 고이고 있었을 뿐이다. 허공으로 증발한 것처럼 사라진 그들의 기척에 세이드가 서둘러 앞을 확인했다.
“전하!”
다행히 여전히 맞잡고 있는 손을 꽉 당기며 그를 부르자 몸이 끌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세이아드와 엇비슷한 인영이 보이더니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안개 속에서 언뜻 보인 머리카락의 색이 검은색이 아닌 금색이었다. 등골에 쭈뼛 소름이 돋으며 세이아드가 눈을 크게 뜨자, 상대가 뒤돌아보며 속삭였다.
“나를 불렀어?”
안개에 가려진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아스테르가 확실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며 세이아드가 황급히 손을 떼었다. 붙들고 있던 손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안개 속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아스테르로 보였던 존재마저 증발하듯 없어졌다.
‘이게 무슨….’
불쾌한 농간에 이를 악문 세이아드가 힘을 끌어올려 주변의 기척을 최대한 살폈다. 당장 근방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멀리 퍼져나간 힘이 뿔뿔이 흩어진 사람의 흔적을 잡아냈다. 그들에게도 저같은 일이 생겼는지 붙어있는 이가 없이 각자 떨어져 있었다.
이것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명이 들렸던 곳으로 향한다면 문제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세이아드는 최대한 그의 기감에 의지해 나아갔다. 끝없는 지옥을 걷는 것만 같은 숨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어디선가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득, …콰득, 뿌드득….
뼈가 짓이겨지는 듯한 기괴한 마찰음이 점점 커졌다. 세이아드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자신의 기척을 최대한 숨긴 채로 걸어간 그는 이윽고 안개 속에 웅크린 거대한 존재와 마주했다.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그것은 얼핏 보면 거인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점점 더 다가가자 안개가 살짝 옅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역하다 못해 곧장 욕지기가 올라오는 피냄새가 끼쳤다. 이 정도의 비린내는 서넛의 목숨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를 증명하듯 막 내딛은 군화 아래로 찰박이는 무언가 밟혔다.
고인 액체를 밟은 소리에 뿌드득, 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그와 동시에 웅크리고 있던 것이 느릿, 느릿,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세이아드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그것의 형상이 사라지고 채워지길 반복하는 안개 속에서 비로소 드러났다.
그걸 보자마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많은 것을 상대해 온 세이아드가 보기에도 괴이하고 역겨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목을 쭉 뺀 괴물의 머리통은 온통 산발이었고, 목 아래에 달린 몸은 둥글었다. 빼빼 마른 긴 다리가 어지간한 성인 남성만 하게 길었고, 그것의 몸통에는 팔이 두 개가 아니라 여럿 달려 있었다. 거미 다리처럼 네 개의 팔이 등에 달린 채, 커다란 손아귀마다 사람의 팔다리로 보이는 것을 쥐고 있었다.
뿌드득 거리는 소리는 저것이 사람을 먹고 있어서 나는 소리였다. 주먹처럼 툭 튀어나온 둥근 눈이 깜빡거리며 세이아드를 보았다. 뭉툭한 코 아래의 쭉 찢어진 입은 끊임없이 무언갈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피가 그때마다 뚝뚝 흘렀다. 머리카락 같은 것이 그것의 이빨에 꼈는지, 세이아드를 보던 그것이 삐쩍 마른 긴 손가락을 들어 입속의 머리카락을 쭈욱 잡아당겼다.
“…헤.”
실없이 웃는 소리가 목에서 겔겔 울렸다. 얼핏 보면 사람과 비슷한 형상이나 결코 사람일 수 없는 그것은, 정체가 정확히 무엇이든 죽여야 할 것이었다.
장검을 쥔 손을 고쳐잡은 그는 일단 핵을 찾아보기로 했다. 핵을 부술 필요 없는 존재라면 오히려 죽이기는 수월했다. 아무리 크고 강한 것이라도 세이아드가 죽이지 못할 건 없었다. 언뜻 보면 빈틈 투성이로 보이는 괴물은 세이아드의 검을 보면서도 히죽이고 있었다.
가장 확실하게 목숨을 끊는 일은 머리를 날리는 것이다. 길게 뺀 그것의 목을 단숨에 쳐 내기 위해 세이아드가 지면을 박차려는 차, 안개 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잘 찾아왔네.”
안개 자체가 분명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인지, 세이아드는 누군가 가까이 오기 전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낯익은 여자의 음성에 세이아드가 검끝을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들이댔다. 그곳에는 앞서 레베 강에서 보았던 샬로트 사클라니가 서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일반인이 이런 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세이아드는 그녀가 환영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다. 검은 내리지 않았다. 환영이든 아니든, 이곳에 있는 이상 저것과 연관되었음은 확실했다. 그러나 환영인 쪽이 옳았다. 그녀가 평소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방금 전의 말투는 샬로트가 쓸 법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약혼녀는 자신의 의지로 몸을 내주었으니, 걱정 말아. 그간 잘 있었어, 나의 별?”
