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언제나 아름다운 말을 들려주는 입술을 세이아드는 빤히 응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레사스와 지금같이 깊은 숲속에서 이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을 되새기면서.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처음 자신의 의도와는 많은 게 달라졌다. 그는 레사스를 이렇게까지 자신의 삶에 가까이 다가오게끔 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레사스가 더욱 중요해질수록….
그 전의 삶에서 있었던 갈등에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단지 자신이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운 사람이라 여기며 죽음을 마땅히 받아들이던 시기엔 마음이 편했다. 레사스는 죽여야만 하는 사람을 죽였을 뿐이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할 때는 어떠한 원망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레사스가 자꾸만 사랑을 속삭이고, 그 깊이의 밀도를 체감할 때면 왜 이제 와서 이렇게 구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을 만지는 레사스의 손길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애타고 뜨거워, 무의식은 자꾸만 그를 찾았다. 그러나 점점 그의 존재에 익숙해질수록 세이아드는 그를 끌어안으면서도 밀어내고 싶은 상충되는 감정과 조우했다.
지금이 특히 그랬다.
자신은 짐작조차 할 수 없던 것을 알고 있는 레사스를 보면서, 세이아드는 지난 삶의 레사스 또한 지금과 다르지 않았음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도 아스테르가 사이한 힘을 가진 걸 알고 있었다면, 그의 정화가 문제된다는 걸 알았다면, 그가 무언가를 꾸미는 걸 알고 있었다면….
설령 나를 죽였어야 하더라도, 너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전하가 말씀하시는 사랑이 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지금 레사스의 감정이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취급하는 쪽이 나았다. 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할수록, 세이아드는 오히려 그의 사랑이 상황에 따라 변하는 얄팍한 감정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이아드는 그런 얕은 감정에 휘둘릴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자꾸만 드러나는 진실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번잡했다.
“전하께서는 제가 전처럼 왕세자 전하의 곁에서, 전하를 밀어내며 인간답지 않게 굴었더라도 그리 말하시겠습니까? 불과 반년 전의 일입니다. 제게 기대하지 않기 위해 모질게 구셨다 하지만, 전하께서 저를 껄끄럽게 느꼈던 것이 사라지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런 저를 사랑하신다는 겁니까?”
거기까지만 해도 되었을 텐데, 입술 아래로 다친 마음이 새어 나왔다.
“아마 그대로 지냈더라면 전하께서는 저를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이라고 말하셨을 겁니다.”
불편하게 올라오는 새카만 아픔이 세이아드 자신도 싫었다. 그냥 삼키고 없는 척 구는 게 저다운 일이었을 텐데, 하필 다른 누구도 아닌 레사스가 그리 말했다는 것이….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쓸데없이 감정 놀이를 했어.
자신을 드러낸 것에 후회가 밀려들어 세이아드는 고개를 틀었다. 근방의 니르아를 없앴던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다시금 빈자리를 메꾸려는 것들이 보였다. 한담이나 나눌 시간이 아니라는 걸 되새기며 세이아드는 일단은 레사스와 협력하기로 했다. 대체 어떻게 이것을 예측했는지는 몰라도, 하루가 꼬박 걸릴 싸움이라면 쉴 시간이 없었다.
“아니에요, 대공.”
그때 레사스가 작게 말했다. 그는 크게 다친 사람처럼 고통으로 쥐어짜인 숨소리를 흘렸다. 듣는 저까지 괴로워 눈을 찡그리고 그를 살폈다. 하얀 제복에는 어떠한 상처의 흔적도 없었다.
“내가 대공께 그런 말을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레사스의 시선이 일순 세이아드의 가슴팍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가 손으로 잠시 입술을 매만졌다. 푸른 핏줄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손등이 보였다. 검으로 그를 찌르던 그 순간 보았던 손등도, 저러했다.
그러고 보면 레사스는 항상 감정적으로 동요할 때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대는 나의 달이에요. 언제나 항상 나와 있어 주던 달에게 투정과 서운함을 보일 순 있어도, 결코 그대를 미워할 순 없을 거예요. 내 삶의 모든 순간은 오직 당신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어요.”
