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타인과 온전한 밤을 함께 보낸 게 몇 년 만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랬던 적은 죽기 전, 세이아드를 경멸 없이 대하던 사람은 아스테르 하나뿐이던 시절이었다. 밤하늘의 흐린 구름이 달조차 가려 버린 어두운 밤, 홀로 있다간 끝없는 어둠에 잠길 것만 같다고 느낄 때에만 세이아드는 밤을 같이 보낼 사람을 찾았다.
자주 그러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죽이거나 아스테르의 명을 따라 움직였으므로 한가히 하룻밤 상대를 찾을 시간이 많이 없었다. 항시 능력을 썼으니 부작용은 망령처럼 세이아드를 따라다녔으며 그런 연유로 아스테르의 정화가 늘 필요하던 시기였다.
아스테르는 찬란한 태양처럼 세이아드를 밤 속에서 꺼내줄 듯 굴면서도 그러질 않았다. 몰아치는 통증과 지독한 한기를 피해 아스테르에게 매달리고 나면, 그는 웃으며 세이아드를 안아 주고 입을 맞춰 주면서도 그 이상의 온기는 베풀어 주지 않았다. 설령 자신의 몸은 내어줄지언정, 같은 침대에서 잠들거나 옆에서 그를 위안한 적은 없었다.
세이아드가 해야 할 일은 밤을 지새워 아스테르를 지키거나 정화가 끝나자마자 바깥으로 나오는 거였다. 간혹 정화마저도 제대로 해 주지 않고 자신을 벌하던 적도 있었으니, 그 당시엔 저것이 자비라 느꼈다. 아무도 곁에 오고 싶지 않아 하는 괴물을 옆에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아스테르가 구원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여기면서도 어둠에 잠긴 복도에 혼자 있을 때면, 세이아드는 가슴 안쪽이 텅 비어 버린 감각을 조우했다. 그러면 정화로 인해 성욕이 일었음을 핑계 삼아 그는 종종 밤을 같이 지낼 여자를 찾았다. 스스로 그런 이유를 만드는 쪽이 편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이 꼭 외로워서 누군갈 원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여자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외양만으로는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간혹 있었고, 그렇게 지나가는 이를 숙소에 불렀다. 살이 비벼지고 땀이 뭉근히 녹아 맞닿은 부위에 고이는 감각은 분명 자극적이었지만, 그 모든 불꽃이 소진되고 나면 세이아드는 다시금 추운 곳에 혼자 남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여자를 품에 안고 잠이 들어도 눈을 뜨는 순간이면 그는 비어 버렸다.
그런데 오늘은, 일어난 찰나부터 마음 안쪽이 꽉 찬 기분이었다. 열려있는 창가로 솔솔 불어온 아침 바람의 감촉에 잠에서 깰 때부터 그랬다. 은은히 끼치는 소나무 향을 맡고 있으려니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눈꺼풀을 밀어올리자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잘 잤나요, 나의 달?”
다정하게 속삭이는 물음을 건네는 레사스는 햇빛이 만든 환영 같았다. 하염없이 사랑스러운 걸 보는 듯한 눈동자는 예쁘게 휘어 있었고, 이마 위로 내려온 세이아드의 진회색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 손은 따스했다. 볏짚을 채워 만든 침상은 빈말로라도 편하다고 할 수 없었는데, 누워 있는 장소가 아늑한 목화솜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 일어나 계셨습니까?”
요람에서 일어나던 어릴 적에나 느낄 법한 안온함은 잠시, 이내 가슴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에 문제가 생겼는지 정신이 조금 들자마자 미친 듯이 뛰었다. 입술이 닿을 코앞에 레사스가 있다는 게 낯설 만큼 떨렸다. 밤새 입을 맞추다가 누웠던 건 새까맣게 잊은 양.
“조금 전에요. 이드가 아주 예쁘게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레사스는 잠들었던 사람치곤 지나치게 멀끔했다. 머리칼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고 눈동자는 내내 깨어 있던 이같이 맑았다. 멍하니 그를 살피던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자신을 안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기 전에는 등을 돌린 채 누웠던 것 같았는데,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간밤에는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의 재회에 레사스의 입술을 간절히 탐하다가, 그의 상처가 아직은 아무는 중이라는 걸 떠올리곤 세이아드가 간신히 하던 걸 멈췄다. 조바심이 일어 레사스의 어깨를 쥐었다가 상처를 본 덕에 이성을 차렸다. 부상자를 상대로 생각 없는 짓을 했다.