세이아드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검끝이 흔들리는 것을 본 샬로트가 뚜벅뚜벅 걸어 그의 앞까지 다가왔다. 샬로트의 눈은 흰자위가 없이 온통 까맸다. 과거 티아키가 설명했던 아스테르의 모습처럼 말이다.
“…아스테르.”
그가 도대체 어떤 원리로 타인의 입을 빌어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이아드는 더는 그에게 경어를 쓸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샬로트가 깔깔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군. 어릴 땐 아무것도 모른채 귀엽게 나의 이름을 부르고 따라다녔는데 말이야.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좋아. 너의 세상에 나만 존재하던 때 말이지.”
더는 숨길 필요 없다는 듯 말을 뱉는 아스테르는 즐거워 보였다. 그는 샬로트의 몸으로 한 바퀴를 사뿐하게 돌더니 세이아드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키가 훨씬 작은 그녀의 목에 세이아드의 칼 끝이 닿았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목을 찌를 듯하여 세이아드는 황급히 검을 물렸다.
“아아, 역시 이상하다 싶었어. 지난 겨울부터 네가 부쩍 다르게 굴었지. 사람을 죽이는 것에 스스럼이 없던 네가 겁쟁이처럼 주저하고, 찢어죽여도 모자랄 그 놈을 싸고도는 게 말이야. 그래도 설마 나를 상대로 태고의 힘을 썼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확실히 납득이 간 듯 아스테르는 샬로트의 몸을 더욱 그에게 가까이 댔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이라는 듯 손을 휙 뻗은 그가 세이아드의 손을 쥐었다.
“비열하고 역겹게 남의 몸을 빌어 숨는 건가, 아스테르? 네가 그리 대단하다면 모습을 드러내어 나를 상대해야지.”
샬로트가 정말로 그녀의 의지로 이 일에 동참했든 아니든 당장 죽일 순 없었다. 이곳은 지금 스텔라의 관할이었고, 그곳에서 샬로트가 죽게 된다면 스텔라의 처지가 곤란해졌다.
“아쉽게도 육신의 주인은 지금 무척 바빠서 말이야. 내가 보고 싶은건가, 이드? 보채지 않아도 조만간이야. 곧 세상에는 너와 나만 남게 될 테니. 태초처럼, 너른 밤하늘에는 너와 나만이 존재할 거다.”
아스테르는 마치 몸과 자신이 다른 존재인것처럼 말했다. 거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아스테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나 티아키의 증언을 생각한다면 그의 의지로 악마와 손을 잡은 것은 확실했다.
세이아드는 아스테르에 대해 더 궁금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자꾸만 아스테르를 떠올릴 것이고, 그로 인한 고독과 분노를 마음에 품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밤하늘이니, 별이니 하는 것들은 나와 관계가 없다. 대체 뭘 원해서 이러는 거지?”
“말했잖아, 이드. 나는 나의 작은 별을 원해.”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헛소리를 늘어놓는 그에게 역정을 내자 아스테르가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를 먹고 있는 괴물의 옆으로 걸어갔다. 무슨 짓을 하려나 싶어 거리를 벌린 채 샬로트를 따라가자, 거기엔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열 명도 넘는 이들이었다. 사냥꾼같지 않은 평범한 복장을 한 영지민처럼 보였다.
“이름을 바꾸고 외형이 달라진다 한들 네가 나의 작은 별이었던 것은 변하지 않아. 너의 영혼은 어둠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지. 빨리 나의 곁으로 오는 게 좋을 거야. 어차피 그렇게 되겠지만.”
아스테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워있던 사람들이 눈을 떴다. 하나같이 멍해보이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에게 아스테르가 다가갔다. 샬로트의 하얀 손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단검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걸 서있는 사람에게 건넸다.
불안한 예감이 들어 세이아드가 그녀의 몸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내내 그들에게 관심을 끄고 있던 괴물이, 샬로트의 몸과 세이아드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갑자기 공격스럽게 변한 거인은 비쩍 마른 손을 휘둘러 세이아드를 내리쳤다. 공격을 피하며 곧장 검으로 괴물의 팔을 베는 사이, 그 너머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샬로트의 하얀 얼굴이 세이아드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잘 보라는 듯 그렇게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앞에 일렬로 서 있던 사람들이 차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을 쥔 남자가 기계적으로 팔을 들더니 자신의 목을 찔렀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그는 목젖을 깊게 베고는, 이내 피를 흩뿌리며 서서히 몸을 허물어트렸다.
“아스테르!”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세이아드가 비명을 지르자, 샬로트의 목소리를 빈 아스테르가 꺄르륵 웃었다.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행복한 듯이 외쳤다.
“네 영혼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세상에 너와 나만 남을 때까지 모든 이를 죽일 거야. 나의 옆에 와서 스스로 고독해지든가, 아니면 내가 만든 고독에 질식한 너를 내가 거둬가 주지. 기억해, 이드. 이 사람들은 다 너 때문에 죽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