레사스는 그리 말하며 물기로 젖은 눈을 휘어 웃었다. 입매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는 표정을 몇 번 짓던 얼굴이 곧 잔잔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핏줄이 선 손등만이 그의 동요를 희미하게 나타냈을 뿐이다.
이상한 기분이 밀려왔다. 머리는 레사스를 원망하는데, 마음은 그의 말이 진실일 거라고 속삭였다. 목이 말라붙는 감각에 세이아드는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막 그들의 옆에 도착한 바인과 리그다에게로 눈길을 고정했다. 레사스를 외면한 채 세이아드가 명했다.
“너희는 이제부터 나를 도와 니르아를 잡는다. 수는 많지만 고작해야 중급 니르아가 끝이니, 너희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나의 뒤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전하를 지키면서 무리하지 않는 선으로만 하거라.”
“네, 대공.”
몸을 틀어 레사스를 보지 않고 그에게도 말을 꺼냈다.
“정화가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용건을 끝낸 세이아드가 등을 보였다. 레사스의 시선이 등에 닿는 걸 느꼈지만, 뒤돌아봤을 때의 그가 슬퍼한다면 마음이 약해질 걸 알아 세이아드는 묵묵히 검을 들었다.
레사스의 말처럼 싸움은 길었다. 니르아는 죽여도 끊임없이 나왔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남쪽 숲에 자리한 모든 니르아가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를 보고 방향을 짐작할 수 없어, 그들은 하늘에 뜬 태양의 위치로 전진하는 방향을 정했다.
“…잠시 쉬어 가지.”
세이아드는 그의 뒤를 따라오는 바인과 리그다의 숨소리가 아까보다 확연히 지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반나절을 꼬박 전투에 임하면 지치길 마련인데, 그것도 영혼의 공포를 건드리는 니르아를 상대로 한다면 더욱 지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아직도 적이 이렇게 많은데, 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저희가 하나라도 더 죽여야 누군가가 안전해집니다.”
바인은 평소의 촐싹거리는 모습과 달리 니르아와 싸우는 내내 진지하고 심각했다. 그의 말을 들은 세이아드는 넓게 흩어진 다른 티테르들이 어찌하고 있을지를 가늠했다. 세실리아가 특히 걱정이었다. 하급 니르아들인지라 티테르가 죽을 일이 없음을 알아 기꺼이 흩어지긴 했으나, 공포와 대면하는 경험이 가장 적은 세실리아는 버거워할지도 몰랐다.
아직도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서로 흩어진 간격이 상당한 것 같은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효율적으로 싸우는 편이 낫다. 아까와 달리 공격에 허점이 많아진 걸 너도 느꼈을 텐데.”
세이아드의 지적에 바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그가 머리칼을 마구 헤집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묵묵히 그의 옆을 지키던 리그다도 대검을 땅에 박고는, 그것에 기대어 잠시 쉴 준비를 했다.
“두 분은 왜 지치지도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공께서야 그렇다 치지만, 전하께서도 어지간한 괴물이시네요. 가이드가 되시고서는 지친 적을 보질 못한 것 같습니다.”
바인의 딴에는 칭찬으로 한 말이겠지만, 세이아드는 괴물이란 표현에 잠시 레사스를 살폈다. 어린 레사스는 그의 어머니인 왕후로부터 ‘검은 머리의 괴물’이라 자주 불리곤 했다. 세이아드가 관심을 주게 된 이후론 그렇게 구는 일이 줄었다곤 들었지만, 레아나 왕후는 자신의 자식을 괴물처럼 끔찍이 여겼다.
그리 생각하면 왕후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을 만도 하나.
세이아드는 과거 레사스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해되는 것들이 있는데, 레사스의 발언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시선이 마주쳤다. 레사스는 바인의 말처럼 크게 지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각성 전 숲에서 고전하던 때는 상당히 벅차 보였는데 말이다.
레사스가 빙긋 웃었다. 앞서 오갔던 말은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말간 웃음이었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 세이아드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잠을 자는 건 무리지만 적어도 마실 물 정도는 보충해야 했다.
“잠시 자리에들 있거라.”
