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어찌나 분노했는지 시온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긴 시간 존경받은 전대 공작을 끌고 나오는 발언에 실드라스의 기사들도 크게 동요했다. 왕세자의 말인지라 드러내어 적개심을 나타내진 못했으나, 그들의 눈에 분노가 어리는 게 보였다.
“어제의 제 지휘가 완벽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전하. 그러나 저는 마땅히 주장해야 할 실드라스의 권리를 요구했을 뿐이고, 더군다나 처음으로 티테르들을 지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부상자는 나왔으나 사상자는 없이 마무리된 결과를 빌미로 제 가문과 아버지를 모욕하시는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닙니까?”
시온의 반박에 아스테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미소를 유지하며 반박을 받아쳤다.
“내가 공작처럼 사감으로 공사를 구분하는 이로 보이나? 어제의 그대와 달리 나는 왕세자로서 나의 위치와 의무를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 내가 한 말은 모두 솔리아스의 안위와 백성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사실이야. 공작의 부친은 프로시어스 가문의 권력을 탐하여 그릇된 짓을 했다.”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는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러셨을 리가 없습니다. 왕후 폐하께서도 직접 그 장면을 목격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하의 말씀은 왕후 폐하까지 모욕하는 일임을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시온은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잘 지적해 냈다. 하지만 아스테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것은 왕실의 일이니 티테르인 그대가 간섭할 바가 아니다.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전대 실드라스 공작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겠나? 공작은 사욕을 위해 악마를 깨웠고, 내가 오늘 이 숲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에 대한 증거다.”
“증거는 전하께서 먼저 보여 주셔야겠습니다. 제 아버지를 고작 그런 말로 모함하시는 겁니까!”
“내게는 증인이 있다, 실드라스 공작. 그대의 기사들도 잘 알고 있는, 실드라스 공작가의 전대 기사단장인 체르탄 경과 그의 부관인 나오스일세.”
시온을 둘러싸고 있던 실드라스의 기사단이 순간 그 말에 웅성거렸다.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니 기사단장을 기억하는 기사들이 상당수였기에 동요하는 모양이었다. 기사 중 누군가 외쳤다.
“전하, 체르탄 단장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전대 악시드 대공의 폭주로 인해서 말입니다.”
“아니, 그는 살아남았다. 너희의 주군인 시르칸 실드라스 공작이 증인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했지. 체르탄 경의 강인한 생명력과 의지를 얕잡아 보고 실수를 저지른 탓이다.”
아스테르는 그 말과 함께 막사 쪽을 뒤돌아보더니, 망자의 이름을 불렀다.
“체르탄 경, 이제 모습을 드러내도 된다.”
자신 있게 전대 단장을 부르는 말에, 실드라스의 기사들이 일제히 막사 쪽을 보았다. 시온 또한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부릅뜬 눈으로 막사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생기가 돌던 얼굴이 시체처럼 희게 질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세이아드 또한 도저히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막사 쪽을 보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아스테르가 세실리아를 끌고 오며 증인을 찾아냈다는 말을 할 때에도, 세이아드는 막연히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전생에도 그러했듯 허울뿐인 증거를 내세우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흉터투성이의 중년이 막사 안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하고, 그런 그를 본 기사들이 경악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이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임이 와 닿았다.
이렇게나 쉽게 어머니의 결백이 밝혀진다고?
아스테르의 옆에서 평생을 바치며 피를 묻히던 당시에는 그렇게나 까마득하게 여겨졌던 것이, 이다지도 쉬운 일이었던가?
과거 숨 쉬는 내내 꿈꿔 오던 이 찰나가 세이아드에게는 이상하게 그리 기쁘지 않았다. 오로지 이것만을 바라며 살아 왔던 삶이었는데 말이다. 통쾌함 대신 그에게는 불편한 이질감만이 남았다.
“단장님…? 정말 살아계셨던 겁니까!”