레사스는 개의치 않아 했지만 세이아드는 그를 그리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결국 늦은 밤, 잠들지 않은 여관 주인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 이르곤 레사스가 상처를 닦는 걸 기다렸다. 그러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저답지 않게 말이다.
“더 자도 괜찮아요, 이드. 베트리아 영지까지는 하루하고도 반나절만 더 가면 되니까요.”
레사스의 권유와 달리, 목베개를 해 준 팔뚝이 살짝 움직이는 걸 느끼자마자 세이아드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남의 팔을 베고 눕는 게 굉장히 어색했다. 낯부끄럽기까지 했다.
“기사들은 이미 일어난 것 같으니 준비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럼 목욕물을 준비할게요.”
레사스는 아랫것이 할 일을 자청했다. 세이아드는 그보다는 레사스부터 씻는 게 낫겠다고 권하려 했지만, 이제 보니 그는 이미 나갈 채비를 끝낸 차림이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전하께서는 먼저 나가셔도 됩니다.”
“내가 있는 게 불편한가요?”
레사스가 싫지 않다는 걸 어제 나름대로 알려 준 것 같은데, 그는 금세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처량한 사슴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단지….”
방이 원체 작은 터라, 목욕물을 받은 통이 오면 그에게 맨몸을 보여야 한다는 게 의식되었을 뿐이다. 그전까지는 레사스가 제 나신을 보아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갑자기 왜 부끄럽게 느껴지는지 자신도 의아했다.
“아무래도 혼자 씻는 쪽이 편해서 그렇습니다.”
그 말에 레사스도 눈을 깜빡거렸다. 뭘 상상했는지 몰라도 그는 이내 목덜미를 홧홧하게 붉히더니,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보라색 시선이 세이아드의 몸에 짧게 닿았다가 황급히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대공의 말이 맞네요.”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레사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가는 너른 등을 보던 세이아드는 그의 귓불이 빨간 것을 발견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박동하던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낮게 목을 가다듬은 세이아드는 손을 들어 갈비뼈 가운데를 괜히 꾹, 눌러 보았다. 그러나 심장의 고동은 잦아들지 않았다. 여관을 나서고 동부로 향하는 내내 말이다.
보다 북쪽과 가까이 붙어 있는 베트리아 공작령은 영지의 규모 자체로 따지자면 공작령 중 세 번째였으나, 동부 자체의 규모는 북부 다음으로 컸다. 북부의 기후가 섞인 동부는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여서 존재했으며 야생동물의 종류가 다양했다. 베트리아 령은 실질적으로는 악시드 령과 붙어 있었는데, 그들이 지켜야 할 숲을 이루는 거대한 산맥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였다.
남부와 서부의 숲은 저 높은 성에서 먼 곳을 내다보면 숲의 바깥이 보이기라도 하지만, 프로시어스와 베트리아가 지키는 영지는 거대한 산과 숲만이 전부였다. 그들의 관계가 대대로 가까웠던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니르아가 살지 않는 내륙의 작은 숲들을 지나치자 레베 강을 낀 평원이 펼쳐졌다. 어릴 적 이후론 동부에 왔던 적이 없어서 동부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임을 잊고 있었다. 연록색 융단이 깔린 것처럼 탁 트인 평지를 하루 정도 지나면 비로소 숲이 우거진 베트리아의 성이 나온다.
곳곳에 들꽃이 만개했다. 루나는 풀이 가득한 곳이 신이 나는지 쉬기 위해 멈추자마자 풀을 뜯기 시작했다. 물을 보급하기 위해 일행은 말을 모아 두곤 강가로 향했다. 투명한 물이 흐르는 것을 보자 갈증이 일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레사스와 했던 대화 때문인지 목이 타던 차였다.
‘전하께서 약혼하신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만나자마자 묻고 싶었던 것을 세이아드는 여정이 시작하자마자 물었다. 질문을 듣자마자 크게 당황한 레사스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원하시긴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대공을 좋아하는걸요. 대공이 아닌 이에게는 관심조차 나눌 여유가 없어요.’