“예? 이제 다 쉬었는걸요. 다시 싸우겠습니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이러다가 니르아가 마을에라도 내려가면 큰일입니다.”
바인은 지나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토벌에 내내 참가할 정도로 적극적이기도 했고. 보통 개인적인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니르아에게 이렇게 구는 사람이 드물기에, 세이아드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토벌 직전 바인이 한 말을 떠올렸다.
“여기가 고향이라고 했던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모두가 듣게끔 크게 말하던 걸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네, 남부는 제 고향입니다. 리그다와 저는 둘다 타칸 출신이거든요. 그래서 마을이 위험에 처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타칸까지는 거리가 상당하다. 아무리 니르아가 숲 밖을 빠져나가도 그 정도 거리까진 가지 않아.”
세이아드가 겪어 온 바에 의하면, 일어나지 않은 현재의 미래까지 포함하더라도 니르아가 말로 반나절 거리까지 나간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광경은 죽고 난 뒤의 꿈에서나 보았을 뿐이다.
“아닙니다. 실제로 그랬던 적이 있어요. 아, 대공께서는 그때 아직 태어나지 않으셨던가요?”
“…그것이 언제지?”
“저희가 태어나던 해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스물여덟 해 전이겠네요. 대공께서 올해 스물다섯이 되신 걸로 알고 있으니….”
스물다섯이라 들으니 지나치게 어려 보여 세이아드는 눈을 찡그렸다. 마음속의 자신은 이미 서른이 되었으나, 육체의 나이는 아직 그런 모양이었다. 내심 저보다 어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세 살이 더 많다니. 그렇다면 아스테르와 동갑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세이아드의 뇌리로 무언가 떠올랐다. 그것은 아스테르가 악마와 연관이 있을 거라곤 짐작조차 못하던 당시엔 별다른 일이 아니었으나, 지금 이 순간에는 상당히 유의미한 것이었다.
“그 당시 타칸에는 전 왕후 폐하께서 있지 않았던가? 그분의 저택에 왕실 기사단이 있었을 텐데, 마을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기사들은?”
“아, 그랬지요. 저야 갓난아기 때니 아는 게 없지만 듣기로는 기사들도 겨를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저택에 큰일이 났어서요.”
“어떤 일이지?”
“뭔가 그냥 큰일이었다고 들었는데…, 리그다, 뭐 기억나?”
“어른들이 쉬쉬하고 숨겨서 들은 기억이 없어. 돌아가신 왕후 폐하의 일은 다들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잖아.”
아스테르가 태어나자마자 목숨을 잃은 전 왕후의 일은, 국왕과 왕세자 모두의 치부와도 같아 사람들 모두 함부로 그녀를 언급할 수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남부에서, 그것도 니르아가 그같이 범람한 시기와 아스테르가 겹쳐지자 점점 확신이 섰다. 그것을 확인시켜 준 것은 레사스였다.
“그날 밤에, 전대 왕후께서 형님을 낳다 숨을 거두셨지요. 그래서입니다. 듣기로는 저택이 아수라장이었다고 하더군요.”
레사스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는 덤덤히 시선들을 받아 흘리고는 어느새 밤이 되어 높이 뜬 달을 올려다보았다. 흰 달빛이 그의 얼굴 위로 내리쬐었다.
“비극이지만, 아마 왕후께서는 죽어서나마 시름을 더셨을 겁니다. 악마에게 빌어서라도 낳고 싶어 하던 왕국의 후계자를 끝내 세상에 나오게 하셨으니까요. 오랜 시간 동안 생기지 않던 씨앗 때문에 국왕 폐하께 매일같이 질타받던 분이시니, 한이 깊으셨을 겁니다.”
그리 말하는 레사스의 얼굴 위로 씁쓸함이 퍼졌다.
“가이드의 힘은 권력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달을 사랑하는 태양의 약속임을 모두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왕실이 그렇게 바뀐 지 오래되었으니 누군가는 세상의 끝을 바랄 수도 있겠죠.”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눈치챌 수 있었다. 레사스는 넌지시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제약에 의해 직접 말하지는 못해도, 세이아드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게끔.
자신이 어느 정도로 짐작하는 순간을 기다려 왔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