실드라스의 현 기사단장인 헤제가 가장 먼저 반응하며 그에게로 뛰어갔다. 그의 부름을 따라 나머지 기사들도 체르탄에게 달려갔다. 세이아드 또한 어릴 적 그를 본 적 있었다. 실드라스를 방문했던 당시 단장이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우직하고 실력 좋은 이라고 어머니께서 평하셨던 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그를 기억하는지 체르탄에게 달려갔고, 시온만이 몇몇 기사들과 남겨져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체르탄은 그에게 달려온 기사들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그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잘 살아 있었군. 방금 들은 왕세자 전하의 말은 사실이다. 나는 그날, 한낮에 광장을 습격한 거대한 니르아를 목격했네. 전대 악시드 대공께서는 그것을 보고 모두를 대피시키고자 하며 싸우셨지만….”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체르탄의 꼴은 엉망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간신히 쥐어짜내야 나올 것처럼 가냘팠고, 팔 하나는 날아가 없어진 채였다. 그가 원망어린 눈으로 시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와 반대로, 나의 주군께서는 평생 충성을 바친 당신의 기사들을 죽게 내버려 두었다. 니르아는 마치 주군의 말을 듣는 것처럼 기사들을 죽이고 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더군. 믿기지 않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군은 죽은 기사들을 하나씩 확인하더니, 숨이 붙어 있는 이들의 생을 직접 앗아 가셨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곳곳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아스테르의 기사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경멸어린 눈으로 시온을 보았으며, 실드라스의 기사들조차 혼란스러워하며 시온을 곁눈질했다.
체르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텔라와 노바로부터도 작은 경악성이 흘렀다. 특히 노바는 입을 틀어막은 채로 시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대 악시드 대공께서는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다. 그분은 니르아로부터 왕후 폐하와 우리들을 지키려 하셨지만, 결국….”
체르탄은 그리 말하더니 침통한 울음을 삼켰다. 아스테르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앞서 나왔다.
“실드라스 공작. 그대가 주장한 실드라스의 권리인 지휘권은, 공작의 부친이 비열하고 추악한 방식으로 얻어 낸 것임을 이제 알겠나? 애당초 그대에게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었어. 그것은 처음부터 나의 티테르의 것이었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부모를 잃고, 그 악명까지 홀로 감당해야 했던 악시드 대공의 것이란 말이다.”
아스테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체르탄이 세이아드의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대 대공께서는 최선을 다해 저희를 지켜주시려 하였으나, 악마의 술수가 그것을 막았습니다. 이제야 겨우 나타난 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체르탄의 서러운 외침에 실드라스의 기사단이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면서도, 자신들의 단장이 하는 행동에 영향을 받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를 따라 아스테르의 기사단장인 아데나가 말했다.
“이제 보니 대공을 모함하던 악마라는 칭호는, 바로 전대 실드라스 공작을 뜻하는 말이었군요.”
좌중은 아스테르의 말에 쉽게 선동되었다. 권력을 쥔 왕세자의 힘이란 그러했다. 삽시간에 편이 나뉘며 시온은 고립되었다. 한순간에 흉흉해진 분위기가 시온을 찔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세이아드는 문득 숨통이 조여드는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 이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이건 저 자신 또한 겪었던 일이었다. 방식이 조금 다를 뿐 다른 이들로부터 유리되어 홀로 남는 장면이 너무나 익숙했다. 그게 세이아드를 불편하게 했다.
체르탄의 등장에 우뚝 서서 멈춰 있던 시온은, 그를 향한 공격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그만! 그만들 하거라! 너희가 모셔야 할 사람은 전대 단장이 아닌 나라는 걸 잊었나? 어디에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고작 말뿐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시온의 동요에 따라 그의 파장이 불안정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 금빛이 감돌기 시작하고, 대기가 부쩍 하얗게 물들었다.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던 브레드히트가 그런 시온을 제지했다.
“시온, 그만하게.”
“브레드히트 공작, 설마 저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공작께서는 그때의 일을 같이 처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친우로서 이 같은 모함을 가만히 두고만 보시는 겁니까?”
시온은 간절히 자신의 편을 찾듯 브레드히트에게 호소했다. 어린 청년을 지켜보는 브레드히트의 얼굴 위로는 안쓰러움과 죄책감이 섞여 있었다. 세이아드는 비로소 그가 왜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를 이해했다. 어머니의 일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브레드히트는 시온의 말에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침통한 표정을 지은 그는 시온을 잠시 보다가, 이내 세이아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브레드히트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곤 입을 열었다.