세이아드를 잠시 괴롭혔던 충격은 그 말을 듣자마자 가셨다. 안도감이 일며 기분이 신기할 정도로 상기되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티를 내긴 그러하여 입을 다물어 버리자, 레사스는 몇 시간에 걸쳐 세이아드의 옆에서 종달새처럼 지저귀며 그를 안심시킬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대화를 하다 와서 그런지 몰라도 목이 탔다. 세이아드는 천천히 몸을 숙여 강가에 걸터앉고는, 흐르는 강물을 물통에 담았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모습이라 그는 물을 다 받은 뒤 몸을 숙여 강물을 받아 마셨다. 시원한 물이 입술을 적시며 갈증을 채웠다.
적셔진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곤 고개를 들던 그는, 건너편에 한아름 피어 있는 보라색 꽃들을 발견했다. 바람을 타고 향이 전해지는 듯한 향긋한 허브는 여름이면 동부에 피곤 하는 라벤더였다. 원체 많은 양의 라벤더가 피는 것으로 유명해 동부의 주된 특산품이기도 했다.
레사스의 눈 색을 빼닮은 부드러운 보라색이 마음을 단숨에 뺏었다. 세이아드는 홀린 듯 그대로 강가를 건너기 시작했다. 폭은 넓었지만, 강의 중류인 덕에 수심이 얕고 급류가 없어 금세 건널 거리였던 탓이다.
금세 강을 건넌 그는 라벤더 밭으로 서슴없이 향했다. 근처에 가자마자 기분 좋은 향이 감돌았다. 꽃을 꺾기 위해 밭으로 들어서려던 그는, 불현듯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라벤더 사이에 서 있는 젊은 여자가 보였다. 여자의 옆에는 시녀로 보이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이런 숲속에 시녀를 대동해 올 이라면 귀족일 텐데, 이 근방에 있을 귀족은….
사클라니 후작가.
세이아드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자마자 그 이름을 떠올렸다. 여자는 아스테르의 약혼자인 샬로트 사클라니였다.
동부를 반으로 나누어 북부와 가까운 곳을 베트리아가 다스렸다면, 남쪽과 가까운 동부를 지닌 것은 사클라니 후작이었다. 거대한 평원을 이용한 목업을 통해 부를 일군 후작은 방금 세이아드가 건넌 레베 강을 기점으로 그 반대편을 소유하고 있었다.
후작가와 이곳은 거리가 제법 있는 편인데, 어째서 그녀가 여기 있는지를 가늠하는 찰나였다. 세이아드를 빤히 보던 샬로트가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고 고운 얼굴이 삽시간에 굳더니 입술이 비틀렸다. 눈살을 확 찌푸린 그녀가 몸을 휙 돌렸다. 시녀들에게 신경질적으로 손짓한 그녀는 한자리에 있는 것도 싫은 듯 빠르게 라벤더 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같은 경멸은 간만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피하지 않게 된 건 기실 세월로 따지면 아주 일부에 불과했는데, 막상 이 같은 모습을 간만에 보자 이상한 마음이 일었다. 기분이 딱히 좋진 않았으나 당연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샬로트인 점에서 더욱 그랬다. 샬로트는 항시 아스테르의 관심을 가져가는 세이아드를 끔찍이 싫어하곤 했으니 말이다.
약혼자의 입장에서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이 타인과 입을 맞추고 살을 섞는다고 생각하면 그녀의 경멸은 사실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이드와 티테르를 정인으로 둔 이가 모두 겪는 일이기도 했다.
라벤더를 꺾으려던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멈춰 있는데, 건너편에서 그를 부르는 키릴의 소리가 울렸다.
“각하, 베트리아 공작께서 친히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고개를 돌렸다. 키릴의 말대로 그의 뒤에는 베트리아 가문의 문장을 달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현실로 돌아온 세이아드는 라벤더 줄기에 닿아 있던 손을 떼고는, 아름다운 꽃들을 등졌다. 아쉬움이 일었으나 한가로이 꽃을 꺾으며 세상을 누릴 때가 아니라는 자각이 뒤늦게 일었다.
강가로 간 세이아드는 결국 얻은 것 없이 물을 밟았다. 앞서 건널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강물이 가죽 장화를 적시는 순간 소름 돋을 정도로 시린 감각이 올라왔다. 꿈에서 깬 것처럼 속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