“나 또한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아. 허나 나의 양심이… 도저히 침묵할 수 없게끔 하더군. 전하께서 이 같은 사실을 말하자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이 하나 있었네, 시온. 그대의 부친은 생전에 숲과 악마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곤 했어. 숲에 있는 붉은 핵들이 사실은 악마의 힘을 나눠서 봉인한 것이라는 걸 알아낸 것도, 그대의 아버지였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시온은 악을 쓰며 브레드히트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이성을 잃고 위협적으로 구는 그를 노바가 제지했다.
“멈춰, 시온! 무슨 짓을 하려는거야?”
노바의 흉흉한 외침을 따라 바람이 불었다. 양갈래 머리끝이 바람에 의해 일렁였고, 시온은 상처받은 눈으로 노바를 보았다.
“노바, 나는…, 나는 뭘 하려던 게 아니었어. 설마 너까지 저 말을 믿는 건 아니지?”
시온의 호소에 노바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이미 의심이 깃들었는지 반문했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이상했어. 너도, 그리고 전대 공작께서도, 항상 악시드 대공의 가문을 삿되다고 칭하곤 했잖아. 이제 보니 그건 다 일부러 그랬던 거야?”
“그렇지 않아! 애당초 아버지께서 그럴 리가 없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나, 브레드히트 공작만큼은 날 믿어야 하는 거 아니야? 대체 아버지가 뭘 위해서 그런 짓을 하시겠어?”
어떻게든 아버지의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시온은 점점 여유를 잃었다. 어려서부터 그와 붙어 다니던 노바의 질타가 굉장한 충격을 주었는지, 그는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선 사방을 살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이 장소에서 하나의 아군이라도 찾고자.
그러다 그의 시선이 레사스에게 멈췄다. 아스테르가 말을 꺼낼 때부터 굳어 있던 레사스를 발견한 시온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며 매달렸다.
“레사스, 뭐라고 말 좀 해 봐. 지금 왕세자 전하께서 네 어머니를 모함하는 걸 가만히 내버려둘 거야?”
그러자 언제나 레사스를 편히 대하곤 했던 시온의 태도를 아스테르가 지적했다.
“사람들의 앞에서 왕자를 그리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건가, 실드라스 공작? 내 아우는 그대가 막 대해도 될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결코 레사스의 편을 들 리 없는 아스테르가 이때만큼은 그를 대변했다. 참담한 낯빛으로 시온을 내려다보던 레사스가 고개를 틀어 세이아드와 눈을 마주쳤다. 세이아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상태로 레사스를 주시했다.
모순되는 마음 두 개가 공존했다. 레사스가 내내 해왔던 말처럼 저를 위해 기꺼이 시온을 저버리길 원하면서도, 레사스까지 시온을 벼랑으로 내모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레사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세이아드를 비롯한 모두가 레사스를 보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두고 보겠다는 듯이 입술을 꾹 닫고 그를 노려보았고, 다른 티테르들도 레사스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레사스가 입술을 뗐다. 그는 작은 침묵을 입술 아래로 내뱉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을 붙든 시온의 손을 떼어냈다. 시온이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너를 위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시온. 진실은 원치 않는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너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전대 대공의 일 또한 나의 어머니와 네 부친의 증언만으로 결론지어진 일이었던 걸 기억하겠지.”
레사스는 괴로워 보였다. 그러나 말을 멈추진 않았다.
“너의 부친께서 악마를 깨웠다는 점은, 분명 신빙성 있는 진술이다.”
그리 말한 레사스의 시선이 아스테르에게서 향했다. 언뜻 보면 무표정해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 너머로 세이아드는 경멸과 분노를 엿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감정은 세이아드만이 알아차릴 수 있게끔, 레사스의 흰 얼굴 아래로 숨어 있었다.
세이아드는 저렇듯 아스테르를 향해 감정을 드러내는 레사스를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제게는 온화하고 간절하던 아름다운 사람이 저렇듯 깊은 증오를 품은 것이 낯설었다. 그러나 남들의 눈에는 그저 차분해 보이는 모습으로, 레사스는 아스테르를 서늘히 응시한 채 말했다.
“하지만 형님, 시기가 참으로 기묘하군요. 전대 실드라스 공작의 죄를 증명할 수 있는 순간은 지난 몇 년간 많았을 텐데, 어째서 전례 없던 괴물의 등장과 이토록 완벽하게도 겹치는지 말입니다. 꼭 형님께서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군요.”